<매드독>과 <괴물>에는 속내를 독일어로 말하는 사람(김민준)과 러시아어로 말하는 사람(이창진, 허성태)이 등장한다. 두 드라마는 모두 의욕 넘치는 신참과 경험 많은 팀장급이 버디(단짝)가 되어 움직인다. 16화의 반을 나눠, 앞쪽(1~8화)에서 큰 사건을 일단락하고 뒤쪽(9~10화)에서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발전시킨다. 김수진 드라마에서 또 다른 키워드는 ‘믿음’이다. ‘의심’이 스토리를 이어가는 힘인 <괴물>에서 이 ‘믿음’은 의심의 끝에 다다르는 결말이 아니라, 끊임없이 극을 추동하는 힘이다. 시청자를 혼란에 빠뜨리지만 나중에 보면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으로 신의를 지켰다. 의심이 극의 힘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믿음이 극의 힘이었다. 한주원이 이동식을 의심하며 주변인들까지 의심할 때 이동식은 말한다. “내가 감싸고 있는 사람 누굴까? 알아맞혀보세요.” 이동식, 한주원 둘 다 의심의 한가운데서 인간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정의 구현’이 있다. <매드독>의 마지막회에서도 최강우(유지태)가 경찰이 체포하러 오자 “죄가 그뿐이 아닐 텐데요, 천천히 이야기해보시죠” 하면서 팔을 내민다. <괴물>에서 역시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무리한 이동식은 처벌받고 징역까지 살게 된다.
“데뷔를 못하는 동안 제가 창고에 차곡차곡 넣어둔 것들이 두 드라마에 공통으로 들어간 것 같아요. 오랫동안 제가 좋아했던 설정과 주제인 거죠. 계속 그렇게 쓸지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다르게 써보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가져올 결과가 두렵기도 해요. 제가 좋아하는 설정이나 주제로만 계속 쓴다는 게 자기복제인 듯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매드독> 황의경 감독이 특징이나 색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씀해주셔서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작 2편을 해놓고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원하는 제 드라마의 특징이라면, 밥벌이를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은 쓰지 않더라, 정도 아닐까 싶어요. 지금까지 같은 마음으로 일했으니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작은 돌멩이들이 모여 물길을 바꾼다
- “악인에게 마이크를 주지 말라”고 <괴물>의 한기환이 청문회장에서 말한다. 범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만들면서 범인에 대한 연민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범죄자에게 사연을 주는 것이다. 모든 장르물 작가의 고민일 법하다.
=(연쇄살인마) 강진묵도 설정해둔 라이프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불운한 환경이 강진묵 같은 살인마를 만들었다는 사연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설정하는 매 순간 고민했지만, 불운한 환경이 그의 잠재된 악한 천성을 발현하게 되는 계기일 수 있기에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걸 면죄부로 보이게 쓰고 싶지는 않아요. 범죄자가 어떤 삶을 살았고 범죄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설정하되,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지점은 극에 드러내지 않는다, 가 제 기준점인 것 같습니다. 참 어렵죠. 감히 어떻게 제가 상처가 될지 아닐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또 너무 신경 쓰다보면 시청자가 빌런의 행동을 이해 못할 수도 있어요. 제 밥벌이를 위해 누군가를 상처받게 하지는 말자고 되뇌며 항상 공중에서 외줄 타는 심정으로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 <매드독> 마지막회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하면서 ‘사이다’ 장면으로 언급된다. 숨죽였던 피해자들이 등장해 권력을 향해 작은 돌멩이를 던진다. 부실 항공편의 운행, 권력자에 대한 작은 이들의 반란 등이 세월호와 촛불집회가 연상됐다.
= 과하게 드러내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세월호와 촛불집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돌멩이들이 모여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엔딩이어야 했어요. 사회적·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드라마의 재미를 방해하면 안되니까 아무도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쓰긴 했는데,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업하면서 영감받는 것을 곁에 둔다. <괴물> 작업 때 참조한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풍광을 찍은 사진집(리처드 미스래치·케이트 올프의 <페트로케미컬 아메리카>)과 지금 많이 보고 있는 이노우에 히로키의 여우 사진집. 1~2년 뒤 어떤 드라마로 나올까.
에필로그
길게 써서 보내준 작가의 하루 일상을 본문에 반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꼼꼼하고 완벽할 것 같던 김수진 작가에게서 발견한 ‘멍미’다. “인터넷 세상에서 아주 긴 시간 검색과 쇼핑도 좀 하고… 다들 그렇잖아요? 바로 일하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저도 똑같이, 즐거우나 일에는 도움이 안되는 시간을 길게 보내고요. 그러다가 대본도 좀 쓰고… 책도 좀 보다가… 저는 밥도 컴퓨터 앞에서 먹거든요. 책상 앞을 떠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 합니다. 가끔 게임도 합니다. 게임은 오충환 감독님의 추천으로 시작했어요. 게임에 익숙한 시청자가 드라마를 보는 세상이니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플레이스테이션과 닌텐도를 사고 싶었습니다. 갖고 싶다가 아니라 ‘사고 싶다’에 방점이 찍혀야 해요. 사고 나니 저는 흥미를 잃었고, 저와 함께 사는 동반인이 게임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