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W’ 송재정 작가, “볼 때 재미있는 것과 쓸 때 재미있는 것은 다른 차원”
2023-03-16
글 : 김수영
사진 : 백종헌
사진제공 MBC

흥미롭게도 <W>를 구상할 때 처음 떠올린 장면도 흡사했다. “내가 나한테 와서 총을 쏘는 주인공. <W>도 나를 미워하는 나의 피조물에 관한 장면이었어요. 보통은 피그말리온 신화처럼 내가 만들어낸 존재와 사랑에 빠지잖아요. 그런데 그게 나를 너무 미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순수미술 화가와 조각을 떠올렸는데 너무 옛날 스타일처럼 느껴져서 당시 트렌디하게 부상한 웹툰을 떠올렸어요.” 웹툰 작가와 웹툰 속 주인공이 목숨 걸고 갈등하는 <W>는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내가 나를 공격한다’는 모티브에 빠져 있었을까. “제가 시트콤을 오래 했잖아요. <순풍산부인과>도 그렇고 한번 하면 3년씩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내가 쓰는 캐릭터들이 진짜 내가 아는 사람 같아요. 김병욱 PD님과 작업할 때 새드 엔딩으로 많이 갔거든요. 나와 가까운 사람의 일처럼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내가 공들여 만든 것들을 내가 무너뜨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될까? 저 캐릭터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서 비롯된 생각 같아요.”

“동맹이니까요.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겁니다. 끝까지 같이 가시죠.”(<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이나 <W>, <알함브라>도 온전히 해피 엔딩을 맞진 못했는데요.

= 저는 진심으로 이 인물이 저기로밖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쓰는 거거든요. 처음에는 분명히 저와 제작진, 시청자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저 혼자 다른 길로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엔딩에 가까워지면 대본을 받은 감독님부터 “내 생각에도 그래” 하고 바로 납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럼에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거든요.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고 타협하거나 거짓을 써야 되는데 그것도 쉽지 않거든요. 엔딩에 관해 비판을 많이 받아서 이제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그때그때 맞춰보려고 자주 물어요. 보조 작가들에게도 “나 이렇게 가고 있는데 어때?” 하고 계속 묻습니다. (웃음)

가공의 세계에서 실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 새로운 소재나 기술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끌리는 편인가요.

= 시청자로서 저는 전통적인 휴먼 드라마를 좋아해요. 최근에 <나의 해방일지>와 미국 드라마 <석세션>을 재미있게 봤고요. 인물들이 감정적으로 얽히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엄청 좋아했습니다. 볼 때 재미있는 것과 쓸 때 재미있는 것은 다른 차원인 것 같아요. 대본을 쓸 때는 복잡한 퍼즐을 푸는 방식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나인>의 경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잖아요. 9개밖에 없고 20분만 타는 향. 이런 조건이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을 제한하고 이 인물이 어떻게든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시퀀스를 만들어나가는 게 재미있어요. 함정을 잘 파고 탈출할 수 있는 문도 잘 설계해야 하고요. 이렇게 미로를 짜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껴요. 순전히 이야기를 쓸 때만 그렇지 실제로는 방탈출이나 게임, 수사물은 즐기지 않습니다.

- 한편의 시트콤을 완성할 때도 작가마다 장기가 달랐을 텐데요. 왠지 작가님은 유머나 캐릭터보다 상황극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어렸을 땐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잖아요. ‘너는 상황 만드는 걸 잘하는구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지된 후에는 복잡한 상황 설정이 필요한 아이템이 전부 저한테 왔죠. 난처한 상황에 빠져서 그걸 빠져나가는 아이템도 주로 저에게 맡겨졌어요.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믿게끔 하는 것, 제가 만든 가공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실제 감정을 느끼게끔 하는 일이 흥미로워요.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어요.

글을 쓰다 막히면? 계속 다시 써본다. “이런 케이스도 써보고 저런 케이스도 써봐요. 아이디어를 10개씩 내고요. 말로 설명하기보다 빨리 써서 대본으로 보여주는 식이에요. 그러면 상대방도 명확한 의견이 나오니까. 다른 일을 한다고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냥 계속해서 파는 게 방법이에요.”

- 비현실적인 상상이 구체적인 이야기로 발전할 때 아이디어는 어떤 식으로 정리되나요.

= 대답하기 어려운데요. 제 머릿속에는 체계가 있는데 막상 꺼내면 두서가 없어서 보조 작가들도 어려워해요.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는데 공감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뇌에 많은 서랍을 만들어놓고 필요할 때 꺼낼 수 있게 인덱스를 잘해놓는다는 얘기였어요. 결국 작가에게 중요한 건 새로 알게 된 지식이나 정보를 서랍의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지, 그리고 언제 빼낼지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나 관련 팩트를 알게 됐을 때 무조건 수사물이 아니라 때에 따라 휴먼 드라마 서랍에 넣는 식으로요. <W>를 어떻게 썼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룹 아하의 <Take On Me> 뮤직비디오를 보고 떠올렸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만 가지고 된 건 아니거든요. 앞에서 말한 피그말리온 신화에 관한 상상과 서랍 속에 있던 이것저것이 탁 엮이는 거예요. 그러니 어렸을 때 경험부터 최신 정보까지 자기 서랍 정리를 잘해야 잘 꺼내 쓸 수 있어요. 제 이야기들도 결국 제가 50년 동안 어디선가 보거나 경험하면서 캐치한 것들의 조합이니까요.

- 작가님의 서랍 정리 방법이 궁금해지는데요.

= 제 서재를 보면 알겠지만 책마다 인덱스를 많이 해둡니다. 어떤 새로운 기술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여기에 붙일 만한 스토리를 떠올리는데, 그때 인덱스한 것들을 다시 찾아봐요. 제 옛날 추억을 뒤지기도 하고요. 이렇게 나의 경험과 책에서 본 강렬한 구절이나 저자의 철학, 그리고 뉴스나 트렌드로 접한 최신의 기술들. 이런 것들을 자주 엮어봅니다. 소재를 찾기 위해 억지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인덱스를 툭툭 해놓고 밥 먹고 여행하고 일상을 보내면서 낚시꾼처럼 엮이는 순간을 고요히 기다리는 식이지요.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보거나 새로운 일을 배우다가 뭔가 엮이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저렇게 기획안을 써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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