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송재정 작가, “'폭풍의 언덕' 같은 파멸을 맞는 사랑 이야기에 끌린다”
2023-03-16
글 : 김수영
사진 : 백종헌

잠 못 이룰 즐거움을 주는 ‘찐한’ 이야기들

- 평소 굉장히 진지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코미디 작가가 되셨나요.

= 신문방송학과를 나왔는데 그때까지 글 쓴 적이 거의 없어서 작가라는 직업은 꿈도 꾸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자를 꿈꿨지요. 그런데 공부를 너무 안 하고 학점이 안 나와서 공채를 볼 수 없는 상황까지 간 거죠. 그때 방송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콩트 과제를 냈는데 코미디 파트 강사님이 저더러 소질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요? 한번도 남을 웃겨본 적이 없는데요? (웃음)” 집에서도 믿지 않았죠. 맨날 말도 없이 혼자 앉아 있는 애가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고? 그래도 잘한다기에 제작사에 들어가 아이디어 작가로 열심히 했어요. 같은 제작사에 김병욱 PD님이 계셨어요. 새로운 시트콤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인원이 부족하니 참여하라고 해서 회의에 한번 들어갔거든요. 앉아만 있어도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뭔가 막 배우려는 찰나에 그 프로그램이 조기종영됐어요. 이후에 <순풍산부인과>를 한다고 아이디어 작가로 오겠냐는 제안을 받아 냉큼 갔죠. 코미디, 로맨스 등 모든 작법을 시트콤에서 배웠어요. 그땐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만일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날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 인생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인현왕후의 남자>)

- 시트콤을 10년 하고 드라마로 옮기셨죠.

= 10년 정도 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조금 더 심각한 이야기가 좋더라고요. <거침없이 하이킥!>을 할 때도 제가 로맨스를 쓰면 깊게 들어갔어요, 성향이 반영되니 쓸데없이 진지해지고 울고 불고하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지고요.

- 김병욱 PD님도 시트콤에서 웃음뿐 아니라 슬픔을 중요한 요소로 다루셨지요. 그런 면에서 PD님과 잘 맞으셨겠어요.

= 시트콤 밖으로 향하는 질주 기차를 탔다고나 할까. (웃음) 비슷한 게 좋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달라야 서로 완충이 되는데 ‘이렇게까지 찐하게 써도 되나’ 하고 가져가면 PD님은 “너무 좋다!” 이렇게 되니까. 배우들은 ‘나는 코미디 하러 왔는데 이게 뭔 일이지’ 싶고, 선배들은 “너무 딥하다. 보는 게 힘들어”라고 하고요. <인현왕후의 남자>를 할 때도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면 그렇게 됐어요. 울고 불고 죽고 그런 길로 가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사랑과 야망> 같은 극단적인 사랑 이야기, <폭풍의 언덕> 같은 파멸을 맞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 어렸을 때 저를 즐겁게 해준 작품들처럼 만들고 싶은가봐요. 어렸을 때 본 <나니아 연대기> <백 투 더 퓨처> 같은 신기한 이야기가 저에게 단순한 재미를 넘어 엄청난 꿈과 즐거움을 줬거든요. 정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고요. 제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도 궁금증이 생겨서 상상하느라 잠 못 이뤘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물론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없으니까 그만해야겠다 싶기도 하지만(웃음), 잘 만든 작품이 주는 엄청난 행복이 있잖아요.

- 후배 작가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주시나요.

= 경험을 많이 하라는 얘기밖에 없어요. 세상만사 호기심 가지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싶은 욕망을 가져보라고요. 자기 삶을 그리는 데 만족한다 해도 내 삶을 재미있게 살지 않으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없거든요. 보통은 마음이 급하니까 경험할 시간에 습작을 하고 교육원에 다니죠. 그렇지만 경험치가 적으면 건드릴 수 있는 분야 자체가 좁아져요. 습작을 잘해도 경험이 부족하면 내 주변의 아주 작은 현실 연애나 자기 또래를 넘어 묘사하기가 어렵죠. 지루한 것 말고 다른 걸 가져와보라고 하면 공상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가져오고요. 그때도 자기가 빚어낸 세계라기보다 미국 드라마 같은 걸 보다 떠올린 클리셰적 세계관인 경우가 많아요. 문제는 그렇게 떠올린 세계관 속에서는 대사를 쓸 수가 없어요. 캐릭터들도, 그 세계도 잘 모르고 낯설기만 하니까.

- 작가님은 요즘 무엇에 호기심을 갖고 계신지요.

= 이제까지 남자주인공 원톱물을 많이 썼다고들 하는데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지금처럼 여성 액션물이나 여성 주도적인 드라마가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유미의 세포들>을 통해 오랜만에 여자주인공 원톱물을 하니 그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차기작으로는 여자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요. 그리고 제대로 준비해서 본격적인 SF 드라마를 써보려고 해요.

사진제공 스튜디오드래곤

에필로그

<나인>을 생방송으로 본 기억이 난다. TV 앞에 앉아 송재정 작가가 설계한 미로 속에 홀딱 빠졌던 그즈음의 내 일기장에는 온통 <나인> 얘기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작가 최소 천재 아닐까” 하고. 갈망하고 고대했던 일들이 낙심으로 끝맺기 일쑤였던 사회 초년생. 일을 바로잡으려고 시간을 돌릴수록 미궁에 빠지는 선우(이진욱)를 보면서 감정 이입했고 ‘시간을 되돌린다고 더 나아지리라는 법은 없다’는 이야기가 묘한 위로를 줬다. 송재정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인>의 마지막 회 대사가 떠올랐다. “20년 전 나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필요도 없어. 내 존재는 잊어. 네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20년 후에 거울에서 날 만날 거야.” 어머나. 그때가 2013년, 나 열심히 살아서 10년 후 여의도에서 작가님을 만난 건가! 선우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였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돌아왔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반성을 많이 하고 있고…” “그렇게 못 쓰니까…” 하던 작가님의 겸손과 우려의 말을 커서로 많이 지웠는데 이건 그저 팬심 때문은 아니었다. 여기에도 작가님의 진심이 담겨 있지만, 현장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상상력에 더 책임감을 가지고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다”는 각오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구상을 마치고 집필을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들었다. <나인>의 박선우처럼 <알함브라>의 유진우처럼 씩씩하게 온몸으로 굴러다닐 여주인공을 보게 되는 걸까. 벌써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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