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른이 되었는지, 돌이켜보면 부모를 제3자처럼 바라보기 시작한 때 같다. 엄마라는 여자, 아빠라는 남자의 성격을 남에게 묘사할 때야 비로소 분리가 된 것 같았다. 특히나 어머니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 인고로 해석됐다. 아버지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면 희생하는 어머니의 골짜기는 더 깊어진다. <아버지가 되어주오>의 딸은 아버지의 과거를 조목조목 따져 물으며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사과하”라고 비난한다. 아버지는 가해자였고 한쪽(어머니와 자식들)은 피해자 집단이라고 생각해서다. 행적을 보면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엄마를 대변해 따진 것을 기특해할 줄 알았으나 엄마는 딸에게 되묻는다.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엄마는 덧붙인다. “네 말대로라면 내 인생 참… 슬프지 않겠니?”
스물두살에 아이를 낳고, 아홉살 많은 남자에게 발목 잡혀 평생을 참고 산 어머니, 딸이 써내려간 엄마의 인생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인생을 어머니의 목소리로 다시 받아쓰자 계절을 통과하는 향취와 온도가 달라졌다. 어머니를 살뜰히 사랑한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에서부터 오얏꽃 흩날리는 봄날 아버지와의 데이트까지, 인생은 부드럽고 찬찬히 흘러간다. <반에 반의 반>의 기길현 할머니에 대한 가족들의 기억 역시 상이하다. 큰아버지는 소설가 조카가 할머니를그릇 되게 기술할까 걱정돼 호출한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가족들에게 떡을 해오게 했던 할머니를, 고모는 식탐이 많았다고 추억하지만 큰아버지는 ‘그게 다 주변과 나누려 했던 것’이라고 정정한다. 계곡물에 첨벙 빠진 할머니의 춤사위 역시 다른 가족들은 남우세스러운 것으로 묘사하지만 큰아버지는 다르다. 어긋난 기억 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는 한층 다채롭고 맛깔난 사람이 된다. 천운영 소설집 <반에 반의 반>에는 여럿의 기길현 할머니와 여럿의 엄마 명자가 등장한다. 가족의 역사 속에서 여자들은 관능적이었다가 광기 어리고, 질기면서도 빛나는 생명력으로 존재한다. 말맛이 뛰어난 천운영 소설 속에서 나와 당신의 어머니가 살아 숨쉰다.
84쪽
어머니는 믿고 있었던 거지. 그 떡이 언젠가 큰 힘이 되리라는 걸. 그 믿음이 기적을 만든 거지. 그걸 기적이 아니고 뭐라 할 수 있겠니. 그러니 신앙이 될 수밖에. 셩경책 끼고 교회당에 나가는 노인들처럼. 언제든지 떡을 이고 집을 나서는 거지. 그런 냥반이었다. 네 할머니가. 기억해둬라. 식구들 굶겨가면서 저 혼자 떡이나 해먹고 앉은, 그런 사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