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다르덴 형제 작가론, 얼굴의 소멸로부터 시작되는
2023-05-11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올해 제24회 전주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토리와 로키타>(2022)를 들고 다르덴 형제가 처음 한국을 찾았다. 철저하게 현실 세계를 뒤쫓는 그들의 카메라를 보면서, 세계의 근원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비단 <로제타>(1999)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에 고통받는 정신의 탐구에 관한 그들의 태도는 신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훗날 그들의 이름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와 같은 영화적 성자들 사이에 놓일지도 모른다. 인간 정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들 형제의 영화들을 살펴보며 그 영화적 표상이 지닌 신성한 의미를 기억하고자 한다.

다르덴 형제는 촬영과 편집을 맡은 형 장 피에르 다르덴과 사운드를 맡은 동생 뤽 다르덴으로 구성된 2인조 감독이다. 젊은 시절에 장 피에르가 극작가 아르망 가티에게 비디오 워크숍을 배우던 시절, 뤽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스승이었던 가티는 무대와 관객을 분리하지 않고 목격자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의 연극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1996년 <약속>이 칸영화제에 소개된 이후 진행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형제는 가티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 정치는 우리가 집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어요. 예술과 삶의 관계, 정치 등 모든 것들이 가티와 함께 주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졸업 후 장 피에르가 몇달간 가티의 연극을 돕던 시기에, 우연히 뤽을 발견한 가티가 극단 합류를 권하면서 형제의 공동작업도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고매한 정치적 태도와 함께 영화 연출의 기본을 모두 그에게서 얻었던 것이다.

처음에 둘은 함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개입된 픽션의 요소가 그들을 윤리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결국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그들은 장르를 이동하게 됐다. 완전히 픽션으로 전향한 것이다. 그들의 첫 번째 장편 <팔쉬>(1987)는 유대인과 사형집행인의 관계를 탐구한 영화로, 연극을 각색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 <당신을 생각해요>(1992)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노동자에 대한 주제를 담았는데, 크게 실패했지만 형제에게 가르침을 줬다. 이 두 번째 작품 이후에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소규모 팀’과 작업할 수 있는 제작 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다. “잘 아는 사람들과 일하지 않는다면 판에 박힌 권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그들은 우려했다. 그렇게 그들의 세 번째 영화 <약속>(1996)이 탄생했다. 이 영화가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대되면서 형제는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의 행보는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로제타>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또다시 <더 차일드>(2005)가 두 번째 최고상을 그들에게 안겼다. 그리고 <아들>(2002), <로나의 침묵>(2008), <자전거 탄 소년>(2011),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언노운 걸>(2016), <소년 아메드>(2019)와 <토리와 로키타>까지 모든 영화들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람들은 다르덴 형제를 일컬어 ‘눈이 넷인 감독’이라고 부른다. 이 별명은 그들 영화의 핵심인 ‘관찰의 메타포’를 떠오르게 한다. 실제로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시선의 관계 구축을 위해 화면의 사이즈와 피사체의 관계를 설정한다. “영화는 운동이지만 몸으로 구현되는 운동이다”라는 이들 형제의 설명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들 영화에서 인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을 목표로 움직인다. 가끔 프레임을 벗어나거나 포커스가 고정되지 않는 장면들이 눈에 띄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시퀀스숏을 원칙으로 삼아서, 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오류를 그들은 용인한다. 간혹 드러나는 리버스숏의 개념도 커팅을 통해서만 수용하고 있다. 장면의 연결이 아니라, 오직 인물의 움직임만을 목표로 영화의 몽타주가 이뤄진다.

부유하는 피사체를 목표로 움직이다

평소 다르덴 형제의 리허설은 정밀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한달을 배우와 연습하고, 현장에서도 평균 20회 이상의 테이크를 반복한다고 한다. <더 차일드>의 어느 장면은 무려 80번 이상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한 다르덴 형제의 소개로 다시금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배우 중심의 일반적 핸드헬드 촬영법과는 구분된다. 예를 들어 존 카사베티스의 영화에서 흔들리는 화면은 배우를 더 잘 포착하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언뜻 비슷한 감상을 주더라도 다르덴 형제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즉흥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유하는 피사체를 목표로 움직인다. 즉 영화 속 캐릭터들 스스로 진화하며 관객을 초대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의 카메라는 희생한다.

<약속>이 칸영화제에 초대되었을 당시 많은 평자들은 그들의 영화를 모리스 피알라와 비교했다. 실제로 <벌거벗은 어린 시절>(1968)의 주제나 화면의 질감은 <약속>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시네마 베리테의 방식, 청소년기에 대한 언급,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 편집의 최소화 등이 그렇다. 이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 전문지 <레쟁록>과 가진 인터뷰에서 장 피에르는 촬영 전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를 즐겨본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의 ‘컷 방식’이 마음에 든다는 설명과 함께 그는 피알라의 영화 여러 편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이에 뤽은 덧붙였다. 피알라를 좋아하지만, 그의 영화를 로베르 브레송의 연장선상에서 느낀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다르덴 형제의 경우, 초기 필모그래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화들이 고전적인 몽타주를 회피한다. 예를 들어 한숏이 끝날 때까지 캐릭터는 프레임의 내부에만 머문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도, 그의 모습은 프레임 속에서 출발한다. 장소가 변하더라도 이러한 프레임 구성은 바뀌지 않는다. 최근 영화일수록 이 경향은 더 짙어진다. 클로즈업이 강한 몇몇 영화들의 경우, 공간 감각이 완전히 상실될 정도로 영화는 인물만 쳐다본다.

이러한 장면을 ‘주관적’이라 설명할 수 있는지는 모호하다. 아무리 인물이 상황을 중재하더라도, 그의 ‘관점’이 중심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토리와 로키타>의 첫 장면을 떠올린다. 주인공 로키타(졸리 음분두)의 정면 얼굴이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증명사진을 찍듯, 그녀는 똑바로 쳐다본다. 수많은 대사들이 오가지만 카메라는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그녀의 눈이 무표정하기 때문에 관객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조금의 시간이 걸린다. 이를 마지막 장면과 비교해야 한다. 사건이 모두 벌어진 이후의 상황이다. 관객의 뇌리에서 그 순간만큼은 무조건 슬프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 않는다. 대신 노래를 부른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관객은 고민한다. 이 막막한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 고심한다. 이때 다르덴 형제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소개하는 문구 한 가지가 떠오른다. 형제는 마이크를 들고 계속해서 ‘우정’을 설파했다. 어쩌면 난민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식도 이때의 우정과 연관되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세계의 대다수 나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만 고집한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서, 그들은 가난한 나라를 향해 피자 조각을 던진다.

만일 <토리와 로키타>를 ‘정면에서 시작되는 영화’라고 말한다면, <아들>은 그 반대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의 첫 장면은 확실히 인물의 후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친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남자를 비추던 카메라가 서서히 서 있던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관객은 비로소 그가 서 있는 그 장소가 ‘목공소’임을 알게 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타인의 아이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를 통해서 매개된다. 2002년 이 영화가 개봉한 당시에 <르몽드>를 비롯한 프랑스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기독교적 상징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들>은 이전의 어떤 영화들보다 더 명료하게 형상의 장치들을 사용하는 작품이다. 목공소란 장소가 알리는 상징의 요소가 그러하며, 주인공의 등에 둘러멘 긴 막대기의 형상도 마찬가지로 신성하게 느껴진다. 이 모든 요소가 인물을 주님의 유일한 외아들과 겹쳐지게 만든다. 아마도 죄를 지은 아이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상황을,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는 종교적 관습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약속>의 시나리오에 대해 뤽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자전거 탄 소년>에 대해서는 ‘뒤집힌 피에타의 형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자전거 탄 소년>에서 두 인물의 첫 만남은 성모와 성자와 위치가 뒤바뀐 채로 이뤄진다. 이들 영화에 숨겨진 기독교적 도상의 장치들은 결국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만 발현되는데, 이 점이 흥미롭다. 다니엘 세르소의 말처럼 이 방식은 형제의 리얼리즘을 더 세련되게 느껴지게 만든다. “설사 그들의 영화가 기독교 내레이션의 영향 아래 점철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러한 영향에 맞서서 그 생각의 내용을 이성의 영역으로 되돌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어느 것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아주 느슨하게, 이 세계의 빛을 영화 안으로 되돌린다.

<소년 아메드>의 마지막 미스터리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선 두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내내 옆모습만 보여준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인물의 프로필을 찍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이슬람 극단주의에 짓눌린 인물의 옆얼굴에서 카메라가 멈춘다. 비로소 화면에 꿈틀거리는 매개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한 여인이 햇살과 함께 소년에게 팔을 뻗는다. 대사나 상황으로 표시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비스듬한 그의 얼굴이 이후 극단적 선택으로부터 벗어날 것임을, 구원의 과정이 인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영화는 강조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언노운 걸>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기독교적 상징에 집중했다. 하지만 최근의 행보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비단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이라는 테마 때문만은 아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종교를 뛰어넘고 인종을 뛰어넘어서, 이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고귀한 모든 이야기들을 그들은 전파한다.

그 자리의 마지막을 채우는 것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모든 미스터리는 얼굴의 소멸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설사 그 얼굴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그 단면을 가지고 인물의 내면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영화 전체를 통해 파편의 일부를 역으로 추리해내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이때의 얼굴은 표현이 아니다. 그저 얼굴에 반영된 풍경의 일부일 따름이다. 다르덴 형제가 말하고자 하는 세상의 진리도 그 모습 안에 담겨 있는 듯하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종교적 문제도 정치적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것을 훼손하거나 확대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가장 큰 이슈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삼위일체가 존재한다면, 그 자리의 마지막을 채우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구약이 가리키는 유일신의 존재와 신약이 가리키는 그 아들의 존재, 그리고 관객이라는 영혼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에만 하나의 완전한 세계가 완성될 수 있다. 이를 성스러운 영화의 전형이라고 그들의 필모그래피는 조심스럽게 이른다. 세계를 위한 행동주의로서의 영화, 관객과 함께하는 다르덴 영화의 모습은 현대 영화의 또 다른 전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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