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 영화산업이 호황이라고 진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성공시킨 도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세인트 세이야: 더 비기닝>은 제작비 6천만달러의 10분의 1 정도에 그치는 월드와이드 매출을 올리며 쓴맛을 봐야 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국과 달리 제작사에 충분한 수익이 돌아가지 않는 일본의 시스템을 오랫동안 지적해왔다.
인디영화의 작가들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대부분의 일본영화는 영화사, TV 방송국 등 콘텐츠 기업이 임의로 조합을 만들어 특정 작품에 공동 투자하는 제작위원회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흥행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기업들이 안전한 기획에만 투자하는 한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일본영화계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 이유를 제작위원회의 보수성과 폐쇄적인 시스템에서 찾는 비판도 거세다. 하지만 2010년대부터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후카다 고지 등의 이름이 새롭게 호명되고 유의미한 비평적 성과를 얻는 것은 특히 일본 인디영화계가 척박한 환경에서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은 제작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영화 만들기를 실천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며 다양한 실험에 몸을 던진, 지금 아시아영화의 중요한 축으로 성장한 아웃사이더들이다.
최근 일본 인디영화가 만들어지는 루트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가장 주류는 도쿄예술대학, 도쿄공예대학과 같은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도쿄예술대학은 구로사와 기요시와 하마구치 류스케를, 도쿄공예대학은 스와 아쓰히코를 배출했다. 대안은 뉴 시네마 워크숍(NCW)이나 영화미학교와 같은 영화 교육 기관에 입학하는 것이다. 전자는 이마이즈미 리키야, 후자는 후카다 고지가 거쳐간 곳이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영화 공부를 했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해 지속적인 영화 만들기를 실천한다. 이를테면 영화미학교 출신 후카다 고지를 중심으로 한 ‘후카다팀’은 단편영화에서 시작해 최근 <러브 라이프>까지 인연을 이어왔다. 이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자발적으로 현장에 참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건비 부담에서 자유롭다.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자주영화’를 만든다거나 대학, 세미나, 문화 기관 등에서 주관하는 영화 워크숍의 집단 창작 형태로 제작비 문제를 해결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해피 아워>와 <유코의 평형추>는 연기 워크숍과 병행하며 받은 수강료로 예산을 마련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제작위원회도 거대 자본이 들어간 블록버스터만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독립영화 감독이 제작위원회 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일본영화의 제작위원회로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몇번 받았던 강상욱 미디어캐슬 대표는 “합리적인 예산으로 영화 한편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원화로 제작비 20억원을 넘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 실제로 제작위원회 심사를 통과한 영화들도 무척 다양하다. 작고 단단한 영화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마리코 데쓰야 감독의 <디스트럭션 베이비>에 출연한 스다 마사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니시지마 히데토시처럼 톱 배우가 작은 영화에 출연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19 때 일본의 문화청에서 진행한 예술영화 지원사업 ‘아트 포 시네마’, 후카다 고지가 이끄는 일본 독립영화길드의 지원금도 요즘 일본 독립영화 감독 사이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꽤 많은 제작비를 마련한 사례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8일 만에 2천만엔의 모금을 성공시켜 화제가 됐다.
그 과정에서 감독들은 흥행 부담을 덜고 다양한 시도를 거치면서 고유의 스타일을 정립할 기회를 얻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생산적인 실패를 권장하는 워크숍 경험을 거치면서 긴 리허설, 비전문 배우, 시나리오 리딩의 반복 훈련 등 대표적인 그의 작업 방식을 완성했다. 그의 도쿄예술대학교 대학원 졸업영화 <열정>은 학부 시절 만든 단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2003)에서 시도했던 캐릭터와 언어에 대한 실험을 확장한 것이고, 도쿄의 영화·연극학교 ENBU 세미나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든 졸업 프로젝트 <친밀함>부터는 아예 워크숍을 영화 안으로 끌어오기 시작했다. 후쿠오카독립영화제의 니시타니 가오루 프로그래머는 “친구들이 모여 영화를 제작하기 때문에 제작비는 절감하고 자기 스타일은 지킬 수 있다”고 최근의 인디영화를 설명했다.
물론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만으로 유망한 감독이 탄생할 수는 없다. 일본의 커뮤니티 시네마, 미니 극장 문화는 인디영화가 장기 흥행으로 입소문을 기대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수입·배급한 한동희 디오시네마 대표는 “작은 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면 회사(해외 세일즈사 및 배급사)에서 작품을 픽업해간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이들의 작품이 알려지는 양상을 설명했다. 일본에서 10년 넘게 영화를 공부한 주희 엣나인필름 이사는 “<해피 아워>가 이미지 포럼이라는 극장에서 단관 개봉했다. 당시 극장 프로그래머가 러닝타임이 길지만 정말 좋은 영화라고 추천하면서, 매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줬다. 이렇게 예술영화를 지지해주는 문화적 기반이 하마구치 류스케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는 경험담을 공유했다. 도쿄의 영화·연극학교 ENBU 세미나의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진 또 다른 작품,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84석 단관 개봉 후 점차 개봉관을 확장해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니시타니 가오루 프로그래머는 “도쿄 이케부쿠로 시네마 로사, 요코하마 시네마 잭 & 베티 같은 극장이 젊은 인재를 발굴해 소개하는 사례가 많다”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역시 시네마 로사에서 처음 발굴된 뒤 SNS에서 입소문이 난 사례라고 설명했다.
감독이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고 나면 유럽권의 투자를 받는 활로가 뚫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후카다 고지의 <하모니움> <러브 라이프>는 프랑스 자본이 투입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오래전부터 지켜봐온 유럽의 제작사 및 세일즈사는 일본 예술영화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해외 세일즈를 독일의 더 매치 팩토리가 맡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해외 판매는 프랑스의 셔레이드가 맡는 것처럼 아예 해외 세일즈를 전담하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유럽 영화사와의 네트워크는 해외 영화제에서 일본 인디영화가 주목받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와는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가
이같은 일본 인디영화계의 자생은 1970년대 일본영화계가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등장한 로망 포르노가 감독의 등용문이 됐던 현상을 연상케 한다. 정사 신의 횟수, 러닝타임, 프로덕션 기간 등 몇 가지 법칙만 지키면 창작자의 어떠한 발칙한 실험도 용납되는 시스템이었다. 로망 포르노를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 모리타 요시미쓰, 스오 마사유키와 같은 감독이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본영화계는 한계 속에서 분방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스템을 통해 명맥을 이어온 역사가 있다. 주희 엣나인필름 이사는 “옛날부터 일본에는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절박함으로 뭉친 일본의 영화 제작자들이 생존하는 모습은 한국 독립예술영화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올해 <러브 라이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상영한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최근 일본 인디영화가 코로나19 때도 유의미한 비평적 성과를 얻고 소재 또한 다양하게 느껴지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적어도 주어진 예산 안에서 영화를 어떻게 찍고 배급해야 하는지 안정된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반면 팬데믹 시기 한국 독립영화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애초에 기획, 제작, 배급, 상영 그리고 다시 부가 판권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순환 구조가 독립예술영화계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의심된다”고 우려했다. 일본 인디영화가 한계를 돌파해낸 방식이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신진감독이 예술적 영감을 펼치고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은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영화인들을 위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