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의 무수한 거인들이 작고한 지난 한해와 올해 초, 나를 가장 슬프게 했던 소식은 아오야마 신지와 이강현 감독의 부고였다.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의 죽음도 적잖은 충격을 전했지만, 20세기의 역사를 직접 통과하지 못했던 나는 내가 살아온 90년대와 21세기 초의 현실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려 분투했던 이들의 작업에서 더 커다란 우정을 느끼곤 했다. 비평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에릭 로메르는 영화비평의 목적이 “그저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는 과거의 작품만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역사에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작품에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로메르의 이 말을 곱씹으며 종종 아오야마와 이강현의 대표작인 <유레카>와 <얼굴들>을 떠올리곤 했다. 두 영화 또한 과거의 이상에 대한 믿음을 지속하려고 시도하되, “그저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는” 과거의 유산에만 매몰되지 않은 채 동시대의 현실적 제약을 직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영화가 새롭게 부상한 미디어와 뒤섞이며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변화를 겪어오던 시기에도, 여전히 내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그들의 작업은 종종 심금을 울렸다. 그렇다면 <유레카>와 <얼굴들>은 어떤 방식으로 과거의 이상을 승계하려 했고, 어떤 방식으로 그 이상의 불가능성을 변화한 세계 속에서 숙고하려 했을까? 이 자리에서는 영화가 걸음을 담아내는 방식의 변천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그 변화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걷는다는 행위를 이상에 관한 실천의 형식으로 번안한 과거의 걸작을 살펴보며 두 영화와 대조해봄 직한 원형적 참조점을 마련해보도록 하자.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잠입자>다.
<잠입자>: 미결정성의 목적지를 향하는 걸음의 신성
타르콥스키의 <잠입자>에는 방문자의 내밀한 소망을 이뤄준다고 알려진 “구역”에 도달하려는 세 인물이 나온다. 과학자, 작가는 구역에 도달해 소망을 실현하기를 갈망하는 두 인물이며, 이들은 구역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인물인 잠입자와 동행해 출입이 금지된 그곳에 도달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잠입자>를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지게 만든 기묘하기 그지없는 설정을 전해 듣는다. 그것은 잠입자가 구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괴이한 이동의 지침으로, 그 지침의 세부적인 항목은 다음과 같다. 구역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발을 멈춰 선 곳에서 손수건을 던진 후, 그 손수건이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손수건이 떨어지리라 예측되는 곳으로 당장 내달리면 될 것 같은데, 왜 이런 번거롭기 짝이 없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걸까. 심지어 행선지를 가리키는 손수건을 던지는 당사자가 본인이지 않은가. 게다가 여기에 성가시기 짝이 없는 몇 가지 규칙이 또 추가된다. 그곳에서는 눈앞에 목적지가 보이더라도 냅다 직진하지 말고 에둘러 우회해야 오히려 가까워질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모든 말장난 같은 규칙이 짜증나서 집에 가려 할 때도, 걸어온 길을 곧이곧대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뭘 어쩌라는 건가?
타르콥스키는 구역을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인지할 수조차 없는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제시해두었다. 이 전략의 또 다른 예시는, 바로 구역에 있는 인물들이 정면을 바라보는 시점숏을 허락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인물을 측면으로만 포착하면서 그들의 시야를 관객이 인지할 수 없는 외화면의 영역에 위치시켜놨으며, 결말에 이르러 삼인방이 직면한 구역의 실체 또한 끝내 시점숏의 형태로 가시화되지 못한다. 심지어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드넓은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채택한 바 있고, 후기작인 <노스탤지아>와 <희생>에서도 중세시대의 건축물처럼 널찍한 수평적 공간을 구축했던 타르콥스키는 <잠입자>에서 스탠더드 비율을 채택한다는 이례적인 선택을 통해 밀폐된 공간감각을 창출한다. 그 비좁은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은 시종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대머리의 뒤통수를 내보인 채 얼빠진 표정을 짓기 일쑤라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듯한 조형적 인상은 심화된다. 대체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걸까? 눈앞을 보는 것도, 그곳으로 직진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한때 타르콥스키의 영화가 난해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잠입자가 제안하는 수수께끼 같은 규칙을 이해하지 못해 흘려버리곤 했다. 하지만 갖은 시련을 겪어온 20대의 끄트머리에서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나는 이 설정이 소망에 관한 인생의 섭리를 섬찟할 만큼 정확하게 집약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영화의 도입부, 타르콥스키는 돈에 눈이 멀어 형을 죽인 뒤 죄책감에 시달렸던 선대 잠입자 디코브라스가 형의 부활을 소망하며 구역에 입장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구역이 그의 내밀한 소망을 실현한 결과물은 되살아난 형이 아닌 엄청난 돈더미였고, 환멸감에 시달리던 그는 자살했다. 자아는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잠입자는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근대적 환상이 유리알처럼 부서져내린 파국을 직시한 채 불확실성에 감싸인 소망에 가닿는 대안적 방안을 강구한다.
그리고 그 방안은 실천이 어렵지 우리 모두가 머리로는 알고 있는 종류의 것이다.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표를 사전에 가늠하며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오만한 자기 확신에 차 있기보다는 수행적 실천을 앞세우는 근면함을 갖춰야 한다(손수건을 먼저 던진 후 이동해야만 한다는 설정). 또한 소망이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때로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목적지로 즉각 향하려는 조급함을 제어하며 우회하는 유연함을 지닐 때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 운명적인 만남의 직감을 전하기도 한다(앞으로 즉각 향하지 말고 돌아가야 오히려 도착점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설정). 게다가 결국 이런 곤욕스러운 부조리에 질려 모든 실천을 포기하려 할 때조차,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을 거슬러 회유할 수 없다는 진실을 쓰라리게 인정해야만 한다(걸어온 경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설정). 소망이란, 바로 인생이란 미로에 내재한 그런 불합리성을 감내하며 걷는 자에게만 내려오는 신의 장난 같은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여정의 끝에서, 잠입자의 딸에게 내려온 불가사의한 기적의 은총처럼.
구역에 관한 또 다른 기이한 언급으로, 잠입자는 구역에 도달하려는 시도 자체에 의해 그곳의 공간적 구조와 목적지가 변형되므로 유의하라고 말한다. 관찰되는 대상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실시간으로 변형된다는 이 착상으로부터, 우리는 양자역학의 원리와 그것이 내재하는 실천적 함의를 통해 투명한 재현의 규범을 의심하는 인문적 실천을 모색했던 물리학자 카렌 바라드의 논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보다 간단하게 보고 싶다. 엉망진창으로 얼룩진 세계사만 보더라도 분명하지 않은가. 세상을 개선하기 위한 확정적인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개선하려는 의도 자체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희망의 사도로 여겨졌던 신기술과 이상주의가 인류의 뒤통수를 친 사례가 얼마나 많으며, 당장 썸을 탈 때조차 의도를 내비치는 행동은 상대방의 반감을 불러오기 일쑤이지 않은가.
원작 소설가인 슈투르가츠키 형제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이념이 좌초하던 시기를 살았던 타르콥스키는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상을 갈망하면서도 영화를 선전 도구로 전락시킬 수 없었다. 세계란 합리적으로 해명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마치 <솔라리스>의 혹성처럼 항구적으로 변동하는 모순의 미로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어느 하나의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지속적인 실천에의 의지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관찰을 앞세우는 과학자, “경험주의는 집어치우라”고 과학자에게 조언하지만, 정작 본인도 입으로만 그렇게 떠들며 바닥에 드러눕는 작가가 모두 실패한 가운데, 오직 구역으로 도달하려는 의도성을 배제한 채 걸음을 지속하는 잠입자에게만 예기치 않은 소망이 실현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걸음은 타르콥스키가 줄곧 참조하며 존경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실천적 사랑을 강조하며 내세웠던 메시지, 곧 “논리보다 앞서,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 사랑해야 하고, 그래야 비로소 의미도 깨달을 수 있다”는 진실을 시각화하는 몸짓에 다름 아닌 것이다.
타르콥스키의 영화는 미결정성의 목적지를 향하는 걸음의 영화이다. 구원을 향하되 뚜렷한 의도를 전제하지 않으며, 서사적 기능을 거부한 채 행위의 시간성만을 오롯이 남기는 이 걸음은 인물을 ‘그래서’로 구성된 합리적 궤도로부터 이탈시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수용하는 윤리적 각성으로 인도한다. 크리스 마커는 타르콥스키에 대한 탁월한 비디오 에세이인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에서 대다수의 미국 서부극이 하늘을 배경으로 선 인물을 로앵글로 담아 위엄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 타르콥스키의 숏이 공중에서 지상에 놓인 인물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대지를 응시하는 카메라가 가리키는 것은 하늘이라는 신성의 증명 가능한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불가지성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속하는 성자의 걸음이다. 이것이 바로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하늘에 가닿으려는 열기구의 추락에서 시작해 대지를 걷는 성자의 여정을 거쳐 진흙으로 빚어낸 종의 기적으로 귀결되는 이유이며, <잠입자>를 포함한 그의 영화가 신발이 진흙을 밟는 감촉과, 공간에 울려 퍼지는 걸음 소리의 시청각적 물성을 그토록 인상 깊게 담아낸 이유일 것이며, 대체로 현실적인 문제와는 거리를 둔 타르콥스키의 지식인적 주인공이 시집이나 빈 병이나 커튼처럼, 실용적 기능을 결여한 사물로만 채워진 텅 빈 공간을 롱테이크로 거니는 이유다.
타르콥스키가 후기작을 남긴 70, 80년대는 전후의 황금시대가 종료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질 만성적 불황과 사회적 동요가 본격화하고, 암암리에 명맥을 잇던 저항의 징조가 뿌리 뽑히던 시기였다. 이 모든 것은 신의 탓이 아니라 인간의 경제적, 정치적 활동이 배태한 현상이므로 순교자적 열정을 강조하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는 종종 현대가 상실한 영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열광적 반응과,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양면적으로 받아왔다. 지금까지의 내 분석은 타르콥스키가 현실적 시공간을 배제한 이유를 단순히 순진한 종교적 열정뿐 아니라 명확한 대안이 사라진 속세에서도 실천적 윤리를 증류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아무리 현실적인 문제라고 하더라도,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에 대한 믿음은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하는 개인의 종교적 영성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르콥스키에 대한 불만에 수긍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선보인 걸음의 신성을 보다 세속화된 현대사회의 배경 안에서 개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타르콥스키보다 한 세대 이후의 작가인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마치 그러한 고뇌를 담아낸 듯한 작품이다.
<유레카>: 걸음의 무상함, 기다림의 윤리
<유레카>에서 흥미로운 점은 현대 일본의 현실적이고 사무적인 시공간이 커튼이나 드넓은 수평적 부피를 간직한 타르콥스키적 공간과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전자가 부과하는 폐쇄적인 감각을 후자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걷기의 몸짓을 통해 타개하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걸음이 산출하는 효과를 말하기에 앞서, 그것이 타개하고자 하는 폐쇄적인 공간의 기원을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가 극복하고자 하는 폐쇄적인 공간의 구조가 국가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유레카>는 버스 테러 사건에 피해자로서 휘말린 나오키, 코즈에 남매와 버스 기사 사와이가 대안 가족을 구성해 치유의 여정을 떠나는 영화다. 이 대안 가족의 형성은 사회운동의 실패와 옴진리교 사건과 같은 불길한 짐조로 전통적인 공동체가 훼손되던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유레카>는 오즈 야스지로 이후 내려오는 일본 가족영화의 계보에 스스로를 자의식적으로 위치시킨다. 극의 초중반부에서 남매와 사와이, 아키히코가 가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마주 보는 숏의 구도가 오즈의 특징적 숏을 연상하는 방식으로 네 차례 반복된다는 점은 그 점을 명시적으로 나타낸다. 오즈가 대면과 화합의 의례를 통해 보수적인 가족 공동체의 질서를 양식화했듯, 테러 사건 이후 파탄난 가족과 마주하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던 <유레카>의 인물들도 이 마주 보기의 구도 이후에 그들만의 가족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 점을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유레카>는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단순히 전통적 가족의 특징적 미장센을 맥락 없이 모방하는 것을 넘어, 변화한 시대의 통증을 극복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윤리적 탐색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실제로 영화는 마주 보기라는 방식이 단순히 회복의 의례로 작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성원의 개인적 심경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가령 2년 동안 가출한 사와이가 형에게 근래에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니냐고 추궁받는 장면을 살펴보자. 사와이는 살인범은 아니지만, 트라우마로부터 회복할 여유를 주지 않은 채 가족의 역할극에 부합하라는 형에게 침묵한다. 영화는 그런 사와이의 침묵을 존중하듯, 그의 앞모습을 보며 답변을 요청하는 대신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이다. 다음 시퀀스에서 아침이 되면 사와이는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받은 후, 출근하는 대신 가출해서 남매의 집에 눌러앉는다. 당사자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통적 공동체의 역할을 타율적으로 부과하는 대면의 요구는 구성원의 수긍 대신 회피를 낳을 뿐이라는 점이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유레카>에서 본다는 행위는 국가권력이 집행하는 폭력의 원리로도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점숏의 빈도가 의도적으로 절약된 <유레카>에서 시점숏은 사와이와 남매의 대면 장면에 앞서, 테러 진압이 일어나는 도입부에 등장한다. 잊히지 않는 인상을 새기고 가는 테러범은 형사에게 밀폐된 버스 내부가 답답하다고 무전하더니 대뜸, “형사님, 제가 누구인지 아시나요?”라고 묻는다. 이후 무전은 급작스럽게 두절되어 테러범의 질문은 대답되지 못하고, 사와이와 함께 밖으로 나간 범인은 근처 건물 위에 잠복한 스나이퍼의 시점숏에 포착된다. 이윽고 스나이퍼가 테러범에게 총격을 가하자 테러범은 순순히 붙잡히는 게 아니라 버스 내부로 다시 들어가 코즈에 남매에게 총을 겨눈다. 스나이퍼가 테러범에게 향했던 저격의 시점숏이 테러범과 남매 사이에서 재차 반복되는 순간, 형사가 뛰어들어와 테러범을 사살한다. 국가는 이름을 불러달라는 이에게 총을 겨눔으로써 응대했고, 그 폭력은 국가에서 테러범에게로, 테러범에게서 나오키에게로, 이후에는 나오키에서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이어지는 추가적인 폭력의 연쇄를 배태한다. <유레카>는 사랑받지 못한 이들에게 사랑 대신 제도화된 무인칭적 폭력을 가하는 국가의 시스템과, 대면을 강요하는 가족에게서 동일한 시각적 폭력의 회로를 발견한다.
세기말 국가와 가족 제도의 문제를 내파한 <유레카>는 사와이에게서 코즈에로 이어지는 포용적인 마주 보기를 대안적 윤리로 제시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릴 아이들을 근심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사와이의 눈,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가족의 모습을 새겨넣는 코즈에의 눈은 휘청이는 인물들을 쓰다듬듯 바라보며 대안적 공동체를 잇는 연약한 시선을 긋는다. 하지만 이 시선은 상술했듯 그저 마주 보는 의례를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가 서로 마주 볼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을 존중하며 기다리는 절차를 수반한다. 그것이 바로 형사가 버스 여행을 떠나려는 사와이에게 “도망치는 거냐”고 물었을 때, 사와이가 “자신만의 답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때까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대안 가족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서로 마주 보는 대신, 등을 맞대며 시선을 피하는 배려의 자세로 견뎌낸다. 테러 사건 당시 사와이와 테러범이 등을 댄 채 대화를 주고받는 도입부의 숏을 여러 차례 변주하는 이 전략과 관련해서는 두 장면을 거론하고 싶다. 첫 번째 장면은 버스 내부로 나뭇잎의 그림자가 비쳐 들어오는 어느 날 밤, 서로 등을 돌린 채 구석에 위치한 사와이와 남매가 버스 벽면을 노크해 소리를 내며 신호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놀랍도록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등을 돌린 인물들이 그저 같은 공간에 현존하고 있다는 신호만을 주고받는 이 임시적인 버스 공간이, 마침내 마주 보는 의례를 양식화하는 오즈의 전통적 저택을 대체하는 가족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면은 사와이가 범죄를 미수한 나오키를 제압한 뒤, 나오키를 자전거에 태우고 빙글빙글 도는 장면이다. 그 직전의 순간, 사와이와 나오키가 나눈 대화를 잊기 힘들다. “왜 죽이면 안되는 거야?” “죽이면 안된다고는 안 했어. 살인이 하고 싶다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이면 돼.” 사와이는 안다. 신이 사라진 시대, 국가와 공동체의 규범이 본인의 자리를 박탈한 시대에 그는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이유를 초자아의 언어를 빌려와 말할 수 없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말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지 말아야만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공리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규범을 사역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이를 죽일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서다. 신이 부재한 세계에서도 인간을 죽여선 안된다는 불가해한 진실이 자신을 흔드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눈앞에 선 세속적 타자의 현존으로부터 신의 형상을 발명해낸다.
그렇기에 사와이는 여기서도 나오키를 제압할 뿐, 교조적인 훈육의 언어를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등을 돌려세운 나오키를 뒷좌석에 태운 채 세 바퀴를 돌 때까지 답을 기다려준다. 세 바퀴가 지나도 답을 못하자, 그 규칙을 무시한 채 계속 돌며 나오키의 답을 기다린다. 이 장면은 형사가 사와이를 연쇄살인사건의 혐의자로 소환해 마주하며 답변을 추궁하던 심문실 장면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형사와 달리 나오키에게 답을 요청하지 않는 사와이의 행동은 대안 가족의 윤리가 그저 오즈적인 대면의 구도를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대신, 타자가 마주 볼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시간적 지속을 공유하는 윤리학에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특별한 당위나 목적을 사전에 설정하지 않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드넓은 평야를 수평적으로 가로지르는 인물들의 걷는다는 동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네마스코프의 광활한 여백을 유려하게 활용하는 <유레카>는 널찍한 공간에 배치된 인물이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며 멀어져가는 장면을 유독 아련하고 서정적인 질감으로 담아냈다. 다소 도식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동작은 비좁은 가옥에서 오즈의 인물이 주고받는 대면의 의례를, 광활한 서부극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작별의 몸짓으로 대체함으로써 해체된 가족 공동체의 증상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별다른 서사적 기능을 함유하지 않는 숏의 경우에도 아오야마 신지는 인물들이 종과 횡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도록 동선을 설계해, 그 동선을 걷는 걸음의 시간을 사려 깊게 응시한다. 이를테면, 대안 가족이 야외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각각 수평적으로 과도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도록 배치된 인물들이 공간을 왕복하는 장면을 하염없는 트래킹숏으로 담아낸다.
<유레카>에 대한 비평은 대부분 장면을 정교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영화가 만들어졌을 당시의 외재적 맥락을 거론하는 데 그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러닝타임 대부분을 채우는 이런 식의 걸음이 즉각적인 해석을 난감하게 하는 무상함으로 충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몸짓을 비평하기 위해서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그 동작이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파헤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특정한 의미가 결여되었음에도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효과를 창출하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상술했듯 <유레카>에서 그 무상한 걸음은 즉각적 대면을 요구하지 않고 서로를 기다리는 대안 가족의 윤리학적 시간을 구성한다. 트라우마를 하루빨리 극복하라는 힐난이나(사와이의 형), 제대로 심문에 응하라고 요청하는(형사) 사법의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치유의 시간을 허가한다는 점이야말로 그들이 이 걷기의 여정에 동행한 이유일 것이다. 세르주 다네의 말처럼, 영화는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걸음의 분방함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다. 그런 점에서 <유레카>의 걸음은 의도성과 고정된 경로로부터 이탈해야만 은총에 도달할 수 있음을 전제했던 <잠입자>의 걸음과 흡사한 원칙을 공유한다. 기나긴 걸음 끝에 잠입자의 절름발이 딸에게 기적이 찾아왔듯, 시종 입을 다물던 코즈에는 마침내 종막에 이르러 입을 열며 그들이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의 이름을 애도하듯 소리친다. 코즈에가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제공한 이인 “버스 테러범”마저 호명할 때, 영화는 도입부에서 “형사님,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라고 물었던 테러범의 질문에 대한 응답을 마침내 되돌려주며, 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는 연쇄를 단절하는 작은 기적을 낳는 데 성공한다.
<유레카>와 <잠입자>에 깃든 걸음의 신성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작이 아니다. 은총이 내려온 잠입자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설득할 수 없었으며, 코즈에는 폭력의 연쇄를 단절했지만 이제 피를 토하는 사와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조차 납득할 수 없는 규칙과 믿음을 따라 지난한 걸음을 지속한 끝에, 그들은 인간다움을 말소한 채 질주하는 폭력적인 세계의 질서가 알지 못하는 동행의 공동체를 꾸리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형상으로 세계가 상실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 공동체에 다다르는 길은, 내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는 여정이 아니라, 해명할 수 없는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걸음을 통해 어느새 변화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비합리적인 도약의 과정이다. 타르콥스키의 인물들이 종종 공간을 거닐다가 문득 벽면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후 흠칫 놀라는 이유도 이런 은총의 성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합리적인 신성은 모두 세속화된 문명에서는 허락받지 못하기에, 두 감독은 일상의 권역을 벗어난 예외적인 무대로 탈출함으로써 걸음의 무대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잠입자>의 구역, <유레카>의 황야가 모두 주인공이 탈출한 끝에 도착한 공간이라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성스러운 인테리어 장식과 풍경을 통해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표백하곤 했던 타르콥스키와 달리, <유레카>는 문명을 벗어난 특권적 무대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동시대인의 자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새겨넣고 있다. 사와이는 주변인들로부터 피터팬 신드롬에 빠져 도피하지 말라는 꾸지람을 자주 들으며, 쓰레기봉투와 건설업 공사판과 같은 도시적 부산물은 탁 트인 타르콥스키적, 서부극적 경관에 스며들어 기묘하게 혼종적인 무드를 조성한다. 동시대 현실의 외면할 수 없는 무게를 직시하는 <유레카>의 그런 면모가 가장 빛나는 대목은, 사와이뿐 아니라 직업적 책임을 짊어진 형사에게도 소박한 위로의 시선을 던지는 장면이다. 이를 부연하기 위해서는 다시 사와이가 버스 여행을 떠나기 전날, 형사와 대화하는 시퀀스를 살펴봐야 한다. 그날 밤, 형사는 버스를 정비하는 사와이에게 그가 떠난 후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사와이가 “이제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하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형사는 창공에 분진을 휘날리며 말한다. “사와이씨, 나는 당신이 정말 싫어요. 당신의 눈은 마치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 없어 보인다고 말하고 있거든. 어쩌면 당신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수는 없다고.”
놀랍게도, 이 대화는 나오키가 범인이라는 점을 사와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형사의 말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나오키에게 사법적 판단 대신 사적 윤리를 적용하려는 사와이의 결단을 형사 또한 헤아리고 있다는 점을 비밀스럽게 제시한다. 서로 이해하는 두 인물이 화합에 이를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중 어느 한쪽이 비윤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한명의 사회인으로서 짊어진 각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형사가 사와이와 같은 유보적인 윤리를 취할 뿐이었더라면, 그는 남매가 테러범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지 않았겠는가. <유레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가 경찰 공무원을 아무 생각 없는 바보들로 캐리커처하며 국가권력을 추상화했던 것과 달리, <유레카>는 그 권력에 속한 한 인간에게도 개별적인 얼굴을 부여함으로써 상충하는 입장이 혼재하는 인간의 공동체를 보다 너르게 감싸안는다. 서로를 이해하되, 각자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인지하는 두 범속한 성인의 형상을 나란히 세운 이 장면이야말로 <유레카>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숏이라고 나는 믿는다.
<얼굴들>: 사무실의 직장인은 걷지 못한다
이 장면을 보고 궁금해졌다. 결과적으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황야로 도피한 사와이의 여정이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면, 이제 황야를 걷는 낭만을 꿈꿀 수 없는 형사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도피의 공간 대신 직업인의 책임과 질서가 지배하는 사무실에 머물러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어떤 은총이 내려올 수 있을까. 전세계의 어느 곳보다 급속하게 발달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앓는 국가에 사는 나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산 이강현이 만든 <얼굴들>에서 그 질문에 대한 고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축제가 끝난 후 뒷정리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얼굴들>은 정말 어떤 은총도 결여된 것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학창 시절의 빛나는 순간을 취사선택해 견디기 힘든 현실을 걸러내는 많은 작품과 달리, 이강현은 축제의 기운이 사멸한 후의 지리멸렬한 시간을 담겠다는 기획을 명시적으로 표방한다. 하지만 <얼굴들>은 극적인 사건 이후를 담아낸 많은 영화들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시공간의 축을 해체한다. <유레카>를 포함해서, 과거에 발생한 사건의 여파를 다루는 영화들은 보통 해당 사건이 제공한 외상이나 향수를 극복하며 기억을 다시 쓰는 치유의 궤적을 그린다. 설사 그 과거가 회복이 아니라 파국적 기억이나 복수로 회귀하는 <더 글로리>와 같은 경우에도, 인물들은 과거와 강렬한 연속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얼굴들>은 다르다. 영화는 기선, 기선의 전 애인인 혜진을 포함한 네 인물을 다루지만, 복수의 시간대에 배치된 숏의 인과성은 한번 봐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되어 있고, 기억의 파편은 현재로 회수되며 연속성의 매듭을 이루기는커녕 향수의 대상으로 반추되지도 않는다. 기요시의 <은판 위의 여인>과 조민재의 <작은 빛>에서 상실된 인물의 사진은 핵심적인 기억의 매개체로 기능하며, <유레카>의 코즈에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며 사라질 것만 같은 대안 가족의 얼굴을 사진적 기억에 새겨넣은 바 있다. <얼굴들>은 사진과 기억을 매개체로 작동하는 이런 식의 연결고리를 처음부터 붕괴시킨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릴 예정인 사진 파일에서 빈곤한 축구부 소년 진수를 발견하고 접근하는 기선은 학교 행정실 직원치고는 과잉된 간섭으로 진수를 챙기려 하지만, 그는 그 접근을 성가셔 하는 진수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혜진 또한 이사 물품을 정리하며 과거에 3년간 동거한 기선의 흔적과 사진을 발견하지만 흘깃 보더니 미련 없이 버리며, 영화도 그 사진을 일절 보여주지 않는다.
<얼굴들>은 얼굴과 기억이라는 오래된 영화적 제재로부터 관능적 매혹을 길어 올리는 대신, 기억과 관계의 연속성을 정교하게 끊어나가며 단절의 징후가 심화된 동시대의 공기를 물질화한다. 기선과 혜진은 <유레카>의 사와이와 유미코와 마찬가지로 이별한 연인이지만, 영화는 작별의 아린 통증에 대한 감정적 묘사를 삭제한 수준을 넘어, 애초에 연인이 재회하는 일이 없도록 서사와 동선을 분해해 병렬적으로 배치했다. 그들이 연인이었던 과거의 장면들이 간혹 출현하기는 하지만, 이 시퀀스들은 과거를 반추하는 플래시백의 주체를 전제하지 않은 채 임의적으로 출력될 뿐이므로 기억의 연속성은 강화되는 대신, 단절의 뉘앙스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악화할 뿐이다.
<얼굴들>이 기억의 연결고리와 내면적 묘사를 파괴한 이유는 추정컨대 영화가 직업인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과도 유관할 것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인간은 개인적 사정과 감정적 내면을 배제한 채 오직 명분과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작동하고 접촉한다는 잠정적 규칙을 승인한다. <얼굴들>은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 식당 자영업자, 택배기사, 부동산 직원, 중고차 딜러 등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을 소개하지만, 그들이 오직 일적인 관계로 접촉하는 장면만을 기입해두었다. 이건 우리가 일상에서 타자를 접하는 감각을 현실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이강현 감독이 스스로 결정한 규칙 같다. 영화에는 무수한 직업인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맡은 일에만 충실한지라 오피스물의 로맨스와 스케치 코미디의 유머 감각을 내다버린 채 사파리의 야생동물처럼 서로를 무심하게 지나친다. 그런 그들은 당연하게도 <잠입자>나 <유레카>의 인물들처럼 노동과 분리된 여백의 시간을 거닐 여유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인 기선은 예외적으로 영화의 네 중심인물을 느슨하게 연결하며 모종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짐작건대 이 점 또한 그의 직업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혜진의 직업인 식당 주인이나 현수의 직업인 택배기사와 달리, 교사는 타인에 대한 윤리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직접적인 공적 소명으로 짊어져야 하는 몇 안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수가 속한 축구부의 위계 폭력을 고발하거나, 진수의 대학 진학에 신경 써주는 시도는 모두 주변인에게 유난스럽다는 반응만 불러올 뿐이다.
<유레카>에서 코즈에 남매가 사와이의 뜬금없는 방문을 환대해 가족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트라우마라는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고, 이후에도 그 고통을 말없이 치유하는 걸음의 시간을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실용성이 결여된 그 걸음은 무위와 동행의 시간성을 빚어내며 공동체의 온기를 되살려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잇는 걸음의 연속성이 모조리 파열된 <얼굴들>의 밀폐된 세계는 그런 온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진수에게 아무런 기억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행정실 직원의 접근은 그냥 납득이 가지 않는 오지랖일 뿐이다(이강현은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기선의 직업 설정을 담임에서 행정실 직원으로 바꿨다고 말했는데, 이는 이 오지랖에 부조리한 색채를 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선은 철저하게 사무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의 파편 속에 고립된다. <유레카>에 비유하자면 사와이의 황야가 아닌 형사의 사무실에 머무는 기선에게는 수평적인 영화적 공간을 롱테이크로 거닐며 소망과 연대의 시간적 리듬을 축적하는 낭만이 허락되지 않는다. 분해된 시간을 표표히 방랑하는 기선은 시도 때도 없이 길을 잃은 듯 보이지만, 그 고통은 내면을 토로할 수 없고, 연대가 붕괴된 직업인의 세계에 갇힌 그가 홀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그런 노력을 이어가다 지쳤을 기선이 퇴사와 이직을 결정하는 장면을 삭제한 채, 어느새 새 직장에 덩그러니 던져진 모습만을 보여준다. 은총의 걸음뿐 아니라 실패의 걸음이 내재할 드라마틱한 뉘앙스마저 질식시킨 <얼굴들>은 기선의 서사가 숭고한 소시민적 비극으로 독해될 여지를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기선은 학교를 떠난 진수와 재회하지만, 그 만남 또한 기선의 지속적인 믿음이 실현한 은총이 아니라, 카프카의 불가해한 인물을 연상시키는 ‘제삼조정관’의 부하직원에 의해 성사된다. 재회한 기선과 진수는 여기저기를 산책하지만, 진수가 “선생님 근데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라고 물을 때 기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나 학생의 안위와 진로를 신경 썼지만, 다시 만난 학생은 그의 도움 없이도 아무런 문제 없이 그런대로 먹고산다. 그의 선의도, 주체적인 기획도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기선은 어떤 말을 꺼낼 수 있을까.
기선이 타인과의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과 달리, 영화는 혜진이 이곳저곳을 누비며 걷는 장면을 기이할 정도로 생동감 넘치게 포착했다. 기선이 시간적 좌표를 잃은 듯 불쑥불쑥 출현하는 것과 달리, “나는 이제 많이 가볼 거예요. 안 가본 데들”이라고 말하는 혜진이 창업을 계획하며 도시를 걷는 장면은 도입부에서부터 꽤나 상세하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며 연대기적 궤적을 그린다. 물론 이 또한 혜진의 직업적 특성과 유관한 연출일 것이다. 자영업자는 교사와 달리 공동체에 대한 소명이 아니라, 본인의 주도적인 개척에 의해 성패가 결정되는 직업이다. 그렇기에 혜진은 붕괴된 공동체 안에서 부질없이 타자를 근심하는 기선과 달리, 보다 현실적이고 자족적인 이해관계에만 충실하게 집중하며 성장의 곡선을 그린다. 누군가는 방황하고, 누군가는 전진하지만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연대가 해체된 공동체의 증상을 징후적으로 증언한다.
이강현의 <얼굴들>만큼 한국의 2010년대 도시를 산다는 감각을 정확하게 재현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했다. 밀집하고 빽빽한 인구와 빌딩이 지면을 가득 메워 맘 놓고 산책할 수평적 공간이 보이지 않으며, 삭막하고 혼잡한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은 속내를 털어놓을 동행의 공동체를 찾지 못해 메말라간다. 진정성 있는 시간적 관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으며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점을 깨달았으므로, 처음부터 자신이 관계를 맺을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썩어 들어가는 내면을 감춘 채 SNS 피드를 화장한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못해 속에 쌓인 온갖 악다구니와 상처는 익명의 커뮤니티에 끔찍한 방식으로 배설된다. 그런 난장판이 소통의 민주주의니, 디지털 경제니 하는 불가항력의 수사학으로 부조리하게 긍정되면서 공동체의 연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면, 우리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삭막한 말만이 일말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음을 쓰라리게 인정해야 한다. 그런 세계 안에서 내가 종종 홀로 남겨져 있다고 느꼈을 때, 스쳐 가는 택배기사, 편의점 직원과 거짓말 같은 인사말을 무감각하게 교환하고, 영화 글을 올리던 블로그 이웃이 어느 날 게시물을 모조리 삭제한 채 잠적해도 그들의 외로움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아무런 연대나 위로를 건넬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그때 <얼굴들>을 떠올렸다. 예술이 건네는 위로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온다는 김애란의 말처럼, 오직 이 영화가 포착한 서늘한 진실만이 나와 같은 시대를 버텨낸 한 예술가가 보낸 무심한 우정의 증거물로 느껴진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걸음의 신성이 사라진 세계를 살았던 예술가가 있었다. 소망을 실현해준다는 구역에 관한 허황된 소문도, 황야의 침묵으로 떠난다는 낭만적 위안도 사멸한 현재를 견디던 예술가가. 비록 그가 빚어낸 인물과 사물이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출현하고 사라져버렸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가장 선연한 얼굴로 떠오르는 한명의 예술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