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우린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비’가 보여준 희망과 연대의 세계
2023-07-28
글 : 이자연

세상의 온갖 걱정, 근심과는 거리가 먼 곳. 막연한 긍정과 천진난만한 응원이 에너지가 되는 곳. 페미니즘이 현실 속 성불평등 문제를 모조리 해결했다고 확신하는 곳. 바로 바비랜드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체형과 신체적 결함을 지닌 바비‘들’과 켄‘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전적으로 여성들에 의해 운영된다. 대통령 바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바비, 과학자 바비, 기자 바비…. 직업인으로서 자긍심과 전문성을 지닌 바비들의 하루하루가 모두 멋진 날이라면 ‘그냥 켄’일 뿐인 남성들은 바비가 바라봐줄 때에만 멋진 날을 맞이한다. 켄(라이언 고슬링)이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짜 파도에 몸을 던지며 바비(마고 로비)의 시선을 은연중 기대한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남녀 집단 사이에 드러나는 지위와 정서적 격차는 이곳에서 공식적인 문제로 치환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없다. 문제를 도와줄 힘이 있는 바비들은 자신의 커리어 그리고 밤마다 이어지는 여자들의 파티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이자 목격자의 위치에 선 바비

성별 전복의 사회를 기본 뼈대로 둔 <바비>는 초반부터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것이 될 수 있는지 반복해 말한다. 실제 바비 인형의 캠페인 슬로건인 ‘우리 여자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We Girls Can Do Anything)를 암시하듯, 영화는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Barbie can be anything)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채로운 직업군 사이를 켄들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설정은 중요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주인공 바비는 그 무엇도 아니다. 금발의 백인으로 분홍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바비’. 그게 그의 단순명료한 정체성이다. 바비는 그저 이따금 오늘 예쁜 듯한 기분(“I feel beautiful”)으로부터 만족을 얻을 뿐이다.

안온해 보이기만 했던 바비의 일상에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적어도 바비랜드에서) 죽음이라는 허튼 생각이 자꾸만 물밀듯 밀려들면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켄과 인간 세계를 찾은 바비는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감각을 감지한다.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와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그리고 “웃어봐 금발아!” 하고 외치는 말소리까지. 모든 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바비>는 여성 친화적인 사회가 완벽하게 구축돼 있다고 믿어온 바비를 외부 세계에 도입시키면서 스스로 당사자이자 목격자가 되게 만든다. 그는 남성들의 플러팅과 불편한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되고, “난 모르겠는데?”라고 답하는 켄과의 대비를 겪으며 목격자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거북함을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사자와 목격자로서의 주체성이 박탈당한다. 같은 세상을 접한 켄도 적잖게,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충격받는다. 여기도 남자, 저기도 남자, 지폐 안에도 남자, 지휘권을 가진 것도 남자. 오랜 시간 아무것도 아닌 채 살아온 켄은 인간 세계에 이토록 달콤한 가부장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켄이 생각한다. ‘빨리 돌아가서 켄들에게 이걸 전수해줘야 해!’

여성들의 상호연대와 구원

바비가 인간 세계에서 좌충우돌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켄에 의해 새롭게 정비된 바비랜드는 괴랄하기 그지없다. 켄들은 우악스럽고 과감한 행동을 거침없이 선보이고 그 옆에 선 바비들은 그들이 멋있다며 치어리더 역할을 자처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비에게 지난 영광의 시간을 떠올려보라고 채근해도 그는 그저 “다 켄 덕분이었어”라며 자신의 성과를 축소할 뿐이다. 영화가 초반엔 현실 세계를 정반대로 뒤집으며 관객의 자각을 유도했다면, 어느 기점부터는 현실을 데칼코마니처럼 비추며 또 다른 거울 효과를 집요하게 이끌어낸다. 이제는 더이상 바비랜드에서 무엇이 되는 게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무의미해진 것일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원하는 지위와 성과를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입장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타인의 입장에 서서 그의 경험과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바비들 사이의 서로를 향한 상호 구원은 자연스레 이해와 연대를 기반하게 된다. 능동성과 독립성을 잃은 바비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토해내듯 고백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들은 글로리아 입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다시금 눈을 뜬다. 어느새 인형과 인간간의 구분선은 흐려지고 여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유연한 교차로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바비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샤(아리아나 그린블랫) 또한 바비랜드 사회개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명랑한 여성운동의 일원이 된다. 완구산업이 자아낸 환경문제를 고민하고, 인형의 획일적인 미적 기준이 페미니즘을 후퇴시켰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샤는 결국 바비들처럼 무언가가 되어보면서 자신을 확장해나간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전작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 레이디 버드(시어셔 로넌)가 본래 자신인 크리스틴이 되기로 선택했을 때 비로소 개인의 내적 성장을 이뤘던 것처럼, 그레타 거윅은 무언가 되기로 결정한 ‘자아 전환’ 혹은 그로 인한 연상작용을 주요하게 다룬다. 바비가 탄생하기 전,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 역할을 놀이로 선택했다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바비를 만난 아이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돌봄 대상인) 아기 인형을 부숴버린다. 다소 과격해 보일 수 있는 이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엄마 역할인 채로 바비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을 스스로 부수고 집어던졌다는 점이다. 무엇이 될 것인지 자기 선택권을 허용하는 <바비>를 통해서, 성숙한 참여 연대 의식을 보인 사샤를 통해서 새로운 세대의 태동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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