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를 보면서 마주하게 되는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혼란스러움은 영화에 내재한 복잡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바비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뒤섞이듯 영화의 혼란스러움은 관객의 혼란스러움과 뒤섞이고 불어난다. 실사로 구현한 핑크빛 바비 월드에 홀리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대체 이게 다 뭔가. 영화는 혼란스러운 관객을 다독이듯, 마치 주문과도 같은 동어반복을 들려준다. ‘바비는 바비다’, ‘켄은 켄이다’…. 이 문장은 결국 다음 문장에 가닿는다. ‘영화는 영화다.’ 정의를 억제하는 동어반복에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바비>야말로 기존에 바비가 지닌 이미지를 조정하는, (재)정의하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비는 바비다’라는 문장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먼저 바비는 단일한 캐릭터가 아닌 다양한 ‘바비들’을 포괄한다.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바비이고, 남성 캐릭터는 앨런을 제외하고는 모두 켄이다. 바비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해야 함을 납득하면서도, 바비를 말할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중심에 놓인 인물은 마고 로비가 연기하는 금발의 백인 바비다. 어떤 직업이나 상태 대신 ‘전형적’이라고 수식되는 그의 위치는 흡사 메인 보컬, 메인 댄서 등으로 구별된 멤버들 사이에서 비주얼만으로 중심에 선 걸 그룹 센터와 비슷하다. 영화는 바비의 세계가 지닌 평등함을 말로 강조하지만, 정작 묘사되는 것은 다양함에 가깝다. 균형을 맞추듯 바비에게 선사한 죽음과 우울, 셀룰라이트와 평발 같은 것도 세계를 넘나드는 바비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기에 부정적인 요소만은 아니다.
그런데 두 세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바비의 존재를 향한 근본적인 의문이 빚어진다. 관객은 마고 로비가 연기하는 바비를 실사화된 인형 캐릭터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영화관에 입장한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를 인형처럼 보이게 하는 것에 때때로 무신경하다. 인형다움은 외모와 몸동작보다 이들이 사는 세계가 인형의 집처럼 보이는 세트라는 데서 온다. 바비를 인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지표였던 까치발마저 마법을 풀듯 서둘러 평발로 해제해버린다. 바비 월드와 현실 세계의 구분은 배경만 갈아치운 2D식 평면 이동이고, 현실 세계에서 바비가 줄어든다거나 바비 월드에서 인간이 거대해지는 등의 크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바비와 켄은 그저 튀는 복장을 한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비 월드에 온 인간들 역시 위화감이 전혀 없다.
영화 속 바비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거나 수집하는 바비 인형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관객은 ‘이들은 인형을 연기하는 배우로 보이지만 인형이라고 인식해야 해’라는 당위와 ‘인형이라고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유명한 장면을 패러디한 <바비>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혼란을 덜기 위한 작은 힌트가 담겨 있다. 실사화된 바비는 진화를 추동하던 흑백 모노리스의 자리를 대체한 채 우뚝 서 있다. 실제보다 커다랗게 확대된 거대한 바비의 형상은 비현실적인 이미지지만, 이를 스크린 속 이미지라고 상상할 때 사실적인 것이 된다. 바비는 하나의 스펙터클로서의 영화를 체현하고,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은 축소된 관객이다. 아이들은 유인원이 뼈다귀를 부수었던 것처럼 방금까지 가지고 놀던 아기 인형을 마구 부수기 시작한다. 바비 인형의 등장으로 여자아이들은 아기 인형을 돌보는 엄마 역할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여성으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는 친절한 해설이 여기에 덧붙는다. 이를 통해 바비가 일종의 개념이나 관념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 됨을 배격하며 시작하는 듯했던 영화는 부서진 인형의 잔해를 그러모으듯, 모성을 다시 논의의 테이블에 올린다. 현실 세계에서 바비의 주인은 모녀 관계인 사샤(아리아나 그린블랫)와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다. 소녀의 성장으로 시효를 다한 인형은 중년의 우울을 달래는 대상으로 재발견된다. 인형과 주인의 관계를 다룬 몇몇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그 관계가 성장한 주인과 방치된 인형으로 고정되는 데 반해 <바비>에서 인형 놀이의 주인의 이동과 변화를 그리면서 우울함에 찌든 몸과 마음 역시 바비의 세계에 하나의 요소가 되어야 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도달하려 한 지향점은 아니다. 영화는 바비의 수용이나 거부 끝에 각자 제자리를 찾는 이야기에서 멈추는 대신 예상치 못한 다른 문제의 발생과 또 다른 만남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와 사건은 변화하고 부풀어지며 산재하고, 영화는 하나의 주제로 이를 통합하는 대신 혼란스러운 채로 내버려둔다.
영화학자 린다 윌리엄스는 여성 관객성을 논하며 ‘여성 관객은 모순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영화는 관객을 위해 하나의 분명한 모순점을 제공하는 대신,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모순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비>를 통해 ‘완벽하지 않아도 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던 그레타 거윅의 바람은 스스로 모순을 허용하는 완벽하지 않은 세계를 통해 구현된다. 이상한 바비(케이트 매키넌)는 바비에게 현실 세계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인형의 소유자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한다. 현실 세계 속 바비의 소유자가 바비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 역시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영화의 배경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인형의 세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와 같은 소통 방식이 영화가 관객에게, 관객이 영화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기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두 세계가 소통하는 방식에서 영화에 이입하고,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으로서의 나와 내가 지닌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오프닝 시퀀스의 여자아이들처럼 자신과 닮은 인형을 신나게 부수었던 지난날의 나는 언젠가의 내가 이를 후회하며 조각난 인형을 접붙인다 해도 용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