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의 <바비>가 실사화하는 것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바비는 옷을 입히고 벗길 수 있는 플라스틱 인체 모형인 동시에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이며, 성숙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 이미지이고, 그러한 이미지를 둘러싼 고정관념과 문화적 코드가 재생산되는 담론의 장소다. 바비는 유년기의 노스탤직한 기억과 ‘전형적인 백인 여성의 늘씬한 몸’으로 대변되는 여성 신체의 관념화된 이미지를 향한 반발심 사이에서 진동하는 소녀들의 일그러진 거울이다. 물론 바비는 출시된 이래로 “You can be anything”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양성을 통한 쇄신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백인 금발 여성의 ‘전형적인 바비’가 표상하는 미적 기준의 강요에 대한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바비는 여성이고, 모든 여성은 바비”라는 공식은 가능성을 고양시키는 것만큼이나 여성들을 가둔다. 그렇기에 <바비>의 실사화는 단순한 치환이 아니라, 이처럼 복잡다단한 관계의 부산물과 함께 일으켜지는 파장일 수밖에 없다. 동화 같은 파스텔 톤의 플라스틱 세트장을 한 꺼풀 벗겨내면 장치를 드러내고 전복하려는 정치적 야심이 우글거린다. 거윅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과 관념 사이를 혼란스럽게 난반사하는 거울에 맺힌 이미지를 모두 보길 원한다.
그러나 이토록 어지러운 와중에도 <바비>는 여전히 성장과 모험의 영화다. 거윅의 영화에는 늘 주인공이 머물기에는 너무 비좁은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부수고 나오려는 작고 열띤 존재의 안간힘이 있다. 불확실함 속으로 확실하게 도약하려는 소녀들의 달리기는 거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려는 여성들의 몸짓으로 현현한다. 마찬가지로 <바비>의 주인공인 금발의 백인 바비(마고 로비)는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 사이의 연결에 균열을 감지하고, 그 원인을 찾아 세계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비>는 살아 있음의 생생함을 부각하기 위해 부러 살아 있지 않은 것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인형이라는 비인간 존재가 자신의 인간다움을 발견한다는 실존적 여정은 여성들의 살아 있음을 발산하기 위해 아득한 우회로가 필요함을 암시함으로써 현실의 억압적 조건을 더욱 강조한다. <바비>에서 실존의 문제는 가장 여성적인 것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쓰는 일이다. 적어도 <바비>는 그 파열의 통증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바비>가 설정한 세계의 구도는 바비들이 살아가는 바비랜드와 바비를 갖고 노는 소녀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로 나누어진다. 바비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는 바비랜드는 여성들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슬로건이 특권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갈리아’와 같은 유토피아다. 바비랜드의 바비들은 현실 세계에서 이 바비들을 갖고 노는 아이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적극적으로 내통하지 않는다. 바비랜드의 우먼파워는 남성들이 상상한 소녀들의 이상향을 적용해 마텔(Mattel)사가 부여한 시장의 논리일 뿐, 현실 세계의 소녀들은 백래시를 조장하는 얄팍한 슬로건의 함정을 알고 있다. 오히려 두 세계는 합치될 수 없는 조건 속에서만 (겉보기에는) 평화롭게 유지된다. 현실의 차별이 심해질수록 상상의 세계에서 이상을 해소하려는 염원은 강력해진다는 소비 심리의 정확한 반영이다. 바비랜드의 페미니즘이 부흥할수록 현실 세계에서 여성의 권리는 바비랜드와의 간극을 벌리며 후퇴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두 세계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과 유사해진다는 변화를 의미한다.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바비랜드는 현실 세계의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 중심으로 과잉 결정된 사회라는 환상을 제작하는 노동이 외주화된 식민지다. 바비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믿지만, 이는 사실 현실 질서의 교묘한 은폐를 통해 얻어진 허구다. 가부장제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가부장제를 ‘감추는 데’ 더 능숙해진 것이라는 한 샐러리맨의 말처럼. 그러니 구조의 실상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동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바비에게 찾아온 평평해진 발과 셀룰라이트, 죽음에 대한 생각은 환등상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불균질함이자 현실의 통행증이다. 주인공 바비는 다양성 정책의 관점에서 가장 후퇴한 버전의 바비이고, 그렇기에 가장 큰 전복의 잠재력을 응축하고 있다. 영화상에서 그녀를 현실로 소환한 것은 딸과 사이가 서먹해진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의 공상이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한 이상 속에서 께름칙함을 감지한 바비의 무의식적 염원이 모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 바깥을 탐색하고 귀환한 바비와 켄(라이언 고슬링)은 각각 여성 조력자와 가부장제를 들여온다. 켄이 바비랜드에 끼친 변화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 같지만, 바비의 모험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필연적인 위기다. 바비랜드의 주체적 질서는 자동기계적으로 주어진 여성주의라는 환영이 가혹하게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쓰여야만 유효한, 다시 말해 스스로 쟁취했다는 감각을 경유해 재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충격을 반동삼아 처음부터 다시 일으키기. 막중한 과업 앞에서 바비는 잠시 무력해지지만 곧 모녀의 조력을 받아 헤쳐나간다. 이 여정은 바비들의 투쟁인 동시에 바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지닌 엄마 세대와 바비가 일으킨 백래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진 딸 세대라는 두 진영의 갈등을 중재하는 경로가 된다. 글로리아는 가부장제에 오염되어 수동적으로 변한 바비들에게 여성들이 처한 이중적 구속을 묘사하며 각성을 촉구한다. 비록 이 각성이 지나치게 간단한 주문처럼 이뤄지기는 하지만, 바비랜드는 현실의 어려움을 이식하고 바비가 가진 모순을 마주 봄으로써 현실과 교통할 수 있는 우화적 픽션으로 거듭난다. 켄이 맨 박스 바깥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찾게 되는 결말 또한 바비의 변화에 수반되는 효과 중 하나다.
바비가 인간이 되는 마지막 절차는 눈을 감는 동작만으로 간단히 이루어진다. 이 방식은 진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찾는 절차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명상의 깨달음과 흡사하다. 눈을 감으면, 활기 넘치는 여자아이들의 영상을 모아놓은 파운드 푸티지가 재생된다. 이는 ‘우리’라는 집단을 거칠게 그러모아 연대감을 조성하려는 영화의 손쉬운 전략이기도 하다. <캡틴 마블>과 <블랙 위도우>가 그랬듯 <바비> 또한 단순한 임파워링의 도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장면이 바비가 자신의 ‘살아 있음’과 마주하고 있는 찰나라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외부로부터 주입된 깨달음이 아닌,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움켜쥔 무언가. 살아 있음이 발산하는 경이를 통한 여성들간의 심원한 연결. 무엇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주름진 얼굴이고, 매끈하지 않은 허벅지고, 끝내는 죽음이다. 바비는 그 변화를 기쁘게 수용한다. <바비>에는 살아 있음의 질료들이 개방하는 새로운 감각 속에서 낡은 방식들을 떠나 세계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그래서 페미니즘적이다. 이것은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 현실과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며 재현될 수 있는 것의 좌표를 변화시키는 픽션의 역량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