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시대극이 잘 어울리는 얼굴”, ‘밀수’ 고민시
2023-08-08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 <밀수>의 고옥분은 다방 막내에서 시작해 마담까지 올라간, 생활력이 강한 여자다. 몇년의 타임 루프 사이에 옥분의 인생은 어땠을 거라고 생각했나.

= 종로 다방 자체가 만남의 장소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아마 해녀들 역시 자주 왔을 테고, 그중에서도 옥분은 유독 춘자(김혜수)에게 존경심을 품게 됐다. 춘자가 사라진 후 춘자에 대해 도는 소문을 모두 들었지만, 그가 돌아왔을 땐 서울 냄새가 가득한 헤어와 패션에 오히려 또 다른 호기심을 가졌다. 옥분은 잡초처럼 자란 춘자의 미니미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춘자가 어떠한 제안을 했을 때 곧이곧대로 따른다. 대사에도 나오듯 신랑 있는 마누라들에게 머리채 잡혀가며 악착같이 살아남아 다방도 인수까지 하게 됐다.

- 과거 호스티스 영화나 최근 한국영화에서 술집 여자 캐릭터를 납작하게 표현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지 않나. 옥분 캐릭터가 소모적으로 쓰이거나 단순하게 보이지 않도록 부여한 디테일이 있나.

= 그래서 중·후반부 옥분의 악어 눈물 연기를 유쾌하면서도 최대한 진지하게 연기하고 싶었다. 배 위에서 장춘(김종수)과 장도리, 그의 부하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 짧은 이미지컷에서도 좀더 진중한 느낌을 살렸다.

- 옥분의 갈매기 눈썹과 붉은 눈화장 등 촌스러운 스타일링을 잘 소화해서 신기했다. 이유가 무엇인 것 같나.

= <오월의 청춘>도 그렇고, 나는 시대극이 잘 어울리는 얼굴 같다. <봉오동 전투> 때도 머리를 바짝 묶고 구운 계란처럼 분장했는데 어째서인지 잘 소화해냈다. (웃음) 옥분이 유일하게 메이크업을 하는 캐릭터다 보니 분장팀도 무척 신나서 화장을 해주었다. 감독님이 광택이 없는 공단 소재, 그리고 은갈치색 한복을 원했다. 의상팀이 힘들게 구해온 의상을 테스트 촬영날 입었는데 감독님이 포복절도하며 너무 크게 웃으셨다. (웃음)

- 실제 한국의 70년대 자료를 참고하기도 했나.

= 감독님이 당시 연예인들의 달력 사진이나 실제 밀수품이 어떤 게 있었는지 이미지를 구해다 쭉 보여주셨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김추자 선생님, 나미 선생님, 펄시스터즈 영상을 보며 당시 애티튜드나 스타일링을 관찰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은 배우들이 다같이 댄스 수업을 받으면서 준비한 것이다.

-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는 치아 변색 분장까지 하지 않았나. 연예인이라면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을 텐데 이런 분장에 거부감 없이 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

= 나는 그런 작업이 정말 재미있다. <봉오동 전투> 때도 치아색이 변하는 게 너무 신기했고 그때 처음으로 입술 튼 분장도 해봤다. 그런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프레임에 담겼을 때 어떨지 너무 궁금하고 실제 결과물을 봐도 만족스럽다. 오히려 그런 분장을 했을 때 캐릭터와 좀더 가까워진 내 얼굴이 더 좋다. 예쁘게 꾸며진 모습은 화보나 다른 행사장에서 충분히 보여드릴 수 있다. 그리고 완벽한 모습만 보이면 대중들이 질릴 수 있지 않을까. 가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보는 재미도 매력도 생긴다. 완벽한 메이크업을 하면 100% 연기에만 집중하지 못해 다소 불편할 때도 있는데, 캐릭터에 부합하는 분장을 하고 나면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어 에너지를 더 받을 수 있다.

- 해녀로 나오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옥분은 종로 다방을 지킨다. 상대적으로 외롭진 않았나.

= 일명 ‘논개 장면’ 때문에 수중 훈련을 받긴 했지만 확실히 회차는 훨씬 적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정말 큰 유대감을 쌓았다. 영화 후반부 장면을 삼척에서 찍었는데 하루 세끼, 간식 세끼 총 여섯끼를 같이 먹었다. 염정아 선배님이 환경을 생각해서 플라스틱을 쓰지 말자며 식판도 선물해줬다. 선배님이 화이트 와인을 좋아해서 나와 (박)경혜 언니 둘이 맨날 정아 선배님 방에서 같이 와인을 마셨던 기억도 난다. 혜수 선배님은 나긋나긋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후배 배우들을 챙겼다. 그리고 아직도 정아 선배님을 “아가~” 라고 부른다. (웃음) 그런 두분의 밸런스가 잘 맞아서 더 좋은 현장이었다.

- 옥분은 바다가 아닌 다방에 있기 때문에 자칫 캐릭터가 동떨어져 보이거나 연기가 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은 없었나.

= 춘자와 진숙(염정아)의 앙상블이 잘 살았으면 했다. 그래서 선배님들의 대사 전달이 더 중요한 신은 의식적으로 힘을 빼려고 노력했고, 후반부 옥분이 활약하는 장면은 좀더 임팩트 있게 연기하려고 했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디테일한 부분까지 디렉팅을 해주셨기 때문에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었다.

- 박정민과 고민시, 두 배우의 활약을 엮어서 언급하는 반응을 많이 봤다. <밀수>에서 젊은 배우와 노련한 배우들이 잘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 우리가 어떻게 연기하든 감독님이 항상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더 당당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또 장도리와 옥분이 함께 오징어를 먹는 장면에서는 한손으로 꽹과리를 치듯 움직여보라든지 좀더 상스럽게 씹어보라는 식으로 디렉팅을 주셔서 케미스트리가 더 잘 살 수 있었다.

- 류승완 감독과 작업하며 배운 것이 많을 것 같다.

= 시나리오를 보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을 감독님이 갑자기 디렉팅해줄 때가 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적응이 잘 안됐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감독님의 디렉팅을 알아듣고 흡수해내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도록 훈련을 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연기 외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패밀리십이 강한 것이 영화 제작사 외유내강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오너가 누구냐에 따라 현장 분위기가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느꼈고, 감독님 현장에서는 감독부터 막내 스탭까지 서로 이름을 다 알고 있고 눈만 봐도 서로의 컨디션을 파악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도 다들 퇴근을 안 하고 저녁까지 야무지게 챙겨먹고 간다. (웃음) 더 즐겁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류승완 감독님의 힘이 크다.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가장 좋았던 현장이다.

- <헤어질 결심>에 잠깐 출연한 모습을 보고 반가워한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인연으로 출연했나.

= 오디션을 봤다. 박찬욱 감독님이 <헤어질 결심>을 연출한다는 기사 링크를 회사 실장님에게 보내면서 작은 역할이라도 오디션을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서래(탕웨이)가 보는 TV 속 사극의 무녀를 연기하게 됐다. <헤어질 결심> 고사를 지내고 첫 촬영날 찍은 첫 신이었다. 앞뒤 내용은 모른 채 서래가 보는 TV드라마 부분만받고 촬영했고 대사도 한두줄뿐이었지만, 그래서 더 어려웠다. 박찬욱 감독님이 황혼 시간대에 찍기를 원해서 해질녘까지 기다렸다 찍은 신이다. 감독님이 “‘포’기했다와 배추 한 ‘포’기는 다르다”라고 디렉팅해주셨는데 인간 국어사전 같았다. (웃음) 장음과 단음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감독님은 처음 봤다. 한복 입은 사진을 개인 필름카메라로 많이 찍어가시는 모습도 좋았다. 이래서 박찬욱 감독님, 박찬욱 감독님 하는구나! 그때 정말 많이 배웠다. 후시녹음하러 갔을 때는 시리얼을 드시고 계셨는데 왠지 영화의 한 장면 같고 그 시리얼도 너무 대단해 보였다. (웃음)

- 오디션을 보러갔을 때 연기과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 힘든 시절도 있었다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역으로 연기과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로서 가진 강점도 있지 않을까.

=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다. 공식 질문처럼 대부분 “어느 학교 연기과 나왔냐”고 물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 연기과 출신 배우들을 더 예뻐하는 게 그 당시에는 정말 이해가 안됐다. 그래서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더 악착같이 버텼다. 스스로 모니터를 하면서 부족한 지점이 보이면 무조건 다음 작품에서는 고쳤다. 그렇게 노력한 부분들이 쌓이면서 현장에서 감독님 디렉팅을 빨리 흡수해서 연기하는 것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연기 전공이 아니다 보니 오히려 생각을 열어둬 발상이 넓어지는 측면도 있다.

-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 위해 데뷔 초 단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창작 계획이 있나.

= 나중에 기회가 되면 40~50대쯤 문소리 선배님처럼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 사실 지금은 영화보다 내 인생의 자기소개서를 쭉 펼쳐낸 책을 쓰고 싶다. (박)정민 오빠가 한달이면 책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오빠가 정말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웃음) 나도 그렇게 책을 내는 것이 오래된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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