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듯한 몽환적인 표정, 껄렁한 목소리, 성의 없는 말투. 황선우는 학교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죽음을 자주 생각하지만, 기질적으로 타고난 엉뚱함과 명랑함은 어떤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학교 폭력 가해자 박채린(정이주)이 회개하고 낙원에 가겠다는 반전의 모습을 보여도 선우는 그를 끝까지 믿지 않는다. 누가 용서하고 누가 벌할 것인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까지 자전거 페달에 힘을 더하는 선우는 그간 외면한 지옥을 포용한다. 모든 게 쑥대밭이지만 마침내 “웰컴 백 헬이다”를 인사치레로 건넬 수 있게 된 두 여자아이를 보며, 어쩌면 이들 곁에 진짜 낙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얻는다. 오랫동안 선우를 생각하고 선우를 그려낸 배우 방효린을 만났다.
- <지옥만세>에 합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오디션을 복기해보자면.
= 비대면 오디션으로 진행된 1차에서는 송나미와 황선우 모두 연기했다. 그리고 2차 오디션에서는 아이들이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교복을 입고 갔다. 그런데 다른 지원자들이 모두 사복을 입고 왔더라. 상황에 살짝 낯을 가리던 중 교복을 입고 온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게 오우리 배우였다. (웃음) 딱 우리 둘이 뽑혀서 정말 신기했다. 운명 같다.
- 시나리오를 읽을 때, 황선우를 어떤 유형의 인물이라고 분석했나.
= 선우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외유내강이다. 겉으로 보기에 상처도 많고 어두워 보이지만 내면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선우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수학여행 날 목숨을 끊기로 나미(오우리)와 계획을 세우지만, 자신을 괴롭히고도 잘 살고 있는 채린의 소식에 서울로 향한다. 너무 힘든 상황이지만 가해자를 피하지 않고 찾아나선 태도에서 선우의 용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교회 어른들의 폭력 사건에 휘말린 어린 혜진(이은솔)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것도 선우다. 선우는 망설이듯 뒷걸음질치다가도 끝끝내 세상과 직면하는 인물이다.
- 사실 나미도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나미와 짝꿍처럼 붙어다니는 게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 나는 나미와 선우가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웃음) 그냥 혼자선 죽는 게 무서운데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죽을 용기가 나니까 함께한다고 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나미와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선우도 조금씩 깨달은 거다. 친구와 함께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좋다고. 처음에는 선우가 죽기 위해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후반부에는 관계맺음으로써 혼자가 아니어서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나미와 선우 모두에게 큰 의미를 전한다.
- 선우를 진짜 아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관찰한 태가 난다. 시나리오에 등장하지 않지만 홀로 상상으로 공백을 채운 부분이 있다면.
= 영화에도 짧게 등장하지만 선우에겐 쌍둥이 동생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모님은 선우보다 동생 편을 든다. 집이든 학교든 선우는 어느 곳에서도 포용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우는 혼자 있을 때 뭘 했을까? 그런 상상을 자주 했다. 나도 혼자 있는 걸 무척 좋아하고 즐긴다. 그래서 ‘선우도 나처럼 퍼즐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선우를 더 구체화했다. 하지만 선우는 홀로 있을 때 외로워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그런 상태가 너무 익숙한 친구니까.
- 거의 모든 장면을 나미와 함께했다. 오우리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 정말 좋았다. 또래이기도 하고 오우리 배우가 워낙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 촬영 전후로 힘을 주었다. 촬영 전날이면 숙소에서 만나 연극처럼 미리 동선을 짜보기도 하고 연기 합을 맞춰나갔다. 작품 외에 사적인 이야기도 정말 많이 나눴다. (웃음) 촬영장에도 또래가 많아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교회의 아이들과 대기 시간 마다 마피아 게임을 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 <지옥만세>는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지옥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이러한 작품이 한창 자기만의 고민을 끌어안은 청소년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 마지막 장면에 선우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그 장면에 큰 울림이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만의 지옥을 품고 살아가는데 선우처럼 용기를 잃지 않으면 마지막 힘을 다해 페달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는 삶. 그런 것을 이 두 아이에게서 배울 수 있다. 사실 선우와 나미가 그 뒤로도 친하게 지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까지 연락하진 않지만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친구들이 한두명은 있지 않나. 그런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자리할 거라고 믿는다.
- 후반부에 집으로 돌아온 나미와 선우는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 친구들을 다시 마주친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라 이제는 발 벗고 맞서 싸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더라. 나미와 선우는 어떤 성장을 겪게 된 것일까.
= 선우는 자신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해서 그 힘으로 누군가를 압박하거나 눌러야겠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인내심을 키울 뿐이다. 이전에는 친구들의 괴롭힘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면 사건 이후의 선우는 ‘저 애들이랑 싸워서 뭘 하겠어?’라고 생각하며 뒷전으로 넘겨버린다. 이게 선우가 성장하는 방식이다. 더이상 누군가와 싸우고 힘을 재는 게 중요하지 않아진 것이다.
- 답변을 듣다 보니 이야기의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평소 책읽는 걸 좋아할 것 같은데.
= 엄청 좋아한다. 차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오디오 북을 듣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빌려 바라보다 보면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포용할 수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