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미소, 작은 생명체라도 밟을까 조심하는 듯한 걸음걸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기도를 올리는 신실한 손. <지옥만세>의 채린(정이주)은 누가 봐도 낙원행이 가장 유력한 청소년 신도다. 그런 그에겐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걸어가 제 손으로 친구의 얼굴에 케이크를 엎던 과거가 있다. 자신이 괴롭힌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가 선교회를 찾아왔을 때 채린은 새로 태어났다며 그들을 반기지만 겁먹은 두 친구를 본 관객은 그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다. <지옥만세>를 말하는 배우 정이주는 명확했다. “두 인물에게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자극을 주는 역할”이라며 맡은 캐릭터의 쓰임을 간명히 소개했고, 가해자의 서사가 피해자의 그것보다 커져서는 안된다며 거듭 강조했다. 채린이 알 수 없는 인물로 정확히 표현될 수 있었던 건 캐릭터를 간파하고자 한 배우 정이주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임오정 감독이 “중전마마처럼 우아해 캐스팅했다”라고 하더라. 오디션 때 어떤 모습을 보여준 건가.
= 나미, 선우 역으로도 오디션을 봤는데 채린이 때는 낙원에 가 있는 엄마를 따라가야 한다며 사과하는 독백 신을 연기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폭력적인 사과라고 느끼며 읽었는데 감독님이 다른 방식으로도 해볼 수 있겠냐고 하셨다. 그때 바로 하지 않고 다시 해도 똑같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명백히 가해자인 인물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본 감독님이 내가 채린이를 전형적인 가해자로 그리지 않을 거라 판단하신 것 같다.
- 채린은 욕망으로 들끓지만 겉으로는 드라마 <트롤리>의 혜주나 <소년심판>의 아름처럼 침착하다. 정이주 배우가 캐스팅되기 전부터 그런 캐릭터였나.
= 평소 감정 기복이 적은 편인데 감독님이 내 그런 특성을 채린이에게 넣으면 권력적이고 뻔하지 않은 캐릭터가 나올 것 같다고 제안하셨다. 맡은 인물이 가해자이더라도 그를 이해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채린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많이 생각했다. 남의 눈에 완벽한 삶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 채린의 전사가 적다. 집단 따돌림의 주동자이며, 유원지를 하던 집이 망했고, 서울에서 유학 준비를 하는 줄 알았으나 효천선교회에 흘러 들어온 상태다. 인물의 숨은 사연을 상상해봤나.
= 시나리오상에는 가정사가 더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채린이가 폭력을 저지르게 된 계기와 집이 몰락한 뒤 그가 겪은 우여곡절에 관한 상상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감독님도 나도 전사를 최대한 노출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인물이 미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채린이가 보호받지 못한 채 자라온 고등학생인 건 맞다. 그 점이 내가 채린이에 관해 인정해주고 싶은 단 한 가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채린이가 친구들에게 행사한 폭력이 용인될 수는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다.
- 계단을 내려오는 사실상의 첫 등장 신을 찍을 땐 어땠나. 채린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이 커졌을 시점이고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야 하는 장면이라 고민이 컸을 듯한데.
= 그래서 정말 준비를 많이 한 신이다. 채린이가 그 순간 했을 두 가지 생각에 집중했다.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나미와 선우가 진짜 눈앞에 나타나 당황스러웠을 테고 이내 진짜 기회가 왔다고 여겼을 거다. 친구들을 맞이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벌을 받아 가장 높은 회개 점수를 쌓을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경계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 착해 보이는 게 중요한 인물이다. 표정이나 자세 연구를 많이 했겠다.
= 어떻게 웃어야 하며 눈을 떴을 때 선한 인상을 줄 수 있을지 혼자서 연구하고 감독님과도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채린이만의 시그니처 표정이 묘한 미소와 (양 검지로 양 눈꼬리를 내리며) 이렇게 처진 눈매다.
- 채린이가 진심으로 미안해한 적이 있는지, 종교를 믿긴 한 건지 끝까지 헷갈린다.
= 애초부터 다 모호하게 보이려고 했다. 감독님도 채린이가 계속해서 의심이 가게 하는 인물이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그 모호한 지점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접근을 달리했다. 채린이가 진짜 반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확히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과하려는 장면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 그러니까 내게는 채린이의 속마음이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친구들의 마음을 무조건 얻어내겠다는 강한 욕구에만 집중했다. 효천선교회에서 채린이가 믿은 건 목사도 신앙도 아닌 낙원 그 자체였다고 봤다.
- 세 사람만의 캠프파이어라고 부를 수 있는 장면에서 나미와 선우가 춤추는 동안 채린만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
= 나도 껴서 같이 놀고 싶다. (웃음) 정이주는 그랬다. 하지만 채린이로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멍때리는 것이 그 순간 채린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고 여겼다.
- 촬영하면서 만족스러웠던 장면이 있다면.
= 없지만 묘한 쾌감을 느낀 장면은 있다. 창고 신들이 다 그랬다. 지금까지 채린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해야만 했던 연기를 이제부터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해방감이 들었다.
- 지난 2월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졸업을 앞두고 한 <씨네21> 인터뷰에서 “직업인으로서 연기를 한다는 게 조심스럽기도 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에 나온 지금은 어떤가.
= 감사하게도 지금 장편 독립영화 한편을 주연으로 찍고 있는데 재밌다. 촬영하다 보면 나와 영화 구성원 각자가 작품을 이루는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된 느낌을 받는다. 그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장면 장면을 만들어나가는 기분이 무척 좋다.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계속 이 일을 해나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