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수면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시선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본다. 그런데 무엇을 바라보는가. 그의 오랜 친구인 라비는 그를 두고 “우리가 보는 세상 너머를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면 그를 음해하는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모든 천재가 지혜로운 건 아니다. 그는 똑똑했지만 앞을 볼 줄 몰랐다”라고 평가한다. 서로 다른 지점을 가리키는 기묘한 진술이다. 그는 앞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는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에게 주어지는 이 상반된 견해는 크리스토퍼 놀런이 구축하려는 영화적 야심의 형태와 겹치는 것 같다. 우주의 실체를 눈에 담으려는 오펜하이머의 열망이 그러하듯 놀런은 <오펜하이머>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비출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장치를 매개로 표면 너머의 것들을 바라보려고 한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두손으로 현실의 시공간을 왜곡하고 조각내는 소년적 유희에 몰두하는 영화감독이면서, 심각한 고뇌와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출자다. 오펜하이머의 ‘파괴’는 유희와 고뇌를 오가는 그 복합적 비전에 그럴듯하게 들어맞는 사례일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손은 나치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성찰 없는 속도전에 뛰어들지만, 그의 얼굴은 폭탄의 개발과 투하가 불러오는 여파를 직시한다. 그는 세계의 원리를 통제하려 드는, 그러나 세계가 자신의 통제 바깥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전형적인 크리스토퍼 놀런 영화의 주인공이자 필름누아르 무대의 눈먼 탐정이다.
<오펜하이머>가 나열하는 이미지는 일반적인 숏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사건의 전후 과정이 삭제된 피상적인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트리니티 핵실험 시퀀스를 제외하면 상황이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과정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숏은 오펜하이머가 바라보는 물방울, 혹은 서로 부딪히고 쪼개지며 핵분열을 일으키는 원자들처럼 다뤄진다. 놀런에게 영화의 장면은 하나하나에 개별적인 의미와 자율성이 부여되는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거대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기계장치의 한 부분으로 ‘구획화’된 도구들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라는 중대한 인물의 연대기적 삶에도, 2차 세계대전 앞뒤로 펼쳐지는 역사의 궤적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펜하이머>는 인물과 서사가 정합적으로 연결된 영화라기보다 거대한 정념으로 뭉쳐진 이미지와 사운드의 덩어리다. 맨해튼 계획의 목표를 위해 모든 원료를 효율적으로 도달할 수 있게끔 하나의 점을 설정하는 오펜하이머의 설계도처럼 이 영화는 폭발의 발화점을 향해 수렴되는 속도의 경험이다.
눈먼 탐정으로서의 오펜하이머
실제로 재래식 폭약을 터트려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트리니티 실험 시퀀스는 <오펜하이머>가 전제하는 미학적 자만심과 자의식을 응축해 문자 그대로 폭발시키는 구간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고집하는 아이맥스 촬영과 실사 재현이 그 자체로 특별한 영화적 감각을 제공하는 물리적 기반이라고 말하는 건 대응할 가치가 없는 헛소리이자 이제는 특권을 점유한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낭비를 신비화하는 반동적인 옹호일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폭발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대상은 폭발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놀런은 원자폭탄 실험을 지켜보는 군중을 특별한 장면에 반응하는 영화 관객처럼 비춘다. 그들은 폭발을 맨눈으로 바라볼 수 없으므로, 고개를 돌려 반사되는 잔상을 목격하거나 선글라스와 창틀에 매개된 이미지를 마주한다. 오펜하이머 역시 먼발치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창문 사이로 폭발을 바라본다. 폭탄이 터지고 모든 소리가 암전되는 잠깐의 순간에도 돌아가는 기록용 필름 릴 소리가 암시하듯, 이 경험은 그의 눈동자에 흉터처럼 새겨질 것이다. 모든 것을 계획한 한 남자의 얼굴이 있고, 창밖에는 폭발이 그의 계획보다 큰 결과물로 실현된다. 그리고 영화라는 시청각 장치가 둘 사이를 매개하고 있다. 이것이 <오펜하이머>와 크리스토퍼 놀런이 조직하는 영화의 삼위일체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놀런은 <오펜하이머>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과감한 파동이 이끄는 영화의 목적지는 대단히 미심쩍은 곳이다. 트리니티 실험의 핵심적인 장면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 폭발은 현실 속의 수많은 윤리적 논쟁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뒤얽힌 사건이라기보다는 한명의 거대한 인간이 일으킨 신화적 징벌처럼 묘사된다. 그것은 이 영화가 전제하는 계급성과 무관하지 않다. 놀런에게 있어, 수많은 인류는 물론 지구라는 행성의 운명까지 좌우할지 모르는 폭발의 연쇄반응은 오직 엘리트주의적 영웅의 섣부른 실천과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주의 집단의 판단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을 때, 실험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이 현실에서 보였다는 서로 다른 복잡한 반응은 놀런의 시선에 들어올 수 없다. 오펜하이머가 관심을 두는 좌파 사상과 공산주의 집단 사이의 긴장은 그저 청문회 과정에서 그를 발목 잡는 경력의 흠집으로 치부될 뿐이다.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의 사막에 모든 구성원이 거주할 만한 크기의 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책임자인 그로보스 대령(맷 데이먼)이 이를 수락하면 그 자리에 거대한 마을이 생겨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유능한 책임자의 계획과 관료주의의 실행력을 유사 종교적인 권능으로 취급할 뿐, 집단의 경험과 충동은 다루지 않는다. 그가 우주에 탐닉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세계를 바꾸는 절대적인 원인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폐쇄된 엘리트주의자의 초상화이며 은근히 그 관점에 동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는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오펜하이머의 얼굴 뒤로 분열하는 원자의 추상적 이미지와 장엄한 우주의 기록을 보여주곤 한다. 이 과대망상적인 장면 연결은 신의 시점에서 영화적 우주의 논리를 재구성하려는 의지의 표상일 것이다. 특정한 대상을 카메라 앞에 제시하고 연결하는 것만으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편집은 감각을 확장하는 영화적 몽타주가 아니라 그 안으로 모든 맥락을 끌어당기는 개념적 착상에 불과하다. 그 이미지의 연쇄가 스크린을 뒤덮을 때 기능을 멈추는 것은 오펜하이머의 얼굴과 우주의 원리가 결합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인 원자폭탄에 대한 현실 윤리적 질문이다. 스트로스 제독의 청문회와 오펜하이머의 비공식 청문회를 교차하는 이 영화의 법정영화 구조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호함과 논쟁적 사태의 판단 불가능성을 덧입히는 형식으로 성립하는 대신, 스트로스의 시원찮은 악행을 고발하면서 반대편에 있는 오펜하이머에게 도덕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소심한 옹호로 축소된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의 실천과 그의 통제를 벗어난 결과물이 빚어내는 딜레마를 파고들지 않는다. 다만 오펜하이머에게 비극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선지자의 면모를 부여하면서 끝날 뿐이다. 영화가 건네는 오펜하이머의 도덕적 승리는 그를 사로잡은 죄의식과 딜레마를 압도한다. <오펜하이머>는 강렬한 경험의 폭탄이지만, 폭발물이 남긴 잔해까지 시선에 담아내지 않는다. 나는 그 외면에 비겁함이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