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차이와 대조를 인식하라’, <오펜하이머>의 사운드 디자인에 관하여
2023-08-31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오펜하이머>는 사운드 디자인이 독특한 영화다. 누군가 ‘이미지로 설명된 사운드트랙을 보았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전체 분량의 80% 이상이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에서 음악이 대사를 지운다는 불평을 들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나 <테넷>(2020)에서 마스크를 쓴 캐릭터들이 대사를 전달할 때마다 관객은 소리가 뭉개지고 음악이 과하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해외 매체 <인사이더>의 취재에 따르면 그 이유는 후시녹음(ADR)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대사 자체에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과거와는 다르다. <오펜하이머>는 음악의 사용 빈도 자체가 잦은 데다 <인터스텔라>(2014)처럼 기억하기 쉬운 선율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면에서 이전의 영화들과는 구분된다.

침묵이 뮤지컬 넘버가 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음악이 감상에 불편을 줄 정도로 과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음악 사용 때문인지 몇몇 부분은 마치 오페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미건조하게 인지되던 사운드가 갑자기 ‘훅’ 하고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부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트리니티 실험 장면의 사운드 몽타주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화면 속 인물들은 눈을 가린 채 먼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내 폭발의 순간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화면에서 영화는 침묵을 이어가는데, 이처럼 사운드와 화면의 괴리에 대해 과학자들은 현실적인 재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모든 현실이 감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경험은 오롯이 이 영화만의 것이다. 그리고 그 폭발 이후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가 들려온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음울한 리듬감을 생성한다. 이 과정이 마치 오페라의 유명한 레퍼토리처럼 들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낮은 음성과 어우러진 파괴의 감정을 통해 영화가 추구하는 사실주의의 몽환이 완성된다.

만일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이미지보다 음악의 일시적인 우위’라고 정의한다면, 서사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 <오펜하이머>의 일부 표현 방식은 분명히 뮤지컬영화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특히 서사에서 하이라이트 부분의 질감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영화는 1945년 8월의 가장 유명한 핵폭탄 투하 사건이 아니라 당대 7월의 어느 날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그렇게 뉴멕시코주 인근에서 실시한 모래 바닥에서의 핵실험 장면이 스크린에 재현된다. 사실 이 현장은 핵폭탄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는 다르다. 가장 중요할 수 있다. 아마도 감독은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희대의 천재가 지닌 주관성에 접근하기 위해 영화의 모든 내레이션을 재배치했던 것 같다. 실제로 개인의 역사에서 가장 중시되는 변곡점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는 세부의 요소들을 양분한다. 그렇게 관객이 기대하는 어느 특정 장면이 사라졌다. 모두에게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인공이 창조해낸 가장 폭발적인 상황이 영화 전체에서 배제되어버린 것이다. 대신 제로의 사운드를 밀어넣은 폭발적인 미지의 비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침묵이 뮤지컬 넘버가 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기이한 상상력으로 직접 그 질문에 답한다. 물론 그 대답은 낙관적이다. 비록 일상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이 영화의 몽타주는 모든 가능성을 성취해낸다. 그런 면에서 <오펜하이머>가 사운드를 사용하는 방식은 흡사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몽타주 실험과 비슷해 보인다. 어쩌면 형식적 사고처럼 인식되더라도 크리스토퍼 놀런은 그의 사고방식을 실행하는 데 익숙한 연출자다. 존재론적 불일치를 통해 시간에 대한 영화의 개방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구조적인 접근을 택한다. 요컨대 불안정하더라도 영화를 예술처럼 취급하기 위해 그는 구조를 활용한다. 이때 모든 상황의 양분은 세부와 전체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영화는 시간의 예술에 접근한다. 장르적으로 채색되는 일부의 상황에서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단순히 역사극이나 스릴러물, 법정물로 이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이유다. 어떠한 법칙도 발견되는 즉시 기존의 설정을 뒤집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장르의 연쇄, 현상의 연쇄, 그리고 생각의 연쇄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모아서 파괴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스스로의 미학을 드러낸다. 그 결과 사실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영화, 컬러인 동시에 흑백인 영화가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의 관람객이 할 일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저 그 차이와 대조를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개인에서 세상으로

할리우드 대작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몹시 흥미롭다. 그 선택은 헤겔적일 수도 혹은 파편화의 전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지닌 구조적인 진실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비추는 인물은 오직 ‘오펜하이머’뿐이지만 우리는 ‘인류’를 떠올린다. 이러한 정반합의 구성, 혹은 점진적 극단이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미덕이다. 인트로 시퀀스에서 보았던 작은 입자의 움직임,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갈래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극단의 시도들이 크리스토퍼 놀런의 아이맥스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 미세한 움직임에 대해 영화는 이들이야말로 세계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과학자 오펜하이머가 대단한 이유는 그가 보이지 않는 입자로부터 모든 가능성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도식화에 반하는 그의 직관이 모든 이들을 감복시켰다. 서사의 초반부,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할 무렵의 오펜하이머 얼굴을 떠올린다. 단 한명뿐이었던 강의실에 바이올린 솔로의 음률이 울려 퍼진다. 점차 학생들의 수가 많아지자 바이올린의 개수는 많아진다. 화음이 겹쳐진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음향이 들려온다. 그즈음, 이미 교실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개인의 얼굴에서 시작한 영화가 마침내 세상과 조우하는 방식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이 작품의 여정은 사운드 디자인과 어우러져 확장된다. 그 끝을 인류의 정신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보이지 않는 사운드의 힘이 공허한 스크린을 장악한다. 어쩌면 공간을 촬영한다는 말은 사운드를 공간화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 <오펜하이머>의 사운드 디자인은 영화의 사운드가 전달하는 그 본질적인 구상을 실질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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