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현실을 목격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때때로 영화가 현실을 초과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일치할 순 없다. 이건 한계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양태에 가깝다. 정보의 총합이 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의 전기를 접한다는 건 아무리 방대한 정보와 입체적인 수단을 동원해도 절대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연출자가 고민하는 건 비워진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비울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공백을 채우는 건 결국 관객, 다시 말해 목격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펜하이머> 역시 애초에 오펜하이머의 삶이라는 정보를 채울 생각이 없다. 오펜하이머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연애사가 어땠는지, 어떤 딜레마에 놓인 인물인지 놀런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건 없다. 하지만 끝내 설명된다. 사실 여기서 설명되는 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놀런이라는 연출자의 위치다. 다시 말해 이건 전기‘영화’이지만 결코 전기는 아니다.
플롯과 편집, 입자에서 파동으로
<오펜하이머>는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관람하는 것과 전혀 없이 마주하는 것이 아예 다른 체험으로 소화될 영화다. 관람 전후를 막론하고 수많은 공백을 마주한 관객은 반드시 빈 정보를 메워야 한다. 덕분에 영화의 흥행과 함께 범국민적인 학습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기반이 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비롯해 각종 영상매체에선 오펜하이머의 일생과 핵폭탄의 탄생 과정,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이 쏟아지는 중이다. 정확한 수요에 따른 공급이다. 이 영화를 두고 놀런의 편집 방식, 사운드, 메시지와 의미가 궁금한 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작동원리를 몰라도 감정과 감각이라는 결과물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는 기계장치이기 때문이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놀런의 상상력은 빈약한 내용물보다 작동원리가 더 흥미롭다.
편집은 과학이다. 쿨레쇼프 효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몽타주의 진수는 점(사건)과 점(사건)을 연결시키는 과정과 결괏값을 관객(목격자)의 인지에 맡긴다는 점이다. 무표정 뒤에 음식 사진이 오면 허기짐이란 감정으로 인지된다는 원칙. 몽타주의 인지과학은 시간의 물리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인터스텔라>는 블랙홀이라는 사건으로 역전된 인과를 하나의 선 위에 재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이어진 <덩케르크>에서는 장면의 방향과 동선만으로 서로 다른 시간의 밀도를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다. <테넷>에서는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뀐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거의 규칙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복합한 플롯의 연쇄반응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험했다. 그리하여 준비를 마친 놀런은 이제 일반물리학의 경계를 넘어 양자물리학의 세계로 돌입한다. <오펜하이머>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놀런식의 화답이다. 어쩌면 오펜하이머에 대한 궁금증은 이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양자물리학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건 딱 하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는 관측된다는 거다. 목격이라는 사건이 개입하는 순간 대상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확한 과정의 관측은 불가능하다. 내 멋대로 표현하자면, 마침내 모른다는 걸 안다.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놀런은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를 안다는 건, 목격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흔적들, 관측된 결괏값들을 통해 그가 거기에 있었던 방식을 관측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는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은 빛까지 삼키기에 우린 그것을 볼 수 없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블랙홀을 볼 수 없지만 블랙홀이 거기에 있음을 안다. 존재하지만 관측되지 않는 것을 인지하는 유일한 길은 대상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관측하고 있는 자, 다시 말해 관찰자의 양태를 측정하는 거다. 일련의 흐름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다. 컬러 파트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오펜하이머라는 객관적 사건이 아니라 그걸 관찰한 놀런의 관점이다. 놀런이 1인칭으로 시나리오를 쓴 건 허세가 아니라 필연인 셈이다. 양자역학을 어떻게 내러티브화할 것인가.
<오펜하이머>는 입자(사건)가 아니라 파동(덩어리)으로 사건을 전달한다. <오펜하이머>는 액션ꠓ사건이 제거된 리액션을 플롯 위에 무한 연쇄시킨다. 예컨대 오펜하이머가 영국 유학 시절 압박과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교수의 사과에 독을 주입한 사건은 상황 설명을 생략하고 불쑥 제시된다.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영상으로 옮긴 이 숏 앞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과정, 즉 액션이 제거되어 있다. 대신 거의 오펜하이머의 주관적인 감각이라고 해도 좋을 감각적인 영상들이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는데 핵폭발이 우주의 탄생을 연상시키는 일부 영상들은 마치 미래에서 온 예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놀런은 사운드라는 강력한 접착제로 시공간이 분열된 감각의 컷들을 한덩어리로 뭉친다. 관객이 목격하는 건 인과관계의 사건, 다시 말해 입자가 아니다. 오펜하이머 개인이 느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덩어리, 즉 파동의 형태로 인지된다.
왜 3시간이 필요했는가
물론 이러한 ‘양자역학의 플롯’(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일 수 있다면)이 <오펜하이머> 전체의 원리는 아니다. 감독은 오펜하이머(라고 쓰고 관측자 놀런이라고 써야 할) 시점의 컬러 파트와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시점의 흑백 파트를 나눴다. Fission-핵분열한 컬러 파트는 주관적 감정의 연쇄로 막대한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Fusion-핵융합하는 흑백 파트는 인과를 통합하여 뭉치는 구조다. 흑백의 청문회 파트는 오펜하이머의 리액션이라는 한 방향으로 편집된 컬러 파트에 대한 액션 역할을 한다. 컬러의 리액션(Fission-핵분열)이 먼저 제시되고, 흑백의 액션(Fusion-핵융합)이 따라오는 변형 플래시백 구조지만 아무튼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일반물리 세계에서 인과관계를 형성하여 오펜하이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준다. 결과적으로 놀런은 순교자라는 위치에서 오펜하이머라는 현상을 관측한다.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종착지는 출발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내 질문은 하나다. <오펜하이머>는 왜 180분이 필요했는가. 플롯으로 구축되는 정보는 120분을 넘기는 시점에 이미 종료됐다. 스트로스는 개인적 원한으로 오펜하이머를 순교자의 자리로 밀어넣었고, 오펜하이머는 속죄하듯 기꺼이 모욕의 고통 속에 몸을 던져 프로메테우스가 된다. 이후 설명이 끝났음에도 오펜하이머의 고통은 이후로도 1시간 넘게 목격된다. 놀런은 관객을 오펜하이머의 자리에 데려다놓은 뒤 고통을 대리 체험시키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당신이 목격한 것은 관측 대상 오펜하이머가 아니라 관측자 놀런이다. 정확히는 놀런의 육체를 투과한 오펜하이머라는 흔적들이다. 감독의 의도는 오펜하이머의 진심과 함께 영원히 빈칸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관측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놀런이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한) 핵융합 물질, 에너지의 덩어리가 사건의 입자가 아닌 파동의 형태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이 고통이든, 의문이든 어떤 감정의 덩어리가 긴 상영시간에 걸쳐 관객의 육체에 축적된다. 다만 나는 아직 그 결괏값을 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