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김소희, 김병규, 송경원, 송형국 평론가가 뽑은 2023년 한국영화의 결정적 장면
2023-09-01
글 : 송경원
<비밀의 언덕>
몽타주 속 은밀한 동조자 <비밀의 언덕> / 김소희

<비밀의 언덕>에서 마음이 흔들린 순간은 경희(장선)가 시에서 주최한 어린이 글짓기 대회 당선작이 실린 신문을 보는 장면에서였다. 단순하게는 경희의 반응이 상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자식을 무한히 자랑스러워할 부모의 존재를 연상시켰기 때문일 것이나, 감동의 경로를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이 장면은 혜진(장재희)이 대상 당선작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가운데, 교내 방송을 통해 이를 청취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일련의 숏과 연속해서 등장한다. 즉 경희는 대상 수상작 청자의 자리에 불려나온 셈이다. 하지만 이어진 숏에서 경희는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명은(문승아)의 글을 가위로 오려내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장면은 대상 수상작의 무거움에 짓눌린 일련의 리액션을 중단하는 역할을 하기에 특별하다. 만약 명은이 대상을 받아들였다면 그 숏은 지금과 같은 힘을 지니기는커녕 홀로 무거움을 감내하는 전형적인 얼굴로 남겨졌을 것이다.

경희의 행위가 놓인 자리는 수상자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명은의 위치와 심리적으로 유사하다. 주요 수상자들에게 밀려 몸과 얼굴이 가린 명은의 자리는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상 수상작에 얽힌 비밀의 당사자이자 기획자이기에 적절했다. 상의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를 스크랩하며 홀로 영광을 누리는 경희의 얼굴은 은밀한 배치에 의해 명은의 비밀과 우연히 조우한다. 이 텔레파시가 올해 내가 한국영화에서 발견한, 모녀 멜로드라마와 가족 신파의 유일한 생존 신호였다. 오늘날의 영화가 감정을 위해 발굴해야 할 지점은 충격적 사연이나 과잉 동조의 눈물이나 민망한 유머가 아니라, 더없이 담백한 기쁨을 위한 적절한 자리 선정이다.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적절한 태도는 조급한 개입이 아니라, 설사 관객이 눈치챌 수 없다 해도 찰나의 비밀로 남겨지길 고집하는 용기가 아닐까.

<드림팰리스>
아파트와 한국영화의 잃어버린 장소 <드림팰리스>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김병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와 김희정 감독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는 같은 구도의 장면이 나온다. 집 안에서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을 담아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창밖을 보는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남편이 죽은 뒤에 새로운 집에 도착하거나 살던 집을 벗어나 다른 집으로 떠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같은 집에 머물던 동반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내 두 영화의 방향성은 투쟁의 기록을 따라가는 것(<드림팰리스>)과 애도의 시간을 관측하는 것(<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으로 갈리지만 내게 흥미로운 부분은 서로 다른 두 영화가 집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죽음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지점이다.

10년 전이라면 이런 구도는 <건축학개론>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을 것이다. 집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은 과거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시간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영화에서 집은 미래로 향하는 안식의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은 시도 때도 없이 녹물을 쏟아내고, 죽은 자와 나눴던 기억을 불러낼 것이다. 집은 해결되지 않는 유죄의 장소다. 우리는 그 ‘이후’의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김희정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그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정주를 제공하는 대신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혼란스럽게 되묻는 장소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출간된 동명의 책을 제목으로 삼은 엄태화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쩌면 한국영화의 표면적 질서를 지탱하던 그 집의 표상을 폭파하는 분기점인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아파트 내부의 질서는 붕괴하고 만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그곳은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집을 잃어버린 한국영화는 아직 장소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디에 도착할 수 있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그 매치컷 <콘크리트 유토피아> / 송형국

영탁(이병헌)이 민성(박서준)에게 방범대장직을 부탁하는 회상 장면. 악수를 청하는 영탁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이어 맞잡지 않은 채 내려진 민성의 손이 매치된다. 악수할 듯 올라가는 손. 알고 보니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자신의 방 옷장 앞에 서 있는 민성의 손이었다. 그대로 옷장 행거 봉을 움켜쥐는 손. 방범대로 나설 것을 결심하는 손이다. 이로써 영탁과 민성의 늦은 악수가 완성된다. 주저함 속에 동조에 이르는 과정을 단 몇컷으로 요리한 장면이다. 민성은 망설임 끝에 폭력에 가담하는 구성원으로서의 기능이 부여된 인물이다. 고밀도 콘티뉴어티다.

지난 10년여 사이 세계 곳곳은 ‘악의 평범성’(해나 아렌트)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가 재소환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적 현실을 보여줬다. 웹툰 <유쾌한 왕따>나 <D.P 개의 날> 등의 텍스트가 등장해온 흐름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탁이 얼떨결에 힘을 쥐고 외부의 적을 활용해 지지세를 유지하는 권력자 캐릭터라면, 민성은 폭력의 방관자, 동조자 혹은 가담자로서 ‘내집단 편향’에 순응해가는 평범한 시민의 얼굴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내러티브나 플롯뿐 아니라 콘티와 편집으로도 각 인물의 기능을 설득하는 장면들로 빼곡하다.

엄태화 감독은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연출 수업을 받은 경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교히 다듬어진 매치컷들을 여럿 배치한다. 영탁의 얼굴 측면 줌인-클로즈업에서 ‘아파트’ 노래방 기기로 들어가고, 여기에 인물의 사연을 알리는 플래시백을 매치시킨 다음 영탁의 얼굴 정면 줌아웃으로 빠져나오는 콘티에선, 엄태화 감독을 한국영화가 주목할 차세대 감독으로 손꼽기에 충분한 근면함이 보인다. 민성이 점차 폭력으로 물들어가며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 숏 뒤에 명화(박보영)가 영탁의 집 벽을 부수는 숏으로 매치시켜 폭력의 실체를 파고드는 대조적 교차 역시 부지런한 콘티 구성의 결과다.

<범죄도시3>
소진된 자기 복제의 승리 <범죄도시3> / 송경원

2023년 그 어떤 한국영화 속 장면도 영화 밖 결정적 장면을 넘어서지 못한다. 올해 유일하게 1천만 관객의 선택을 받은 <범죄도시3>는 이미 한편의 영화 이상의 여진을 남기고 있다. 물론 흥행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체로 질적 평가와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속편이 거듭될수록 열화되어 몇 안되는 장점마저 까먹어가고 있는 이 시리즈가 여전히 압도적인 차이로 2023년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하나의 징후로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범죄도시3>는 한편의 액션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문제는 세 번째 선보인 이번 영화가 1편과 2편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결국 관객의 선택을 받았고 아는 맛이 무섭다는 걸 증명했다.

마동석을 중심에 두고 이 시리즈를 소비하는 감각은 사실 편한 마음으로 이미 본 시트콤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다. 귀엽고 강력한 마동석이라는 아이콘은 불변의 고정값이 되어 늘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후 갈등이나 긴장은 거의 배제한 채 압도적인 힘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안전한 쾌감을 제공한다. 문제는 상황과 무대, 빌런만 교체하며 반복을 거듭하는 가운데 재미와 개성마저 옅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런은 늘었지만 더 약해졌고, 무대는 넓어졌지만 산만해졌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석도 형사의 시그니처 개그 한방은 자기 복제 끝에 어느덧 솜 주먹이 됐다. 1편에서 “혼자야/어 싱글이야”, 2편에서 “5:5로 나누자./누가 5야?”라던 마석도는 이제 소스가 떨어져 개그마저 반복한다. “5:5 얘긴 꺼내지도 마. 어차피 내가 5잖아.” 개그의 핵심 중 하나는 반복과 변주다. 하지만 주먹을 내밀며 “인사해, 주 변호사야”라고 싱긋 웃는 마석도의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져 슬슬 폐지가 가까워진 개그 코너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더 씁쓸한 건 이 익숙한 개그 코너 말고 돌릴 채널이 마땅치 않아 그냥 멍하니 틀어놓고 있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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