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최근 한국 영화는 어떤 경향성을 가지는가’, 한국 여름영화 ‘BIG4’ 대담
2023-09-01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송경원 한국영화 빅4의 흥행 성적이 대략 나온 상황이다.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비공식작전> <더 문>이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올여름 시장에 대한 총평부터 해보자.

김병규 우선 네 영화를 왜 묶어 이야기해야 하는지부터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개봉 시기가 비슷할 뿐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대중적인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모든 작품이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한 작품인 것 또한 아니다. 몇몇 텐트폴 영화를 소위 ‘빅4’라고 부르는 관습이 정확한 맥락인지 회의가 든다. 아주 인위적인 마케팅 용어다. 그런데 영화 잡지나 비평가들이 이런 무기력한 관습을 따라야 하는지 의문이다.

송경원 왜 굳이 빅4로 묶어야 하냐는 질문부터 해결해야겠다. <범죄도시> 시리즈가 여름 전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지면서 오히려 여름 시장이 축소되는 모양새다. 사실 텐트폴 영화는 배급, 마케팅뿐 아니라 이후 만들어질 영화들의 퀄리티와 관객 경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 그런 힘이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빅4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건 올해 상반기를 되돌아볼 때 <범죄도시>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곤 언급할 만한 한국영화가 아예 씨가 마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양적으로 크게 줄어든 건 아닌데 질적으로 심각하다. 올 상반기 박스오피스 10위 중 한국영화가 세편(<범죄도시3>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뿐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시장이 축소됐다는 걸로 변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송형국 동의한다. 대체로 1년 중 관객의 3분의 1이 여름 시장에 모이는 만큼 여름 시장은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향후 흐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장이다. 우선 기존에 한국영화를 견인하던 중견감독, 그리고 개성이 뚜렷해서 충분히 기대할 만했던 감독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대단히 매끈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매끈해졌다는 건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강조한 현대사회의 속성 중 하나다. 예컨대 우리는 세계 대도시 어딜 가든 스타벅스에 들어가면 매뉴얼에 정해진 매끈한 서비스를 받고, 낯익은 메뉴를 골라 마신다.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은 불편함도, 의외의 발견도, 예기치 않은 인연도 제거한다. 현대사회 전반의 다양성이 납작해지는 징후가 한국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예술의 본질은 부정성에 있다. 의문을 제기하고 경보를 날리고 낯선 자극을 줘야 한다. 이런 것들을 통속적으로 좋은 예술이라 말한다면, 매끈함의 감각은 정반대다. 우리가 주목해온 감독들 내지는 자기 색깔과 인장이 있던 감독들, 흔히 한국영화의 힘이라고 했던 감독들의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매끈해졌다. 특히 <더 문>은 매끄러움의 정수 같은 작품이다. 낯익은 것들만 쭉 이어놓은 느낌이다. 많이 본 우주영화의 장면들, 유사 부자의 관계, 신파 서사들이 매끄럽게 연결만 돼 있다. 보면서 어떤 불편함도 느낄 수 없어 심심한 상업영화다.

불쾌한 매끈함, 어긋난 귀환 그리고 각자도생의 시대

송경원 관객의 선택과 반응을 하나의 징후로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각 영화의 내적 분석과 더불어 2023년 여름 한국영화의 풍경을 살펴보고 싶다. 우선 제시된 키워드는 매끈함이다.

송형국 빅4를 먼저 이야기해야겠지만 상반기 영화 대부분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선명한 메시지를 발언해온 임순례 감독의 <교섭>은 왜 이리 매끈해졌나. 다소 이상한 얘기를 영화에 곧잘 끌어오던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왜 이렇게 장르적인가. 남성성을 성찰하던 윤종빈은 왜 ‘성찰’만 빼고 남성성만 남아 있는 <수리남>을 만들었나. <D.P.>에서 악의 평범성을 얘기하던 한준희 감독은 왜 ‘평범성’을 빼고 악만 남은 <D.P.> 시즌2를 내놓았나. 전체적으로 이런 불편함을 뺀 매끈함들만 퍼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23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꼽을 영화가 없는 1년이 있었나 싶더라.

김소희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경우 거대 서사가 개인의 이야기에 잘 녹아든 반면, <더 문>과 <비공식작전>은 거대 서사와 개인의 이야기가 충분한 설득력으로 묶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가 큰 만큼, 더 세심한 작전이 필요했다고 본다. 방금 말한 매끄러움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다. 난 <더 문>이 매끄럽기보다는 덜컹거리고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작자의 매끄러움과 관객의 매끄러움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매끄러움이 서로 불일치한 문제일 수 있다.

김병규 <더 문>은 매끄러움이라고 말할 만한 영화 문법조차 없다. 네편의 영화를 보며 국가의 질서가 아예 방치돼 있거나 거의 화면 바깥으로 배제돼 있다고 느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오프닝 시퀀스는 80~90년대 한국 아파트 역사의 기원을 이야기의 원점으로 삼는다. <밀수>는 70년대로 돌아가서 동네 공무원과 갱스터가 결탁한 질서를 보여준다. <비공식작전> 역시 국가의 역할이 배제되고 그 틈을 시민사회나 관료들이 채우는 서사다. 국가 질서의 부재, 그 반대급부로 어떤 엘리트주의적인 각자도생이 공통으로 감지된다. 결국 지금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하나로 말하면 각자도생의 전문가주의가 아닐까.

송경원 김병규 평론가의 지적처럼 네편의 영화는 제작 시기가 다르고 우연히 이 자리에 도착한 것뿐인데 연결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영화의 상상력과 역사적 맥락에서 꿰어볼 수 있겠다. <밀수>부터 얘기하면 김소희,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비평을 둘 다 재밌게 읽었다. 개인적으론 <밀수>를 처음 보곤 과연 할 얘기가 있을까 싶었다. 내 시야는 단순하게 ‘레트로하고 재밌네’ , ‘류승완 감독 본인이 사랑하는 70년대의 것들을 들고 왔네’ 정도에 그쳤다. 김소희 평론가가 <이어도>와 연결한 것을, 김병규 평론가가 활극의 성질과 연결한 것을 읽으며 해석의 폭이 넓어진 느낌을 받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화는 류승완 감독이기에 가능했던 걸까.

김소희 빅4 영화에서 의외의 공통점을 느꼈다. 네 영화가 각자 점하는 시간대가 다르긴 하나 여기가 아닌 다른 시간대를 선택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를테면 <밀수>는 70년대, <비공식작전>은 80년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설정상 동시대라고 봐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아파트 산업이 부흥하던 90년대의 풍경이 연상된다. <더 문>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끊임없이 아버지의 실패를 얘기하며 2000년대를 환기한다.

송경원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도피한다는 건 2020년 영화의 경향을 이야기할 때도 언급된 특징 중 하나다. 그런 경향성이 점점 심화되는 중이라고 봐도 좋을까.

김소희 달라진 게 있다면 각자의 시간대를 선택했는데 그것들이 딱히 묶이진 않는다는 점이다. 경향이 있지만 경향이 없는 것 같은 상황이다. 도피의 서사에서 한발 더 나아간 변화를 읽어본다면 일종의 귀환 서사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들이 꼭 돌아온다. <밀수>는 월남에서 돌아온 권 상사(조인성)로 인해 춘자(김혜수)가 군천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라진 혜원(박지후)이 황궁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과거에 죽은 남자의 이야기가 돌아오는 형태다. <더 문>에선 황선우(도경수)를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전임 센터장인 재국(설경구)이 우주센터로 돌아온다, <비공식작전>은 납치된 서기관을 데려오기 위해 민준(하정우)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다시 위기에 오르고, 판수(주지훈)까지 생각하면 삼중의 귀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송형국 ‘저개발국 또는 불모지에서 고초를 겪는 인물, 그리고 그의 귀환’을 그리려는 흐름이 보인다. <모가디슈> <교섭> <비공식작전> <더 문> 이 그런 예다. 군부독재가 남아 있던 시절을 배경 삼는 방식으로 당시를 낭만화하면서, 현재의 관객에게 우월감 또는 안정감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최근 다수의 범죄액션작이 남아시아 개발도상국으로 향하는 이유와 맥이 닿아 있다.

김병규 일련의 귀환 속에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달라졌다. 되돌아온 인물들은 전문가가 아님에도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10여년 전 한국영화, 이를테면 <아저씨>나 <악마를 보았다>를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국정원, 특수요원 출신이다. 이런 전제가 장르적 알리바이를 형성한다. 시민처럼 보이지만 사실 굉장한 능력을 갖춘 주인공의 전문가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실한 관료주의자가 탁월한 전문가도 돼야 한다. 예를 들어 <비공식작전>의 민준은 공무원인데 아프리카에서 카 체이싱과 총격전을 수행한다. <밀수>의 춘자는 생존형 사업가에서 범죄영화의 설계자가 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탁(이병헌) 역시 하루아침에 닥친 재난으로 인해 시스템의 대표로 추대된다. 아이러니한 건 <더 문>이다. 가장 고도의 전문가성을 요구하는 이야기인데, 실제 일어나는 일들은 잘 봐줘야 고등학생 수준의 행동으로 전개된다.

<밀수>의 경우, ‘레트로’라는 이중 인화

송경원 <밀수>부터 해결해보자. 모든 영화를 ‘레트로’란 키워드로 수렴할 순 없겠지만 필사적으로 지금 현재의 한국 사회가 아닌 다른 시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엿보인다. ‘매끈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밀수>랑 <비공식작전>의 경우 감독들의 전작에 비해 얌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 고민 끝에 다음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밀수>는 <군함도>의 실패를 바탕으로 역사적 맥락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거리를 조정한 결과물이란 느낌이다. 류승완 감독은 활극을 만들어도 무언가 한국적인 것, 한국적인 의식들을 반영한다. 목적과 의식이 지나치게 표면까지 올라온 경우가 <군함도>였다. 이번엔 그런 부분을 경계하면서도 여전히 삐져나오는 부분들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김병규 <밀수>가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 같은 영화는 아니다. <밀수>는 70년대의 역사가 돌아온다기보다 70년대의 한국영화가 돌아온 느낌이다. 오히려 실제 역사는 철저히 배제했다. 아주 장르적인 무대를 설정하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현실의 역사적인 사건을 영화화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끌고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이런 면모는 특히 조춘자라는 캐릭터에서 발견된다. 춘자에게는 완벽하게 활극의 쾌감으로만 소화할 수 없는 연민과 드라마가 있다. 마치 70년대 한국의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에서 걸어나온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식모살이하고, 성폭행당할 뻔했다는 춘자의 전사는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 주인공을 떠올리게 만든다. <밀수>는 그 당시 한국의 도시에서 실천되지 못한 비전이 군천이라는 가상 공간에 틈입할 때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류승완이 선택한 70년대란 시기는 당대 장르영화들을 소환하는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철저하게 장르영화에 머무르려는 강박이 또 다른 역사성을 발생시킨다.

송경원 맞다. 갈등의 해결사로 상어를 등장시킨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죠스>는 70년대라는 시대는 공유하되 한국영화적 맥락의 바깥에 있는 존재니까. 오히려 관객 류승완의 체험에 가까운데, 의외로 지금 젊은 관객들에겐 이 부분이 신선하게 다가가는 것 같기도 하다.

김병규 그 지점이 바로 <밀수>의 불균형이다. 동시대 한국 사회가 아닌 가상의 70년대, 완벽히 장르적 무대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라는 역사적 그림자가 개입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런 충돌을 끌어안고 해결하는 과정을 담아냈다면 의외의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끌어온 건 70년대 할리우드 장르를 표상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식 상어다. 70년대 한국영화와 대결하는 긴장을 놓아버린 손쉬운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김소희 <밀수>를 <이어도>와 비교하는 비평을 썼지만, 그것은 영화의 의도라기보다는 영화를 들여다보고 싶은 내 의지가 더 컸다. <밀수>에 관해 할리우드 장르영화나 쿠엔틴 타란티노, 홍콩영화나 스필버그 영화 등의 레퍼런스가 연상되기도 하고, CG임이 분명한 장면도 보이는데 이것이 결함이기보다는 허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만든 것 같다.

김병규 류승완은 타란티노처럼 사슬을 풀고 장르적 쾌감에 몰두하는 감독은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너저분한 감정의 닻에 걸려 있다. 말했듯이 류승완은 연민의 감정과 드라마를 포기하지 않는 감독이다. 장도리(박정민)라는 악인이 진숙(염정아)의 시선을 피하는 후반부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선의 문제는 올여름 빅4의 일관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민성(박서준)은 자동차에 깔려 죽어가는 사람의 시선을 피한다. 연민과 감상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이런 감정들이 한국영화 캐릭터의 내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한국영화가 온전한 장르적 무대와 쾌감에만 속할 수 없게 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비공식작전>처럼 타자화된 국외로 떠나야 한다. 민준은 탈출 과정에서 두 사람을 죽이지만 아무런 죄의식과 두려움이 없다.

김소희 감정 문제를 넓게 보자면, <밀수> 속 춘자와 진숙의 관계에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하거나 하지 않는 게 영화의 수용에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진 않는 것 같다. 서로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보여주듯, 감정 역시 액션의 합을 맞추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조율되어 있어 부담스럽지 않았다.

송경원 반대로 말하면 감정적 밀착이 없어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장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할까. 시선의 문제를 언급하니 장도리가 옥분(고민시)을 처음 만날 때 눈을 마주치지 않고 윙크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단지 캐릭터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재치 있는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부끄러움, 수치심이라는 테마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캐릭터가 종종 영화 바깥에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권 상사가 살아나는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나.

김병규 그게 <밀수>가 지닌 불화의 지점 같다. 외팔이, 애꾸눈처럼 장르적 기호를 지닌 존재는 액션 장면에서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이들이다. 반대로 류승완적 인물은 붕대를 두른 인간들이다. <주먹이 운다>의 복서, <다찌마와 리>에서 붕대를 감고 살아 돌아오는 인물들이야말로 류승완 감독이 배우에게 건네주는 인물상인 것이다. 그게 아닌 인물은 류승완 감독 본인이 연기할 때다. 직접 연기하는 인물들은 눈알이 뽑히거나 손가락이 잘린다. 반대로 류승완 감독이 배우에게 주는 건 회복의 가능성이 열린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언제든 잘려나가고 쾌감의 일부로 소화되는 액션영화의 몸이 있고, 다른 한편엔 붕대에 감겨 살아나는 조인성의 몸이 있다. 이 두 가지의 몸이 부딪치는 게 <밀수>의 공간이다.

송경원 종합해보면 <밀수>는 70년대 한국, 한국영화의 레퍼런스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바깥에 서 있다. 군천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 게 그렇고, ‘죠스’라는 할리우드의 영화 기호를 해결사로 제시한 것도 그렇다. 김소희 평론가의 표현대로 귀환이라고 부른다면,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차라리 도피를 택했던 한국영화가 길을 잃고 미아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더이상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항복 선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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