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2023년 한국 여름 영화에는 ‘지금’, ‘여기’, ‘현재’가 없다.”, 한국 여름영화 ‘BIG4’ 대담 2
2023-09-01
글 : 송경원

<더 문>과 <비공식작전>의 경우, 신파조차 남기지 못한

송경원 <밀수>와 <콘트리트 유토피아>가 나름 유의미한 얼룩들을 남겼다면 <더 문>과 <비공식작전>은 한국영화의 악습과 그림자를 증명한 사례가 되어버렸다.

송형국 <더 문>과 <비공식작전>은 국적과 언어만 다를 뿐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문법과 똑같다. 빅4 영화의 홍보 포인트는 <비공식작전>의 자동차 추격 장면, <밀수>의 수중 액션 같은 것들이었고 이에 따라 기사가 생산됐다. <모가디슈>의 현지 프로덕션도 같은 예다. 분명 이런 지점은 성취가 맞다. 한국영화의 제작 역량은 이제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 상징적인 예가 <헌트>다. 연출 수업을 오래 받지 않은 신인감독이 영화계의 A급 제작진과 함께 정성껏 제작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기술적 수준을 증명했다. 지난 20~30년간 한국영화가 쌓아온 자산이고 저력이다. 단 한컷의 완성도를 위해 제작진이 흘린 피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한국영화 제작 역량이 이 정도 단계에는 올라섰다는 점을 전제로, 완성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다름 아닌 제작비다. 앞서 말한 영화의 홍보 포인트들은 제아무리 제작 역량과 장인정신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못한다. 다시 말해 250억원을 들였으면 그만큼의 완성도를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최근 한국 상업영화에 대한 주류 언론의 평가가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200억원, 300억원의 투자금을 가져다 게으른 이야기를 썼거나 미국영화에서 다 봤던 걸 따라하는 수준의 결과물을 내놓았다면 보다 준엄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김소희 <더 문>은 황선우가 아버지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의 우주비행에 발탁되어 떠나는 이야기다. 그런 큰 규모의 이야기에서 인물이 성취하려는 것이 개인의 속죄뿐이다. 거기서부터 선우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선우의 죽음을 막기 위해 김재국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 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영화의 감정적 수용을 방해하는 피로도가 있다. 신파란 기본적으로 관객이 정말 인물의 감정에 이입해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문>은 신파가 아닐 수도 있다.

송경원 신파조차 되지 못했다?

김소희 그보다는 김용화 감독이 <신과 함께> 시리즈의 성공에 아직 취해 있다는 느낌이다. <신과 함께>에서 주인공 차홍(차태현)의 사연은 그가 지옥에 가지 않고 환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더 문>도 이와 비슷한 방식에서 인물 각자의 사연에 서사를 기댄다. <신과 함께>는 사연이 이야기의 흐름과 물리적인 동선에 조응했다면, <더 문>에는 이런 연결이 부족하다. 사연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연에 매달린다고 할까. 사실 <더 문>의 선우는 이길 수 없는 경기에서 고군분투하는 스포츠영화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다만 오늘날엔 스포츠 선수나 아이돌 가수가 혹독하게 훈련받고 희생해서 무언가를 이룩한다는 이야기에 감동하기보다는 불편함을 느낀다. 아이돌 출신의 배우 도경수가 <더 문>에서 고난을 당하는 상황이 주는 불편함도 같이 생각해볼 지점이다. 더는 보편적인 사연이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은 현실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전반적으로 무뎌지는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병규 <신과 함께> 시리즈 주인공 차홍에게는 차사들과 함께 다니고 각종 어트랙션을 통과하며 만들어지는 흡인력이 있었는데 <더 문>은 그럴 수 없는 구조다. 혼자 있는 선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세팅이다. ‘천만 영화’라는 목표치와 드라마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는 서사적 기획이 엇박자를 내는 것 같다. 비슷한 맥락에서 <더 문>을 비롯한 빅4가 인물들에게 사연을 부여하는 건 알겠는데, 하지만 그런 사연들이 지금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로도 기능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영화들이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거나, 과거를 연상케 하는 재난의 상황으로 이동을 강요받는다.

김소희 덧붙이자면 <더 문>처럼 영화의 스케일이 커질수록 감정의 스케일을 키우면 그것들이 맞물린다기보다 관객을 더 멀리 떨어뜨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비공식작전>은 지나치게 쿨하다. 예를 들어 민준이 왜 판수에게 자신의 비행기 티켓을 넘겨주는지에 대한 민준의 감정이 필요할 텐데, 영화는 그저 쿨한 태도로 넘어가려 한다. 정리하자면 한국영화는 과도하게 진정성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쿨하게 넘기려 하는 사이, 관객과 함께 공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스포츠영화의 실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드림>이나 <리바운드>에서 골인의 쾌감과 쿨한 유머가 통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송경원 명백한 실패이고 비판받을 지점이 있지만 두 영화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옹호해주고 싶은 면도 있다. <더 문>의 경우 기본적으로 짜깁기에 가깝지만 인물의 드라마에 집중해서 본다면 성취도 있다. 선우의 얼굴을 따라가는 힘이나 서사적인 얼개는 상투적일지언정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다만 결정적인 패착은 이게 인물 내면으로 들어가는 작은 이야기라는 거다. 만약 저예산 독립영화였다면 훨씬 조밀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이야기를 커다랗고 화려한 액자에 끼우려다 보니 마치 무시당하는 것 같은 불쾌함이 생기는 거다. <비공식작전>의 경우 만듦새 자체는 준수하다고 느꼈다. 김성훈 감독은 확실히 관객을 끌어당기는 편집을 한다. 다만 이 영화만의 개성이나 필연성이 보이지 않는다. 피랍 서사는 이미 <모가디슈>나 <교섭>을 통해 많이 소비됐고 로케이션의 볼거리도 마찬가지다. 버디 무디의 매력으로 밀어붙이기엔 하정우, 주지훈 배우의 조합이 신선한지도 잘 모르겠다. 영화 안팎으로 기시감이 너무 심해서 도리어 이거다 싶은 매력 포인트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김병규 <더 문>이나 <비공식작전>은 천만 영화를 만드는 예산과 기획이 어긋난 결과물이다. 극장 관객은 분명 달라졌다. 빅4 영화는 꼭 네편 중 하나만 고르라는 얘기가 아니고, 동시대의 여러 영화를 연달아 보면서 그 시기의 분위기를 논하는 데 적합한 접근이다.

송경원 확실히 북미에서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바벤하이머’로 마케팅한 결과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영화는 서로가 발목을 잡는 모양새였다. 경향성으로까지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인위적으로 편하게 가는 결말 탓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쉽게 지우는 듯한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비공식작전>의 결말은 그동안의 문제와 사건을 너무 깔끔하게 없던 일로 만든다. 조금의 얼룩도 없다.

송형국 <터널>은 관객의 마음을 해소해주는 상업적 장치로서 납득되는 결말이었다면, <비공식작전>의 결말은 무책임한 쪽에 가깝다.

<콘트리트 유토피아>의 경우, 정치의 부재와 현재의 증발

송경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네편 중 가장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송형국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로서 <눈먼 자들의 도시> <설국열차> <미스트> <슬픔의 삼각형>의 테마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많은 작가들의 관심이 재난 과정보다는 멸망 후로 옮겨가는 느낌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통제 불능의 자연재해와 관련한 외신 영상을 보면 지구 종말을 떠올리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다. 또 <설국열차> <콰이어트 플레이스> <아바타: 물의 길> <혹성탈출: 종의 전쟁> 등의 결말을 생각하면 미래 세대에 바통을 넘기는 방향으로 작가들의 관심이 이동한다는 인상도 받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하위 장르로 염세적 리얼리즘의 경향성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김병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두편의 영화가 겹친다. 하나는 <드림팰리스>인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드림팰리스라는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김선영 배우가 출연한다는 점도 같다. 다른 작품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다. 사회적인 재난 이후의 시간을 관측하거나 재난, 죽음, 사고가 발생한 이후의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세 작품이 비슷하다. 또 그 ‘이후’의 시간에서 인물들의 집은 안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누군가의 침입에 노출돼 있거나, 집에서 살 수 없어서 나가야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한국영화의 주요한 공간을 아파트로 설정한 맥락에서, 이전 시대의 집이 인물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최후의 안정적 내부였다면, 이제는 그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시공간을 찾아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들로 세 작품이 묶인다.

김소희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서 아파트 부흥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여주는 <행당동 사람들> 같은 다큐멘터리영화가 떠올랐다. 다큐멘터리에서 여성이 바깥과 안에서 각각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지점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역할 구분에 관해서도 영화의 시대상과 지향이 어디를 향하는가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김병규 약간 다른 맥락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앞서 전문성의 부재와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네 영화가 공통적으로 젊은 세대를 학대한다고 느꼈다. <더 문>은 황선우가 학대당하는 순간을 스크린에 전시한다. <더 문>을 보며 <태극기 휘날리며>가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앳된 소년병이 주인공이고, 전시의 폭탄은 우주의 유성우로 대체됐다. 유성우를 피하는 학대의 얼굴이 스크린에 비치면서 그것을 지구의 어른들이 보는 모양새다. <밀수>에서도 옥분이 가장 많은 학대를 당하고 상처 입는다. 이런 관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혜원은 가장 흥미로우면서 아쉬운 캐릭터다. 하필이면 잃어버린 집을 찾아서 돌아온 앳된 인물이 아파트 밑으로 떨어져서 죽는다.

송형국 혜원이 살아 있을 여지도 있지 않나. 시신을 확인시키지 않았으니까. 사실 캐릭터의 기능을 따진다면 죽어선 안되는 인물이다. 그냥 죽음으로 처리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결말이다.

김병규 그럼 다르게 표현해보자. 혜원은 왜 명화(박보영)와 함께 결말로 향하지 못할까. 가장 적극적으로 영탁에게 저항한 인물이 왜 아파트 밑으로 추락해야 했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밀수> <비공식작전> 뒤로 한국영화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90년대를 원점으로 둔 영화가 혜원을 추락시킬 때 느끼는 감정은 마치 <벌새>의 은희(박지후)가 떨어져 죽었다는 뜻으로도 보인다.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은 아파트의 모더니티와 함께한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둥이의 시체 위에 아파트가 생기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엔딩에선 여인이 시체를 목격한 후에 아파트 베란다로 향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복도식 아파트의 옥상, 복도, 지하실을 배경 삼아 연쇄 실종사건의 상상력을 개입시킨다. 이처럼 아파트 공간이 출현하면서 한국영화가 당시의 다른 표정을 만들게 됐다면, 그 질서가 무너진 폐허에서 ‘<벌새>의 은희’가 떨어져 죽는다고 느껴졌다. 90년대를 원점으로 두는 역사적 맥락, 동시에 그간의 한국영화가 역사를 마주해온 방식이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혜원의 모순적인 사용에 녹아 있다.

김소희 같은 관점에서 다른 질문도 떠오른다. 명화가 살아남은 다음 세대라고 호명할 수 있을까. 왜 명화를 다음 세대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모두가 다음을 얘기하는데 아무도 현재를 얘기하진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영화가 다른 시간대로 가는 건 현재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일까. 올여름 한국영화에 현재 세대는 없고 오로지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만 존재한다. 현 세태와 영화가 비슷한 상황이다.

김병규 어린 여자아이가 죽어야 한다는 건 한국영화의 지난 시간을 돌이킬 때 반복되는 상상력이다. <기생충>을 끝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가장 어린 여자가 희생하면서 다음 시간을 통과하는 구조다. 표면적으로 명화에게 주어진 것은 희망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영화가 아파트의 모든 인간을 전멸시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마지막에 등장한 희망의 공간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진 않았다. 어떻게 그 공간이 형성됐고 시스템이 유지됐나를 따지기보다 수평으로 쓰러진 아파트의 이미지로 답해야 할 부분을 가볍게 처리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김소희 정리해보니 <비공식작전>을 제외한 세편의 결말에서 약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를테면 <밀수>의 가장 약한 존재였던 해녀들, 우주 산업계에서 소외됐던 <더 문> 속 한국의 우주비행사 황선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명화까지. 최후엔 이타적이고 약한 존재가 살아남는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약하다’는 의미를 복합적으로 사유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송경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에 대해서는 여러 버전이 있었다. 민성이 죽지 않는 버전도 있고. 시나리오엔 명화와 같이 손잡고 나가는 장면까지도 적혀 있다. 최종적으론 명화 혼자 살아남는데,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회색빛 세계에서 살아남은 인물이 흰 쌀밥을 먹는 이미지를 원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인물들이 맞이하는 결말에 따라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게 올해 여름영화 중 유독 도드라지는 영화라는 증거인 셈이다.

송형국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보다 정치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 영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에서 다수결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 올바른 일인지, 흑과 백 아니면 설 자리를 내주지 않는 의사표현 방식이 얼마나 민주주의에 가까운지 등을 질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금애(김선영) 캐릭터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제도의 공정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믿고 행하다가 무너지는 인물이다. 투표와 규정 같은 것들을 앞세워 공동체를 이끌어가던 금애가 종반부에 이르러 산산이 부서지는 방식을 보라. 그런 점에서 극 중 투표 도구이자 흑백 논리를 상징하는 바둑돌이 영탁의 회상 장면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면 영화의 정치적 비유가 상당히 정교하게 배치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계 곳곳의 모양과 다를 것도 없다.

송경원 다음 세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해보자. 앞서 김소희 평론가가 한국영화는 현재를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현재가 없으니 다음 세대도 마치 유령처럼 투명해지거나 퇴거를 강요당하는 거 같다. 여름영화 외 더 언급하고 기억해야 할 영화가 있을까.

송형국 사실 빅4의 부진이나 아쉬움보다 그게 더 큰 문제다. <다음 소희> <비밀의 언덕>을 제외하고 잘 기억나지 않는다. 10년 전에 어떤 식으로든 반가웠던 작품은 당장 떠오르는 것만 읊어봐도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 <베를린> <숨바꼭질> <더 테러 라이브> <감시자들> <신세계> 등이 있었다. 평단을 사로잡든지 흥행에 성공했든지 기록될 만한 영화들이다. 올해는 빅4 이외에 무엇이 더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변성현과 엄태화 감독 정도를 거론할 수 있겠다.

김병규 이제 독립영화 감독들은 상업영화로 올라가려는 욕망조차 거의 메말라버린 것 같다. 영화제 상영을 통해 화제작으로 반응을 모으고 개봉까지 이어지는 유의미한 경로가 희박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게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업영화로 올라갈 수 있다는 기대가 아예 없으니 상업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영화적 실천들이 나오는 경향도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작품들을 예로 들면 극소수의 스탭으로 만든 신동민 감독의 <당신으로부터>, 유형준 감독의 <우리와 상관없이>, 1인 제작 시스템으로 만든 손구용 감독의 <밤산책>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포르투갈이나 필리핀 뉴웨이브처럼 상업적 시스템을 향한 눈짓과 아부가 없는 장편영화가 가능한 판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김소희 ‘사연’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비밀의 언덕>을 말하고 싶다. 혜진(장재희) 자매가 오기 전까지 인물들의 글짓기는 레퍼런스 대결에 가깝다. 서점에서 명은(문승아)이 여러 책을 보는 것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혜진 자매가 오고 나서는 각자가 얼마나 기구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한 대결로 전환된다. 어떻게 보면 레퍼런스 사용과 사연의 사용, 두 가지 방법 모두에서 실패해버린 2023년 한국영화의 상황이 의도치 않게 겹친다. <비밀의 언덕>은 주인공이 두 가지 길 모두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는데 한국영화는 어떤 길을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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