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세계관을 새롭게 확장하는 것을 하나의 놀이문화로 정착시킨 팬들은 문 밖으로 나가 스스로 장을 마련한다. 이들은 작품 안에만 존재하던 인물을 현실로 꺼내 살아 숨쉬게 하고, 작품이 채 다루지 않은 이야기 공백을 애정 담긴 상상으로 채워나간다. 즐거운 과몰입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팬덤의 주체적인 탐험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주인공이 어딘가 살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우리 모두가 연결된 듯한 감각을 일깨운 여섯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THE FIRST: 송태섭 생일 전시&광고
<슬램덩크> 팬들은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의 포인트가드 송태섭 생일(7월31일)을 맞이하여 갤러리 전시와 영상 광고를 진행했다. 후원자를 대상으로 펼쳐진 갤러리는 송태섭을 사랑하는 창작자들의 다채로운 2차 창작품을 내걸었다. 이들은 새로운 그림을 통해 NBA 선수로 거듭난 송태섭, 유명 잡지 화보를 찍은 송태섭 등 원작에서 볼 수 없던 농구부 소년의 미래를 빼곡하게 상상했다. 또 가족과 농구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거나 평범한 졸업식을 보내는 등 어린 시절 외로웠던 송태섭의 시간에 다정한 위로를 덧대기도 했다. 원작 만화가 가닿지 못한 인물의 미래와 과거를 애정 담긴 시선으로 재해석하면서 팬들은 작품과 자신의 연결 고리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PROJECT 720522
5월22일 정대만 생일을 맞이하여 이뤄진 광고 프로젝트로 신촌, 강남, 부산에 각각 지하철 광고가 실렸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대만의 절친인 영걸이 불꽃남자단 단장이 되어 대만이 몰래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한다는 컨셉이다. “곧 대만이 생일인데 한번 뭉치자!”는 반가운 말투로 이어지는 공지는 팬덤과 영걸이 작당 모의를 이어가는 듯한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싸이월드’ 형태로 개설된 홈페이지는 팬들의 과몰입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정대만이 실제로 미니홈피를 운영하는 듯한 일상 사진을 일러스트로 그려 올리고, 북산고 친구들과의 일촌평을 디테일하게 만든 것. 팬들의 참여도 세세하게 기록했다. 지하철 광고마다 부착된 팬들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미니홈피에 하나씩 찍어 올린 것이다. 그중 많은 팬들의 눈시울을 붉힌 편지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단 하나의 불꽃 정대만. 모두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사그라들지 않는 용기의 증표가 되어주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덕톡회
덕톡회는 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덕후끼리 만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말한다. 하나의 작품을 두고 대화하거나 작품 안의 특정 인물로 대상을 좁혀 말하기도 한다.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든 가닿고 싶은 팬들의 소박한 열망이 담긴 자리인 셈이다. 멀티버스 세계관을 지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덕톡회에선 팬들 각자의 개성 넘치는 해석과 애정 담긴 코멘트를 들어볼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호들갑 떨며 좋아할 때 그 기쁨이 배가 된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주인공 마일즈가 거주하는 뉴욕의 브루클린이 떠오르도록, 치즈 피자를 곁들이며 담소를 나눴다는 한 덕톡회의 일화도 무척 흥미롭다.
Wave: 波浪 준섭, 태섭 생일 카페
아이돌 생일 카페 문화에서 넘어온 캐릭터 생일 카페는 다양한 특전과 흥미로운 공간 구성이 매력 포인트다. 7월31일 같은 날짜에 태어난 송준섭, 송태섭 형제의 생일을 기념한 ‘Wave: 波浪’은 두 인물에게 의미 깊은 공간을 재현했다. 형의 죽음 이후 자기만의 애도 시간을 가졌던 준섭의 방과 두 형제가 각각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동굴을 그대로 구현한 것. 팬들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관객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공간에 직접 입장하면서 두 형제의 마음으로 다시금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이 지닌 함의를 팬덤의 힘으로 새롭게 분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기-마츠’ 기일 카페
기일도 카페를 차린다? 생일 카페에 익숙한 이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오는 기획은 <명탐정 코난> 팬들의 발상으로부터 나왔다. 생일 카페 아닌 기일 카페에는 근조 화환이 필수. 제단 위의 꽃은 4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날 폭탄물 해체 중 순직한 하기완 형사(하기와라 겐지), 송보윤 형사(마쓰다 진페이)의 기일 11월7일을 뜻하는 메리골드다. 케이크 디자인 역시 폭탄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반영했다. 이는 코난뿐 아니라 코난의 경찰동기조 캐릭터가 제각기 팬덤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수려한 외모로 인기를 얻은 송 형사, 그런 송 형사와 특별한 감정선을 그려낸 하 형사의 서사에 몰입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멀쩡한 생일을 놔두고 기일을 챙기느냐고? 캐릭터가 등장한 지 오래지 않아 죽는 바람에 팬들조차 생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기일에 진심인 팬들은 드레스코드를 블랙으로 맞추고 카페를 방문했고, 카페 스탭들은 왼팔에 완장을 차고 그들을 맞이했다.
<킬링 로맨스> 싱어롱
“영화 관람 중에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마음껏 불러주세요~(내 멋대로 싱어롱).” 지난 4월, <킬링 로맨스>의 과격한 미감을 똑 닮은 디자인의 안내 문구가 극장 스크린 위에 커다랗게 떠올랐다. 이어 극 중 팬클럽의 이름이기도 한 여래바래로 하나 된 관객들이 말 그대로 영화를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킬링 로맨스>는 마니아층의 입소문, 홍보를 향한 팬덤의 전투력에 힘입어 N차 관람은 물론 싱어롱 상영회까지 추진된 경우다. 팬들은 SNS를 통해 이원석 감독에게 싱어롱 상영관을 제안(“싱어롱관 열어주시면 너무 좋겠다”, “<여래이즘> 떼창하고 싶어요”), 롯데시네마가 이를 받아들였다. 싱어롱 상영회 후 열린 GV에서 이원석 감독은 트위터에서 작품을 매일 적극적으로 ‘영업’해온 또 다른 팬을 직접 찾아내는가 하면 이후 소소한 팬미팅도 가졌다. 관객 연령은 2030 여성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늦덕을 위한 덕후 용어
전프레
응모자 혹은 참여자 전원에게 지급되는 특전 상품(프레젠트). 특정 행사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희소성 때문에 전프레 유무에 따라 행사 참여를 결정하기도 한다.
온리전, 배포전
일종의 덕후 중심적 작은 박람회. 2차 창작으로 완성된 소설, 코믹스, 각종 굿즈를 구매할 수 있다. 행사에 따라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럭드
럭키 드로의 줄임말. 제비뽑기, 구슬 돌리기, 가챠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며 등수에 따라 차등적인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중독성이 강한 게 장점이자 단점.
폼림
대다수의 행사 티케팅을 ‘윗치폼’ 사이트에서 하는데, 대학교 수강 신청처럼 경쟁이 과열될 때 ‘폼림픽’이라고 부른다. 미친 듯한 광클이 주요한 성공 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