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방영된 드라마 <다모>의 팬덤 이름은 ‘다모 폐인’이다. 당시 다소 과격하게 지어진 이 명칭은 ‘폐인이 될 만큼 <다모>가 좋다’는 직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같은 해에 방영된 <대장금> 또한 ‘애호 대장금’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이 존재했다. 장금이(이영애)의 스승인 한 상궁(양미경)은 10회 만에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애호 대장금의 ‘한 상궁 살리기 100만인 서명운동’이 이어지면서 작품에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콘텐츠는 과몰입한 팬덤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이루며 성장한다. 폐인이 될 만큼 중독되었다는 사람들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드라마 열풍의 증거가 되고, 가상 인물을 사랑한 팬들은 그의 목숨을 연장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혜택은 시장 논리에도 적용된다. 과몰입한 팬이 많으면 많을수록 콘텐츠는 보다 강한 힘을 얻게 된다. 방영 회차가 늘거나 다음 시즌이 확정되는 등 제작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여년이 지난 지금, 팬덤과 과몰입은 어떤 형태로 발현되고 있을까.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SNS 플랫폼의 보편화, 좋아요 비즈니스, 나노 인플루언서를 향한 환호, 숏폼 열풍 등 현재의 다양한 현상 속에서 콘텐츠 팬덤의 과몰입이 드러나는 양상과 그 영향을 짚어봤다.
'챌린지 영상'으로 유입되는 1020 팬덤
틱톡과 릴스 등 영상 기반의 SNS 플랫폼은 디지털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데 익숙한 1020세대가 과몰입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창작할 기회의 장이 되었다. 간단한 터치만으로 영화, 드라마 O.S.T를 골라 춤을 추거나 연기를 선보일 수 있고, 기존 콘텐츠 포맷을 그대로 복사해 챌린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절차가 간단할수록 챌린지 참여의 진입장벽은 낮아지고, 따라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반응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10대 관객의 엉뚱하고 귀여운 챌린지로 힘을 얻었다. 재난의 위기가 닥쳐올 때, 문을 봉쇄해야 하는 미션을 떠안게 된 스즈메는 규슈, 시코쿠, 고베, 도쿄 등 일본 전역을 떠돌며 필사적으로 문을 닫는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긴 주문을 외우고 문을 닫는 과정이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비쳐진 것인지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문을 힘겹게 걸어 잠그는 영상 챌린지가 틱톡에서 한동안 뜨겁게 이어졌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메인 테마곡인 <すずめ>(Suzume)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영화 속 익숙한 장면을 비슷하게 구현해내기도 했다. 특히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영상 구성은 영화를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주요 포인트로 내세우며 공감대 형성의 구획을 나누었다.
이 구획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함께 챌린지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열린 문을 모두 닫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재치 넘치는 발상은 SNS 10대 이용자들이 챌린지를 계속 이어나갈 명분이 되었다. 10대 사이의 <스즈메의 문단속> 열풍을 체감한 교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중간고사를 대비하여 교무실 문 앞에 붙여둘 ‘교무실의 문단속’ 포스터를 공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CJ CGV에서 진행한 ‘2023 CGV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 발표에 따르면, 틱톡 챌린지가 이어지던 2월부터 4월, <스즈메의 문단속>의 역주행과 N차 관람 영향으로 1020세대 관객 비중이 큰 폭으로 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챌린지 열풍으로 과몰입을 이끌어낸 작품은 <최애의 아이>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로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사리나는 모두 최애 아이돌인 아이의 쌍둥이 자녀 아쿠아와 루비로 태어나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두 아이는 아이의 연예계 활동을 응원하며 평온하게 살아가지만 믿을 수 없는 사고가 벌어지면서 살인사건 범인 찾기라는 극적 반전을 맞이한다. 아이돌 산업의 빛과 그림자를 선명하게 대조시킨 <최애의 아이>를 두고 사람들은 다소 모순적이게도 극 중 걸그룹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챌린지를 시작했다. 이 챌린지가 박차를 가한 건 실제 아이돌들의 참여가 이어지면서다. 아이브 장원영, (여자)아이들 소연·미연, 르세라핌 은채 등이 <최애의 아이>를 따라하면서 팬들은 작품 속 아이에게 열광했던 고로와 사리나의 입장과 마음을 되새기게 된다. 이 현상에서 눈에 띄는 점은 아이돌 챌린지로 인해 <최애의 아이>를 잘 모르던 이들까지도 작품에 유입된다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2D와 3D의 입체적인 교차가 인상적이다. 진짜 최애의 <최애의 아이> 챌린지라는 액자식 구성의 제목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영상들은 작품 안팎을 거울처럼 연결하면서 과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원작 세계관을 현실로 끌어낸 애정
챌린지가 기존 프레임을 따라하는 것이라면 직접 기획과 구성, 큐레이션까지 나서 과몰입 콘텐츠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2030세대는 유튜브에 플레이 리스트를 직접 만들었다. ‘정대만을 몇번이고 되살리는 플리’, ‘그의 드리블처럼 Groovy한 송태섭 플레이리스트’, ‘바보가 셋이나… <슬램덩크> 바보 트리오 플리’, ‘Rukawa Mix’ 등 극 중 인물의 성격과 유닛의 분위기에 맞춰 노래를 선곡해 플레이 리스트 콘텐츠를 만든 것이다. 주전이 아닌 인물을 다루기도 한다. ‘저 녀석도 3년간 열심히 해온 녀석이다, 안경 선배 권준호 플리’ 등 영화가 주요하게 다루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노래를 통해 공백을 채운다. 송태섭의 경우 힙합 곡목이 주를 이루거나 서태웅의 경우 로파이가 많은 등 인물별로 팬들의 캐릭터 해석을 눈여겨볼 수 있어 재미가 크다. 특히 서태웅 플레이 리스트에서는 “원작 만화에서 믹스 테이프를 들으며 자전거 타고 등교할 때 어떤 노래를 들을지 늘 궁금했는데. 이렇게 알게 되니 기쁘다”라는 댓글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새로운 ‘떡밥’이 없다는 완결작의 서글픈 숙명에도 팬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상상해내면서 놀거리, 즐길 거리를 창조해냈다. ‘2023 CGV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가장 높은 N차 관람률을 보인 작품은 28.6%를 차지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다. 개봉 후 9개월에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는 영화 바깥에서 부지런히 세계관을 확장하고 파고드는 팬덤의 과몰입이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