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것처럼>
웨이브, 왓챠 ▶▶▶▶▶
한때 인간의 고유한 역량으로 간주됐던 인지작용은 이제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기기의 자동화된 역학으로까지 분산됐다. 동시대 감독들이 현실의 재현을 회피하는 이유는 인간화된 주체의 의지와 욕망을 토대로 경험의 형식을 구조화하는 관습적 극작술이 그런 시대를 담는 데 불충분한 도구이기 때문일 테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그런 한계를 일찍이 돌파했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시급한 걸작이다. 핸드폰, 자동차, 전자레인지 등 온갖 사물이 빚는 시청각적 물성이 영화적 현실의 지분을 당당히 점유하는 이 작품에, 상실된 2010년대의 시공이 근사하게 구현돼 있다.
<우리도 사랑일까>
웨이브, 왓챠, 티빙 ▶▶▶▶
좀더 어렸을 때엔 엉뚱한 몸짓과 괴상한 수다로 가득한 <우리도 사랑일까>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 까닭 모를 기호들이 사랑이라는 사건의 본질에 근접한 활동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사랑의 순간은 명확한 논리로 해명할 수 없지만, 현전하는 강렬한 실감만으로 존재론적 정당성을 얻어가는 말과 몸짓의 매혹적 인상으로 가득하다. “오직 인상만이 마주침의 우연성과 효과의 필연성을 자기 안에 겸비하고 있다.”(질 들뢰즈) <우리도 사랑일까>는 사랑에 빠진 연인이 오직 그들에게 고유한 언어와 기호를 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일본 곤충기>
왓챠, 티빙, 웨이브 ▶▶▶▶
대지를 기는 곤충은 시대를 부감하는 성찰적 자의식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가 포착한 인간 또한 그런 존재다. <일본 곤충기>는 근현대사의 질곡을 통과하는 하층민 도메의 삶을 그린다. 주된 역사적 사건이 다큐멘터리적 질감으로 망라되지만, 시대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여인은 세계를 서사가 아닌 사실의 집합으로 체험하며 표표히 소요할 뿐이다. 허식으로 가득 찬 역사의식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는 내 삶을 해명해줄 의미를 마련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진창을 들여다 봐주는 예술의 존재를 갈구하는 법이다. 부박한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에게도 위안이 돼줄 작품이다.
<노스탤지아>
왓챠, 웨이브 ▶▶▶▶▶
고르차코프는 시종 뒤를 돌아본다. 물끄러미 돌아보면 거기 작별한 연인의 미소가, 지나온 시간의 조각이 우수 어린 빛깔로 점멸한 후 사라진다. 그러나 불가역적인 기억이 지나가면, 이제 돌아와 불확실한 현재를 견뎌야만 한다. 그렇기에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인물에게는 한 걸음을 내딛는 행위가 그토록 버거운 일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한 채로,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연약한 현재의 실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채로, 모든 불가능성을 시인한 채로 우리는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노스탤지아>는 그 운동을 향한 신념에 모든 것을 내거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