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이유 있는 딜레마, ‘거래’ 유승호
2023-10-10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새 출발을 하고 싶은 어떤 절박함이 있는 거다.” 유승호는 <거래>의 준성을 그렇게 묘사했다. 배우 자신의 인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웃을 때면 사정없이 휘어지는 반달눈과 소년 같은 미소는 여전하지만, 표정을 거두고 난 유승호의 얼굴엔 무엇이든 쉽게 담판 짓지 않으려고 고민하는 인간의 우수가 묻어나온다. 5살에 데뷔해 31살이 된 지금, 유승호는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택한 배우의 일에 여전히 혼란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어느새 해사한 얼굴 뒤에 걸린 짙은 그림자를, 중후하게 나이 들 미래를 궁금하게 하는 배우가 됐다. KBS 사극 <꽃 피면 달 생각하고>(2021) 이후 첫 OTT 시리즈에 진입해 30대의 새 행로를 개척 중인 유승호를, <봉이 김선달>(2016) 이후 7년 만의 <씨네21> 인터뷰로 만났다.

- 이정곤 감독의 전작 <낫아웃>에서 정재광 배우가 보여준 반골 기질의 이미지가 <거래>의 준성에게서도 느껴진다.

= 처음 의상 피팅을 할 때만 해도 좀더 머리가 길었었는데 감독님과 상의 끝에 밀었다. 나도 이정곤 감독님에게 감독님 영화의 주연들은 혹시 머리를 다 깎아야 하는 거냐고 물은 적 있다. 내가 떠올렸던 건 군 생활을 할 때 실제로 본 고참들의 모습이었다. 어떤 이들은 밖에 나가서 새 인생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머리를 확 밀어버린다. <거래>는 어쩌면 그런 준성의 다짐이 무너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배우 유승호의 꾸미지 않은 모습이 제대로 보여졌으면 했다.

- 준성은 처음에 납치의 주동자가 아니라 수동적인 공모자로 합류한다. 도덕적 갈등으로 흔들린다는 점에서 관객을 안내하는 인물인데, 어떻게 바라봤나.

= 준성이 관객과 작품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도 수행하는 캐릭터라는 데 동의한다. 한편으론 이 남자가 참 바보같이 느껴진다. 돈도 가져가고 친구도 지키길 바란다는 게.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지만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떻게든 좋게 해결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나는 그런 아이러니에 최대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역할이었고. 준성이 종종 겉보기와 달리 심성이 여린 애처럼 보인다면 그건 바로 그렇게 헤매는 모습, 어쩔 줄 모르는 모습 때문이 아닐까.

- 또래의 세 남자배우들이 함께한 <거래>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 아역 시절부터 어른들과 작업해오는 쪽이 익숙했고 그래서 <거래> 현장은 신기할 정도로 즐거웠다. 불안도 따라왔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일하는 사이로서 존중해야 할 선을 넘지 말자는 게 내 지침이었다.

- <거래>의 유승호는 30대의 유승호가 보여줄 깊어진 얼굴을 더 기대하게 한다.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나.

= 워낙 어리게 보는 분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나는 이 모든 문제가 30대가 되면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30대, 무조건 30대를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마주해보니 환상과는 다르더라. 시간은 많은 걸 도와주지만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지금의 기분은 실망감에 가깝다. 주변의 멋진 선배, 형들을 보면서 허황된 남성성을 갈구한 걸까. 욕심이 너무 컸던 걸까. 하여간 지금의 나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뿐이다.

- 오늘 대화하는 내내 몸에 밴 자기 의심과 엄격함 같은 게 느껴졌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들뜨지 말자고 스스로를 더 주저앉힌 시간도 있었을 것 같다.

= 부모님의 교육도 있었고 옛날 현장 특유의 분위기가 한몫했다. “반듯한 배우가 되어라”라는 말. (웃음) 그런 내가 답답한데 반대로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상한 샛길로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춘기 때는 확실히 힘들었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가진 배우들이 부러울 때도 있는데 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내가 가진 망설임이나 신중함, 확정 짓지 않은 채 펼쳐놓은 고민들이 인터뷰 지면의 활자로 옮겨졌을 땐 곧잘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사람처럼 비치기도 하더라. 그래서 한동안은 내 진짜 얘기를 하지 않기도 했다.

- 유승호란 배우를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늘 물어보고 싶었다. 아역배우 중에서도 이른 데뷔다. 그래서인지 대학 특례입학 거부나 이른 군 입대 등 사생활이 유독 많이 입에 오르내린 면도 있다. 미담이긴 하지만.

= 고작 5살이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서 일을 시작한 거다. 그 당시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만큼 더한 진실은 없다. 외모가 귀여웠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 그럴듯한 보수가 주어졌다. 그 나이에 꿈이나 뜻이 있었다고 말하는 건 조금…. 차라리 나는 경찰, 소방관 같은 직업을 동경하는 평범한 애였다. 그래서 내 인생의 절반은 실은 이 직업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질문들을 처리하는 데 쓰였다. 어중간하게 학업과 연기를 병행하느니 둘 중에 확실히 좀더 나다운 것을 택하고 싶어서 배우의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현장이 무서운 한편 군인의 일에는 동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일찍 갔다. 이제 10년 가까이 지나 하는 말이지만 군대 들어간 지 3일 만에 밖에 나가서 연기하고 싶었다. 관심도, 괴롭힘도 있었다. 내가 내 직업을 긍정하고 이왕이면 더 제대로 해보자고 스스로를 채근하게 된 건 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난 이후부터다.

- 훌륭한 고양이 집사로 알려져 있다. 쉬는 동안 유승호의 생활은 어떻게 꾸려지나.

= 한동안 여러 스포츠에 빠졌지만 다 접었다. 고양이 털 정리에서 시작한 일이 지금은 나를 집안일 전문가로 만들었다. <거래> 홍보가 시작되기 전 2주간 내리 혼자 집에만 있었는데 지루하지 않고 오직 안정과 행복을 느꼈다. 청소, 밥하기, 설거지, 분리수거. 수련처럼 그걸 반복하면 된다. 가끔 마음이 복잡할 땐 멀쩡한 것들을 이리저리 뜯어내 쓸고 닦고 청소한다. 아무래도 난 무언가 계속 닦아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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