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한국영화박물관 기획 전시 <씬의 설계: 미술감독이 디자인한 영화 속 세계> 류성희, 조화성, 한아름 미술감독과의 대화
2023-10-27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영화미술이란 무엇인가

류성희 미술감독. <헤어질 결심> <아가씨> <암살> 등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았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기점으로 해외에서 정립된 개념이다. 그 이전에는 아트 디렉터라고 불리던 직군이 인물과 서사, 의상, 로케이션 등을 광의적으로 총괄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전체 프로덕션을 디자인하는 사람, 즉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한국영화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연출부에서 세트 및 소품 등을 함께 맡는 것이 관례였지만, 1992년 아트 디렉션 시스템을 도입한 <그대 안의 블루>가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인정받으면서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충무로에 프로덕션 디자인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한편의 영화를 시각적 의미로 해석하고 영화 전체의 외양, 즉 비주얼과 룩을 총괄함으로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세계관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영화의 시각 기호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학 시절 도예를 전공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노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릇의 본질은 찰흙으로 만든 벽체가 아니라 그릇이 담고 있는 내부 공간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본질 역시 무엇이 담기느냐다.” 이를테면 <아가씨>의 세트를 만들 때 삼면 벽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고자 하는 무드가 무엇인지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획 전시 토크 프로그램에 참석한 류성희 미술감독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의 방을 만들 때는 이방인 서래가 가진 고독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바다, 산 등을 벽지에 표현해 무드를 담아낸 것은 결국 서래의 고독함을 담기 위함이다. 배우는 대사로 이야기를 하지만 비주얼 스토리텔링은 직접 이야기되지 않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미술 작업을 할 때는 ‘이들은 사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공기를 만들고 싶었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인물과 공간이고, 전자에는 의상과 분장 등이 포함되며 후자는 세트 혹은 실제 로케이션이 될 수 있다. 원론적으로는 촬영 및 조명까지도 아울러야 한다. “슬픈 감정을 전달한다고 하면 인물, 벽지, 소품 모두가 슬픈 무드를 만들기 위해 배치되어야 한다. 여기서 벽지가 너무 현란하면 자칫 배우보다 배경이 먼저 관객에게 말을 걸어서 영화의 맥을 끊을 수 있다. 이른바 연결을 맞추는 작업도 모두 미술에 포함된다.” 한아름 미술감독 역시 자신의 역할을 “시각적인 요소에 있어 최종 책임자”라고 설명한다. “CG가 부족한 부분도 결국 나에게 책임을 묻는다. (웃음) 미술감독은 단지 도면만 만들어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감재와 소품을 디테일하게 보는 일까지 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수정 및 보안을 위해 감독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거나 예산 관리 역시 프로덕션 과정에서 그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영상 인터뷰와 <아가씨>의 스토리보드, 컨셉 디자인, 세팅 일정표, 세팅 평면도 및 플랜. 3D 그래픽 모델링 작업 과정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번 기획 전시에서는 신별 스토리보드와 데커레이션 보드를 상세하게 만나볼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의 집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소개하는 공간.
<한산: 용의 출현> 프로덕션 디자인을 완성하기까지 조화성 미술감독이 준비했던 이미지 맵과 컨셉 디자인. 3D 그래픽 모델링은 보다 구체적인 결과물을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의 본질은 협업, 소통이 중요하다

조화성 미술감독. <콘크리트 유토피아> <한산: 용의 출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았다.

미국영화연구소에서 영화미술 석사과정을 밟은 류성희 미술감독은 당시 학교에서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여럿이 모여서 한다는 것이며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많이 싸웠다. 미술 전공자는 난데, 내가 보기엔 늘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선택을 하는 거다. 그때 지도교수님이 ‘이렇게 하면 더이상 학교를 다니기 힘들다’고 하는 거다. 충격받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가도 남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대중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비주얼을 총괄하는 미술감독은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조명감독, VFX 슈퍼바이저까지 다양한 스탭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자리다. “예전에는 무조건 내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많이 다퉜다면, 지금은 당장 할 일과 그다음에 할 일을 구분하려고 하며 양보할 것은 양보하려고 한다. 무작정 논쟁할 것이 아니라 설득을 위해 다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미술감독 지망생들을 위해 영리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팁을 공유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준비한 미술을 모두 공유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가 당황할 때가 있다. 다만 감독이 직접 언급한 내용은 무조건 기억하고 적어놔야 한다. 그 부분을 간과하면 나중에 틀어질 수 있다. 연출자가 선호하는 것들을 반영한 다음에 자기 것을 해나가야 한다. 대신 감독의 마음에 들 수 있게 정말 잘해야 한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바꾸고 싶은 부분에 대해 의견을 전할 때 어떤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예전에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림과 함께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감독의 귀가 열릴 때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원활한 설득이 되지 않으면 조감독이나 프로듀서를 통해 또 한번 아이디어를 전해야 한다. (웃음)”

영감을 얻는 법

기획 전시 토크 프로그램에 참석한 조화성 미술감독.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의 컨셉 디자인을 구상할 때 제인 오스틴 원작의 시대극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평소 아티스트가 쌓아둔 인문학 지식 혹은 콘텐츠 감상은 영화미술의 아이디어를 얻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내가 영화 일을 하는 이유는 소통을 위해서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전시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과 보다 잘 교류하기 위해 요즘 힙하다고 얘기되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찾아본다. 음악도 많이 듣고, 유튜브 영상도 많이 본다.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을 재밌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즐거워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스스로가 많은 것에 노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화성 미술감독 역시 “창의적 영감을 얻기 위해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등 닥치는 대로 어마어마하게 보고, 50대 중반이지만 아이돌 그룹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 평소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봐두어야 진부한 레퍼런스를 찾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카페 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카페를 레퍼런스로 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찾아온 이미지를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 좋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시나리오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분야에 지식을 쌓고 여행이라든지 색다른 경험을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시각언어를 설계하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영화미술은 그냥 혼자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해석하는 능력이 무척 중요하다.”

좋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한아름 미술감독. <길복순> <킹메이커> <1987> 등의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았다.

영화는 특정 감독이나 배우만의 예술이 아니다. 촬영감독, 조명감독, 의상감독의 예술이기도 하며 이들의 공을 인정해 걸출한 상을 수여하기도 한다. 이번 기획 전시에 참여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로 칸영화제 벌컨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미술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볼 때 ‘미술이 좋았다’고 인지하는가. 이를테면 류성희 미술감독의 <올드보이>는 현실성을 거세하고 표현주의적인 미술을 감행한 작품이다.

<킹메이커>의 컨셉 디자인 및 스토리보드
한아름 미술감독의 영상 인터뷰와 <길복순>의 컨셉 디자인 및 세팅 플랜.

“영화미술을 잘할 수 있는 솔루션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쉬운 길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고 싶을 수 있다. 박찬욱 감독님 같은 분을 만나면 좀더 모험을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도전이 영화를 망쳐서는 안된다. 미술감독의 시도가 영화를 방해하지 않고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탁월하게 해내서 감정을 증폭해서 가져간다면 그것은 실패하지 않는 디자인이다. 작품에 따라 튀지 않고 무난한 미술이 더 적합한 경우도 있다.”(류성희 미술감독) 조화성 미술감독은 장르에 따라 미술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언급했다. “잔인한 액션영화의 경우 짧은 시간에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 드라마나 멜로의 경우 공간에 캐릭터의 삶을 담아낼 수 있다.” 심지어 조화성 미술감독은 주인공이 이 집에서 몇년 동안 거주했으며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에 따라 벽지와 가구가 달라질 수 있다고 계산한다. 그는 “미술감독은 어떤 의미에서 셜록 홈스나 프로파일러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했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킹메이커>에서 김은범(설경구)의 목포 선거 사무실 세트를 만들 때 디테일한 서류까지 만들어 서랍에 채워넣었다. 그래야 영화 속 상황을 진짜처럼 받아들이며 조·단역 연기자들까지 극에 몰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좋은 영화미술은 영화의 무드를 조화롭게 조성하면서, 구체적인 대사가 말해주지 않는 캐릭터의 인생과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단지 세트나 소품의 미감과 존재감이 아닌 광의의 의미로 영화의 미술을 이해할 때, 영화 전체를 보는 시야도 더 넓어질 수 있다.

기획 전시 토크 프로그램에 참석한 한아름 미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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