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12·12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회는 어떻게 신군부가 되었나
2023-11-23
글 : 김수민 (시사평론가)

1979년과 1980년. 한국 현대사에서 ‘핵심 권력의 전면적 교체’와 ‘독재 체제의 연장’이 동시에 이뤄진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차례 다뤄진 것은 당연하다. 1980년 5·18을 그린 영화는 <꽃잎>(1996) 이후 여러 편이다.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 사건을 재구성한 <그때 그 사람들>(2005)이 개봉한 지도 18년이 넘었다. 그런데 1980년 12·12를 집중해서 다룬 영화는 <서울의 봄>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TV드라마에서 10·26, 5·18과 함께 다뤄진 수준이었다. 절대 권력이 기습적으로 붕괴된 10·26은 묘한 뒷맛을 남긴다. 5·18의 경우는 잠시 악마적 권력이 승리했지만 시민 항쟁이 영원한 승자로 새겨졌다. 영화화 자체로 애도의 의미가 있고, <스카우트>(2007), <26년>(2012)처럼 가상 인물을 내세워도 당대 민주 시민에 대한 헌사가 된다. 반면12·12는 독재 권력이 새롭게 태어나 출발한 사건이므로 관객에게 주로 분노와 불편을 안길지 모른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군인끼리의 투쟁이라 평범한 보통 시민을 개입시키기 어렵고, 기록만 따도 타임라인이 빽빽하므로 상상이 들어설 여지가 작아 보일 수도 있다.

12·12는 이제 더욱 오래전 사건이 되었고 관객들이 받을 스트레스도 크게 줄었다. 다만 다들 뻔히 결말을 알고 있다는 난점은 더 커졌다. <서울의 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여러 방증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실존 인물인 최규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관해 형성됐던 대중적 이미지에 비해 최한규는 강단 있고 노태건은 터프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정승화 체포 재가를 두고 버티던 최한규는 신군부에 굴할 때 뒤끝을 남긴다(실화다). 전두광의 친구 노태건은 중간중간 격하게 동요하지만 고비고비에서 전두광 이상의 추진력으로 쿠데타를 밀어올린다. 이들은 당시의 체제와 환경이 신군부에 그저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표현한다. 이것은 영화적 과장으로 치부할 수 없다. 아무리 유리한 구도에서 일으킨 반란이라고 해도 “실패하면 반역”인 이상 쿠데타 세력도 극도로 긴장하는 법이다. 실제 12·12 가담자 군상은 다양했다. 반란 본부에 들어오고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거나, 반란을 지지하면서도 병력 동원은 기피하거나, 자축 파티가 시작된 뒤에야 도착하는 군인이 있었다. 영화는 종반부 전두광의 행동거지에 반란군의 내면을 응축시켜두었다.

하나회의 불안과 오만이 야기한 것은

신군부가 군권의 주요 부위를 진작에 장악한 것이 어떻게 반란의 성공으로 귀결되는지는 영화가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관객이 가질 만한 큰 의문은 ‘그렇다면 신군부는 그 이전에 군권을 어떻게 장악했는가’일 것이다. 10·26 이전 박정희 권력은 철옹성이었다. 박정희 본인이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뒤이은 쿠데타의 가능성을 철두철미하게 분쇄했으리라는 추정은 누구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5·16의 주역이었던 해병대의 힘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남산의 부장들>(2020)에서도 조명되었듯 박정희는 자신의 지척까지도 분할해서 지배했다(devide and rule). 그럼에도 박정희 질서, 즉 박정희의 권력 유지 체계는 어떻게 해서 박정희 사후 곧장 신군부에 접수되는가. 박정희 주위 여러 인물들이 막강한 권세를 누리다가 효용이 다하면 배제되었던 것이 신군부의 밑바탕이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는 그 속에서 더욱 강하게 살아남았다. 12·12를 배태한 것은 5·16이었고, 그 이후 장기 독재가 12·12를 육성했다.

1961년 5·16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60만 대군의 0.6% 정도인 3600여명이었다. 5·16은 사전에 계획이 새어나갔는데도 사망자 없이 성공한 쿠데타이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은 기습적인 성공이 역공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가졌다. 거사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병력의 지지가 절실했고, 일단 대세가 기울었음을 웅변해줄 지원군이 필요했다. 5·16 직후 쿠데타 주체는 육군사관학교를 압박한다. 군의 미래를 짊어질 생도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젊은 장교들이 운집한 곳이다. 육사 교장 강영훈은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5·16에 놓인 첫 문턱을 제거한 주인공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ROTC 교관 전두환 대위다. 전두환은 5월16일 오전 8시부터 육사 11기 동기인 이동남과 함께 육군본부에서 동창생들을 만나며 누가 혁명 주체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5월16일이 저물기 전에 박정희가 주도자임을 알아채고 혁명에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육사 11기에 박정희-김종필은 낯익은 선배들이었다. 육사 11기인 손영길은 육사 2기 박정희의 부관이다. 전두환도 5·16 직후 육사 8기 김종필에게 “왜 중대한 일을 하면서 연락하지 않았냐”고 직접 물어볼 정도였다. 5월18일 오전, 전두환의 주도하에 육사 생도와 졸업생 장교를 합쳐 1천여명이 서울에서 5·16 지지 행진을 펼친다. 신호탄이 터지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쿠데타에 얹혀가기로 하고 명목상 최고 지도자로 이름을 올린다.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도 5·16 지지 시가 행진을 벌인다.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에 발탁된 데 이어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부임한다. 이 직책은 12·12 당시 그가 맡은 보안사령관직과 수미상응을 이룬다. 인사와 정보를 맡는다는 것은 상관과 선배도 조회 내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1950년대 박정희의 출세 코스와도 닮았다. 전두환이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는 박정희의 권유를 고사한 이유는 자명하다. 군에 남는 것이, 남는 장사였다.

쿠데타의 주력군이 아니었던 육사 11기가 곧바로 전면에 부상한 원인은 육사 역사에 나온다. 1946년 개교 이래 초기 입학자인 1~9기는 주로 광복군·일본군·만주군 등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건군이 시급하기도 해서 반년도 안되는 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었다. 1949년 2년제 교육과정이 도입되었을 때 입학한 10기는 절반 가까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1952년 도입된 4년제 교육에 처음 들어선 것이 육사 11기 생도 200명이다. 전쟁 이후에 임관한 덕에 희생되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는 행운까지 누렸다. 그들에게 쿠데타의 상비군 자리가 돌아갔다.

주전 선수가 은퇴하면 신인이나 후보 선수가 비집고 갈 여지도 커진다. 5·16 세력 내부의 쟁투가 치열해지고 패자들이 줄줄이 퇴장한 것이 육사 11기의 앞길을 연다. 가령 박정희-김종필 세력이 장도영을 축출할 때 그를 ‘반혁명’ 혐의로 체포한 장교가 노태우였다. 이들 11기 정치 군인이 1961년 말에 만든 것이 각 구성원을 ‘별’로 지칭한 ‘칠성회’이며 칠성회가 확대된 것이 ‘하나회’다. 하나회 꼭대기의 육사 11기는 ‘우리가 진짜 육사 1기’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들과 나이 차가 크지 않지만 고위직을 꿰차버린 육사 8기를 질시했다. 이들의 초조함과 오만은 두 차례의 중대 사건을 부른다. 하나는 무려 16년 전 12·12를 예고한 1963년 7·6 거사 시도였고, 그다음은 윤필용 사건이다.

박정희에서 시작된 역사의 굴레

5·16 세력이 군정을 종식하고 민간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이끄는 민주공화당 창당 추진파와 당시 현직 중정부장 김재춘(육사 5기)이 지원하는 이른바 범국민정당 운동이 부딪힌다. 후자는 그 무렵 일어난 증권파동 등 4대 의혹 사건을 공화당 창당 자금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간주하고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전자를 맹렬히 수사한다. 그러나 1963년 6월27일 증권파동 연루자들에게 무죄판결이 떨어지며 저울추는 다시 김종필과 공화당쪽으로 기운다. 이때 노태우, 손영길을 위시한 육사 11기 사이에서 김종필계 인사 40여명을 7월6일경 체포하자는 시나리오가 피어난다. 육사 8기에 막혀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불만이, 박정희에게는 충성하되 그 아랫선인 김종필 라인 일부를 타격하는 ‘친위 쿠데타’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김재춘이 노태우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이 사건을 수사했던 방첩대장은 공교롭게도 훗날 12·12에서 체포되는 정승화였다). 전모를 파악한 이들은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고, 박정희도 처음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직접 지목하며 구속하라는 방침을 내렸다. 그러나 김재춘이 ‘실행하지 않았다’, ‘허술한 계획이었을 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감싸자 박정희는 어쩐 일인지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가고 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3년에는 윤필용 사건이 터진다. 유신 체제가 들어서던 1972년 가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은 사석에서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박 대통령은 노쇠했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것이 박정희 귀에 들어가면서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윤필용을 낱낱이 수사했고, 윤필용과 가까웠던 육사 11기의 손영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나회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강창성은 이 군내 사조직을 발본색원하려 했지만(이런 악연 탓에 그는 후일 전두환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는다), 이번에도 박정희와 경호실장 박종규는 전두환을 비호한다. 동기인 손영길이 몰락하는 바람에 전두환이 하나회에서 갖는 리더십은 되레 훨씬 더 강력해진다. 왜 박정희는 하나회 인사들을 아끼고 전두환 등을 싸고 돌았을까.

시간과 공간, 두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박정희는 육사 2기로 임관해 11기와는 아홉 기수나 차이가 났다. 박정희는 1917년생이고 하나회 주도자들은 1930년 전후에 태어났으니 연령상의 차이는 더 벌어진다. 박정희에게 하나회 세대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박정희의 경계심을 부추긴 것은 바로 아랫선이나 나이 차가 적은 후배들이다. 하나회는 오히려 저들을 견제하는 데서 박정희에게 유용했다. 둘째, 박정희가 권력을 굳히는 과정에서 영남 인맥이 부상했다. 여당 공화당에서 김종필을 억눌렀던 김성곤이나 백남억 같은 정치인들부터 ‘티케이’(대구경북 출신)였다. 하나회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도 대구에서 성장한 티케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을 때도 지역 구도는 선거의 뼈대였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출신 지역은 인맥과 파벌의 형성에서 가장 큰 변수였다.

박정희가 1979년 생전 마지막 해에 단행한 조치들도 전두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정희는 전시나 계엄 상태에서는 보안사령부가 중정과 검찰, 경찰 등 모든 수사 권력을 통제하도록 제도를 바꿔놓았다. 마침 육군 제1보병사단장 시절 북한이 판 제3땅굴을 발견한 공적에 힘입어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올라섰던 때였다. 보안사 권력을 강화한 박정희의 조치에는 전두환에 대한 신임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보안사령관이 된 전두환은 뜬금없이 전문가에게 ‘과외’를 받으며 경제 공부를 한다. 그가 학습한 철칙은 ‘물가와 통화의 안정’으로, 박정희 정부가 오래 견지하던 국가개입주의보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펴는 시장만능주의에 가까웠다. 아무리 전세계 경제 기조가 뒤바뀌는 상황이 확연했다 해도, 하필 전두환이 그 준비를 했다는 것은 소름 돋는 대목이며 누가 이 공부를 기획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이즈음 전두환 위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그가 절대 충성해야 하는 박정희, 전두환보다 후생이지만 5·16 주역으로서 먼저 출세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등. 그런데 김재규가 나머지 둘을 살해하고 그로 인해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넣음으로써 10월27일부로 전두환에게는 거칠 것이 별로 없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5·16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사조직 하나회가 돌출되었을 때 박정희 정권이 이를 뿌리째 솎아냈거나, 박정희가 대통령을 두어번만 하고 안정적으로 후임자에게 권력을 이양했다면, 신군부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12·12와 5·18의 발포 주체는 전두환 신군부지만 그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18년간 단련시킨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가 죽기 직전 일어난 부마항쟁을 되짚어보라. 사태가 더 악화되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입장이었다. 5·18을 부마항쟁과 갈라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망한 이후에도 신군부를 받쳐준 박정희 시대의 관성은 결코 은폐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역사기념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뚜렷하게 차별 대우하고 있다. 우리는 신군부가 박정희의 상속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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