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가족, 어린이. 평범한 일상을 가리키는 세 키워드는 박홍준, 오정민, 김다민 감독이 각각 선택한 소재다. 세 감독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 속에서 익숙한 나머지 놓치고 말았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박홍준 감독의 <해야 할 일>은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해고 통보를 전해야 하는 인사과 직원의 비애를 보여준다. 비껴갈 수 없는 차가운 현실을 묵묵히 버티는 현대인의 얼굴을 느낄 수 있다.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대가족의 동상이몽을 다룬 <장손>은 오정민 감독의 사회비판적 위트와 온기가 잘 드러난다. 세대 갈등과 가족이 감춘 미스터리를 비밀스럽게 담아낸다. 마지막으로 어린이 주인공 동춘이 바라본 현실을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그린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사교육의 무게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통통 튀는 상상력 속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의식을 짚어낸다. 경콘진의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을 통해 세상에 나온 세 영화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각각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해야 할 일>), KBS독립영화상(<장손>), 오로라미디어상(<장손>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등을 수상했다. 보편성 속의 다양성을 발견하는 세 감독에게 창작 활동을 지속하게끔 하는 요인을 물었다.
- 세 감독 모두 경콘진의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을 통해 영화가 탄생했다. 지원 당시 작품의 어떤 점을 장점으로 내세웠나.
김다민 나는 제작지원 사업 이전에 경기 시나리오 기획개발지원 사업을 먼저 거쳤다. 이런 경우 가산점이 주어지고, 1차 심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2차 심사로 넘어가는 이점이 있다. 2차 면접에서는 제작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는지, 부족한 예산은 어떻게 조달할지 등에 관한 물음에 현실적인 답변을 했다.
박홍준 나 또한 비슷하다. 영화가 실제로 제작될 수 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지원서를 쓰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에도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의 경우, 촬영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후반작업 비용이 모자라 지원받으려 했기 때문에 상황적으로 유리한 지점이 있었다.
오정민 <장손>은 사연이 많은 작품이다. (웃음)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에도 6번 만에 붙었고, 경콘진의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지원도 어렵게 받을 수 있었다. <장손>은 여름부터 겨울까지 장장 6개월을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이 긴 촬영 기간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완성 가능성을 궁금해하신 듯하다. 배우도 10명 이상 등장하기 때문에 인력을 정밀하게 점검해야 했다. 단순히 열정과 패기만을 보여선 안되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 각 작품은 관객들이 보편적으로 느낄 만한 감정을 다루면서도 다양성을 반영했다. <장손>은 가족관계에서의 세대적 다양성을 풀어내고 <해야 할 일>은 일터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현실을 통해 사회의 다양성을 재고한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어린이들이 느끼는 불만을 배경으로 어린이 세대의 귀여운 저항 정신을 담는다. 이를 포함해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들을 이야기해준다면.
오정민 나는 영화를 통해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경험하길 바라서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즐기면 좋겠다. <장손>은 대가족을 다루는 만큼 세대별로 각기 다른 특성이 담겼다. 그래서 관객마다 이입하는 인물도 다를 것 같다. 또 각자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 돈은 진짜 누구 것인지 나만의 답을 내려보면 좋겠다.
박홍준 노동문제를 다룬 기존 영화 대부분은 해고당한 사람들 입장에서 서술된다. 그 또한 의미 있지만, 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조금 더 많은 입장을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을 해고시켜야 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인사팀 직원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했다. 그게 <해야 할 일>이 지닌 특징이자 차별점이라 생각한다. 똑같은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진 ‘해야 할 일’을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김다민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SF라는 점에서 장르적으로 다양성을 꾀했다. 또 그동안 사교육을 메인 주제로 다뤄온 콘텐츠 대부분은 아이들이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떠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에서는 자기 할 일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담았다.
- 각 작품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먼저 대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장손>은 가족의 전통을 드러내는 미술적 장치들이 눈에 띈다. 공간별, 소품별로 인물의 특성을 반영하는 등 프로덕션에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오정민 집을 찾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들었다. 최종적으로 합천에서 찾았고, 그에 따라 모든 로케이션을 합천 집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집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집에 대한 자부심이 크셔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며 호의적으로 안내해주셨다. 두분이 한평생 사신 공간이라 그 안에 시간이 묻어나는 소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일본어로 적힌 오래된 선풍기와 카세트 같은 것들.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미술 장치에 공을 들이는 게 한편으론 억울하다. 티가 하나도 안 난다. (웃음) 그래도 재미있었다. 제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미술팀 모두가 우리 집에 모여 전을 부쳤다. 명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웃음)
- <해야 할 일>은 가상 기업인 한양중공업을 배경으로 구조조정에 직면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현실적인 면면들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별도의 취재를 진행한 듯한데.
박홍준 별도로 취재한 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부산에 있는 중공업을 4년 반 동안 다녔기 때문이다. (웃음) 게다가 인사팀 출신이었다. 다만 내 경험에만 한정되어선 안되기 때문에 자료조사는 꼼꼼하게 했다. 다른 회사들은 구조조정을 실행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고, 또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노동법 관련 자료도 열심히 찾아봤다. 이전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너무 악인으로 그리거나 너무 의롭게 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는 한편, 균형을 잡는 데 가장 공을 들였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주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많이 받았고 촬영 과정에서는 배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소재부터 독특하다. 발효되기 시작한 막걸리가 꼬마 동춘이에게 모스부호를 전한다는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문화센터에서 막걸리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김다민 영화 연출부 일을 할 때 작품이 끝나면 쉬는 텀이 생겼다. 그때 구청 문화센터에서 전통주 만들기 수업을 들었다. 하루는 누룩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문득 그 원리가 궁금해지더라. 일단 이게 첫 번째 아이디어였다. 또 우리 집 앞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학원 버스가 학교 앞에 줄지어 서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평범한 풍경을 보는데 문득 이 두 아이디어를 합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주인공인 동춘이는 사실 어른스럽다기보다 혼자만의 세계가 강한 친구다. 어른들이 만든,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을 영화 속에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엉뚱하고 서툴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 나이대의 어린이를 보여주고자 했다.
- 영화 창작자로서 제작비 지원사업이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나.
박홍준 사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지원사업이 없으면 아예 제작 자체가 어렵다고 본다. 시장 논리로 보아도 독립영화에 투자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원사업이 더더욱 절실하다. <해야 할 일>은 부산영상위원회와 한국영상위원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촬영은 마쳤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후반작업 비용이 나오질 않더라. 그러던 와중에 경콘진으로부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간절함이 더 컸다.
오정민 많은 고민이 드는 질문이다. 독립영화를 단순히 상업 논리로만 보면 투자 가치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파이가 커져야만 궁극적으로 상업영화까지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예술영화를 통해 새로운 영화인이 태어나고, 그들의 동료들이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주변에 능력 좋은 동료들이 무척 많다. 그런데 지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규모의 작품밖에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은 어디서 기회를 얻고 경험을 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나는 앞으로 지원사업의 규모가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영화로라도 경험을 쌓아보라고 장려하는 건 무의미하다. 규모 있는 영화를 만들 자리를 통해 영화 제작과 대중을 더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김다민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제작이 확정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투자 관점에서 어린이가 주인공인 영화는 대중성을 담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업성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장르 특성상 CG 분량도 컸기 때문에 상당한 투자금이 필요했다. 그땐 내가 컴퓨터 학원에 가고 싶을 정도였다. (웃음) 다행히도 영화진흥위원회와 인천영상위원회의 도움을 받고 경콘진의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에 오르면서 영화를 마지막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에서는 어린이 주인공을 환영해주는 분위기라 감사한 마음이 컸다. 지원사업이 더 활발해지고 규모가 커져야 한다는 생각엔 나도 동의한다. 자본이 넉넉해야 다양한 시도를 여유 있게 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