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추모] 문예영화의 길을 연 모더니스트, 고 김수용 감독의 작품 세계
2023-12-08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갯마을>과 <안개>로 한국영화의 품격을 높인 감독 김수용이 지난 12월3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련된 장르 해석과 과감한 예술적 모색, 그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절묘하게 균형을 찾아내며 한국영화의 현대성을 성취한 감독이다. 195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여러 장르를 탐색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최전선에서 이끌었고 1970, 80년대의 불황기에는 굴하지 않고 더 특별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1958년부터 1999년까지 40여년간 모두 109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긴 그는 단연코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성실했던 감독이다.

1928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김수용은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발발로 입대해 대구에서 영어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피난도시에서 연극과 영화를 접하며 예술적 기초를 다진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1954년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되면서 영화와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필름을 만져본 적도 없었던 그가 군의 홍보영화를 만드는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재능을 발휘한 대목이 더 흥미롭다. 2012년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채록(연구자 권용숙)을 통해 밝힌 바에 의하면, 나중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박정희가 5사단장이던 시절 홍보영화를 의뢰했는데 바로 김수용에게 작업이 떨어졌다. 이때 만든 첫 단편이 영화의 러닝타임과 영화 속 시간이 똑같이 흐르는 재기발랄한 영화 <10분간 휴식>이다. 군에서 그는 10여편의 영화를 찍은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 과정에서 영화과에 소속된 각 분야 기술 스탭들과 함께 작업하는 행운도 누렸다. 그들은 바로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궤도에 오르고 1960년대의 황금기를 열도록 만든 주역들인데, 그로서는 훗날의 전성기를 가능하게 했던 팀워크를 미리 다진 셈이다.

<침향>

제대로 영화를 배우고 싶었던 그는 두달간의 휴가를 얻어 극영화 <배뱅이굿>(감독 양주남, 1957) 촬영 현장에 조감독으로 참가한다. 복귀하면서 당시 과장이던 선우휘(소설가)에게 “군영화는 지금부터 좋아질 겁니다”라고 호언한 그는, 무용가 김백봉 주연의 <조국찬가>, 엄앵란 주연의 <해뜨는 마을>, 김보애 주연의 <윤중사의 수기> 같은 40분짜리 중편영화들을 연이어 선보였다. 결국 영화인들의 눈에 들어 극영화 감독으로 나서게 되는데, 데뷔작 <공처가>(1958)는 <배뱅이굿>에서 본 제작자의 손실까지 만회하는 흥행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충무로의 신예감독 김수용은 군복무를 하면서도 1959년 <3인의 신부> <청춘배달> 두편을 더 연출했고, 자신의 코미디영화 감각이 확실히 관객들에게 통하는 것을 보고 전업 영화감독의 길을 결심한다. 이후 그는 <구봉서의 벼락부자>(1961) 같은 코미디 장르뿐만 아니라 멜로드라마와 사극, 홍콩과의 합작영화까지 안정된 연출력은 물론 제작자의 무한 신뢰를 받는 감독으로 커리어를 전개했다.

제작자들이 좋아한 감독,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김수용이 충무로의 중요한 감독으로 인정받으며 영화 매체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즈음이다.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초기 대표작으로 꼽는 <굴비>(사운드 필름 유실)와 <혈맥>이 개봉된 해다.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은 한국영화의 시각화 작업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원작은 해방 직후 일제가 파놓은 남산 방공호가 무대였지만, 감독은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중턱에 여러 채의 판잣집을 오픈 세트로 지어 피난민 마을을 재현했다. 여기에 김승호와 조미령을 위시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앙상블이 얹히며 한국 현대사를 다층적으로 반영시킨 걸작이 되었다. <혈맥>에서 하층민의 자식으로 분한 신성일·엄앵란 콤비를 같은 해 <청춘교실>에서는 상류층의 신세대 대학생으로 등장시킨 대목에서는, 그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영화 감각과 더불어 청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기대를 엿보게 만든다. 이후 김수용은 문예영화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호현찬(<만추>(1966)의 기획자)과 함께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갯마을>이 흥행뿐만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인정받은 것이다. 1960년대 초반 한국 영화산업은 100편대로 갑자기 늘어난 제작편수를 맞추기 위해 급한 대로 일본 영화잡지에 실린 시나리오를 표절하고 번안하는 것으로 돌파했는데, 이미 예술성을 확보한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식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챙길 수 있음을 제시한 이가 김수용이었다.

<안개>

같은 해 이윤복 수기 원작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국제극장 한곳에서만 28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1위를 차지했고, 다음해 이광수 원작으로 남정임을 데뷔시키고 일본 로케이션 촬영까지 감행한 <유정>(1966)은 국도극장 단관에서만 32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시 흥행 1위를 차지했다. 1967년 김수용은 10편이나 개봉시키며 창작력의 정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중에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천승세 희곡 원작 <만선>, 차범석 희곡 원작 <산불>, 김승옥 소설의 현대성을 모더니즘 영화로 승화시킨 <안개>, 일선교사 수기를 영화화한 <사격장의 아이들>, 김동리 소설 원작의 <까치소리>가 포함돼 있다. 충무로영화계에 관한 생동감 있는 기록이자 자기반영적 영화인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일본 소설 원작으로 흥행 톱10에 올린 <빙점>도 같은 해 선보인 작품이었다. 1968년 그는 고아 축구팀 실화를 영화화한 <맨발의 영광>, 그의 조감독 출신 이원세 감독(1940~2023)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수전지대>, 태창흥업 주문의 일본 로케이션 작품 <일본인> <동경특파원>, 문예영화 <분녀>(이효석 원작) 등 9편을 연출했고, 1969년에도 이청준 원작의 <시발점>과 김유정 원작의 <봄봄> 같은 그만의 인장이 새겨진 문예영화 필모그래피를 늘려가는 한편 조감독 나소원이 시나리오를 쓴 <주차장>, 정연희 원작의 <석녀> 같은 작품을 통해 여성 주체의 에로티시즘 미학도 탐구했는데, 전자는 윤정희가, 후자는 문희가 열연했다. 1960년대 내내 김수용은 주어진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연출하며 최선의 성과를 냈고, 일본 로케이션까지 매번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제작자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홍콩을 거쳐 미국에서 영화적 돌파구를 찾다

<시발점>

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가 불황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김수용은 적게는 2편에서 많게는 6편까지 여전히 창작력을 유지하며 그만의 돌파구도 모색했다. 이미 <손오공>(1962)으로 홍콩영화계를 경험한 그는 쇼브러더스의 러브콜을 받아 <와와부인>(娃娃夫人, 1972) <우중화>(雨中花, 1972)를 연출했고, 합작영화 얘기가 나온 미국 LA로 건너가 홍콩에서 번 돈으로 100일 동안 체류하며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포함해 모두 145편의 영화를 섭렵하고 귀국했다. 이 짧았지만 강렬한 휴지기가 1970년대 중후반 김수용의 영화 세계를 확장시켰던 것 같다. 특히 일련의 김수용적인 에로티시즘 영화, <야행>(1974년 제작, 1977년 개봉), <극락조>(1975), <화려한 외출>, <화조>(1978) 등에서 뉴 시네마 스타일을 자기화한 영리한 영화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들을, <안개>로 시작된 김수용과 윤정희(1944~2023)의 공동 작업으로 펼쳐본다면 우리는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용 역시 영화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동료 감독들처럼 당국의 검열과 부대끼고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검열 서류의 문장을 빌리면 “퇴폐적이고 지나친 정사 장면이 너무 많아” 기어코 10분 이상 잘라낸 <야행>에 그친 문제가 아니었다. 버스 안내양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고발한 1981년작 <도시로 간 처녀>의 경우 영화를 완성한 6월부터 지난한 검열을 받은 것도 모자라 12월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한국노총과 운수노조의 압력으로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걸레스님이라 불린 중광의 기행과 일대기를 다룬 <중광의 허튼소리> 역시 조계종의 압력으로 장면을 삭제하고 완성한 작품이 심의에서 또 가위질을 당해, 결국 김수용은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981년부터 청주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고, 1989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문화예술계의 어른으로 공인받았다. 1995년 다시 메가폰을 잡고 <사랑의 묵시록>(1997년 일본 개봉)을 연출한 후 1999년 <침향>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2003년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고,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그가 직접 고른 27편으로 가장 큰 규모의 회고전을 열었다.

<혈맥>

김수용 감독에 관한 중요한 사실 일곱 가지

1. 실제 생년월일은 ‘1928년 2월3일’로, 부고 기사들에서 알려진 ‘1929년 9월23일’은 호적상 기록이다.

2. 고인은 한국전쟁 중 제주도 근무를 기점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고 한다.

3. 생전의 그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작품은 <갯마을>과 <안개>다.

4. 신성일·엄앵란 콤비의 <청춘교실>로 청춘영화 붐을 일으켰지만, 당시 다른 청춘영화처럼 일본영화 시나리오를 표절한 각본으로 연출하지 않았고, 더이상 만들지도 않았다.

5.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원작으로 동성애 영화를 의도한 <시발점>은잘 알려지지 않은 필견의 작품이다.

6. 영화 제작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오로지 연출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작품 <침향>만 예외다.

7. 내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새롭게 발굴한 김수용의 작품을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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