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전쟁’과 맞붙다, ‘이순신 3부작’ 최종장 <노량: 죽음의 바다>이 역사영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
2023-12-29
글 : 임수연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김윤석)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장군이 아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가야만 하는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정복할 야욕을 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몸이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는구나. 천하의 꿈이여. 꿈속의 꿈이로다.” 7년간 지속됐던 임진왜란의 마지막 남은 명분이 사라지면서 그는 철병 명령을 내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각을 세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커지면서 본국에서도 굳이 실패로 판정난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어지고 있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과 인도였다. 그는 임진왜란 초기 이른바 정명가도,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이 길을 빌려 달라는 명분을 내세운 바 있다. 그 과정에 있는 조선이 무너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파견된 군사들이 있었다. 명량해전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한 진린(정재영)은 조명연합군이 서로 갈등을 겪지 않겠냐는 조선 내부의 우려와 달리 이순신의 접대와 성품에 탄복하여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다. 조명연합수군에 봉쇄당해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왜군 선봉장 고니시(이무생)는 철병 명령이 자신에게 가장 늦게 전달된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도가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그의 심복 아리마(이규형)는 진린을 찾아가 퇴각로를 열어 달라고 요청한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이미 이순신은 전투에서 여러 업적을 세웠으며, 정치적 이유를 위해서 더욱 빨리 퇴각해야 하는 왜군과 굳이 싸우는 것은 서로의 출혈만 가속화할 뿐이다. 이순신은 광해를 시기하는 세력이 있으니 현 수군 병력을 최대한 유지해서 광해를 도와야 한다는 서찰까지 받는다. 사회가 혼란한 만큼 전쟁 이후의 정치까지 멀리 내다봐야 한다는 입장은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다. 진린이 고니시의 뇌물을 받고 결국 봉쇄를 풀어준 것은 그가 탐욕스러운 배신자여서라기보다 실리를 추구한 결과다. 이미 많은 동료들이 전쟁으로 희생된 상황에서 패전한 왜적을 물량 공세로 치는 것은 그리 이성적인 결정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의 숭고한 희생에 집중할 수 있었던 영화가 왜군과 명나라 수군들의 정치역학관계에 1시간 가까이 되는 분량을 할애하면서까지 이순신의 선택이 왜 일반적이지 않은지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성을 초월한 영웅의 선택을 기꺼이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영화다. 전쟁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셋째 아들은 왜군의 손에 살해당하며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죽음에 내몰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는 죽기 위해 일부러 전투를 강행한 것일까. 진린 역시 이를 첫 번째 가설로 고려해보지만 진짜 답은 영화에 직접 발화되지 않은 두 번째에 있다.

극 중 이순신은 ‘완전한 항복’과 ‘섬멸’을 강조한다. 침략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똑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은 이순신이 원하는 만큼의 완전한 굴복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300여년 후 한국은 일제강점기라는 국가적 치욕을 당하게 된다). 단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이라기에는 이순신이나 조선군 입장에서도 명백한 피해가 예상되는 전투였다. 고니시는 열도로 돌아갔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최소한 이순신을 죽여야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고 왜군 최고 지휘관 시마즈(백윤식)를 설득한다. 이순신처럼 뛰어난 지략가가 어물쩍 철병하는 척 위장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 왜군의 진짜 속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전작들과 달리 승전의 쾌감보다는 전쟁의 허무함과 비극성에 집중한다. 유일한 야간전이었다는 태생적 특성상 규모보다는 절제의 연출을 지향하기도 하고, 승패와 무관하게 양쪽 모두 목숨을 잃는 참극이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특히 조선과 명의 군사들과 왜군이 치열하게 육체적으로 맞붙는 백병전을 롱테이크로 비추며 그저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싶은 병사들의 간절함을 목도하는 이순신의 공허한 얼굴은 그가 맞서고 싶었던 진짜 상대는 ‘전쟁’ 그 자체였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의 몇몇 장면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고지전> 같은 반전(反戰)영화의 대표 시퀀스들이 상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기가 만들어진 이래 전쟁이 없었던 역사가 전무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순신의 갈망은 12척의 배로 130척의 왜군을 상대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이순신에게는 조선과 명, 왜적 모두의 출혈과 명나라 수군 부도독 등자룡(허준호), 항왜 군사 준사(김성규), 심지어 자신의 목숨도 바쳐야 할 정도로 풀기 어려운 숙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웅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소식을 지연하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부터 완전했다기보다는 7년간 전쟁을 치르고 동료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리더의 가슴에서 완성된 신념일 것이다.

때문에 이순신의 신념이 전쟁 그 자체의 종결을 향해 있었다는 확인과 장엄한 마무리는 <명량> <한산: 용의 출현>에서 보여준 영웅의 뛰어난 지략과 용렬함이 지닌 본질도 돌이켜보게 한다. 영웅의 전술과 리더십, 용맹함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채우려고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소모전을 막기 위해서 필요하다. 승전은 희열만을 남겨서는 안되며 더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약탈과 침략, 전쟁 자체의 섬멸을 향해야 한다. ‘이순신 3부작’의 최근작으로 올수록 일본이나 명이 단순히 맞서야 할 적이나 빌런처럼 묘사되기보다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지닌 이기적 주체로 묘사되는 것 역시 점점 영화의 본질이 승리와 복수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현재 진행형인 시대에, 이순신의 신념을 설득하는 ‘이순신 3부작’이 마무리된 것은 역사영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과연 현대인들은 실리보다 이상을 고집하는 장군의 북소리에 얼마나 응답할 것인가. 그것이 곧 탐욕과 이기심으로 불거진 크고 작은 전쟁이 필연 조건이 된 현대사회에 관한 논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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