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은 영화 인생 27년 동안 단 세편의 사극에 출연했다. <신기전> <역린>에 이어 오랜만에 출연한 사극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그는 난생처음 외국어 연기에 도전하고 실내 세트가 남해 한가운데인 것처럼 상상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권태에 빠졌지만 그럭저럭 적응해 살아가는 현대인의 얼굴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던 배우가 고도로 계산된 세트에서 정석적인 연기를 요하는 작품으로 돌아온 것은 낯설지만 반가운 변신이다. 이순신과 함께 조명연합함대를 이끄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이순신을 진심으로 존경하지만 국가와 개인의 실리를 계산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 <역린> 이후 오랜만의 사극 출연이다. 김한민 감독과 작업한 적은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 사적인 자리에서 몇번 뵀지만 작품을 같이할 기회는 없었다. <한산: 용의 출현>이 끝날 때쯤 연락이 왔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 스포일러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하며 읽었는데 드라마가 너무 좋았다. 앞의 두편은 승리의 통쾌함이 담겨 있었다면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장군의 신념과 의지가 담긴 작품이라 먹먹했다. 이순신 장군의 편에서 읽을 수밖에 없으니 진린 캐릭터에게도 자꾸 화가 났고. (웃음)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 없이 마지막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런데 중국어로 연기를 해야 하지 않나. 그때부터 고행길이 시작됐다.
- 임진왜란을 다룬 여러 픽션에서 접한 진린은 그리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을 배신했다며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그의 입장이 훨씬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던가.
= 진린에 대해 알아가면서 여러 매체에서 묘사됐던 폭력적인 탐관오리 같은 면은 극히 일부분을 확대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라면 진린은 한미연합군의 해군사령관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일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명나라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진린은 광둥성이라는 작은 마을의 말단 관리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공적을 쌓은 후 도독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이도 직급도 더 높은 데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노야’라고 높여 부를 만큼 인간적인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이순신이 위대한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한 안목과 가치관을 지닌 것이다.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각로를 열어줄 때 실제로는 이순신과 상의했었다는 문헌도 남아 있다.
- 매일 4~5시간씩 수개월간 중국어를 연습하며 준비했다고. 하다 보니 외국어 연기 요령도 생기던가.
= 전혀 생기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연습해도 10~20년씩 중국어를 공부한 사람들처럼 중국어를 구사할 순 없다. 발음이나 성조가 어색하더라도 자신감 있게 연기하며 감정을 잘 담아낸다면 단점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해상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화는 조선과 명, 왜의 서로 다른 욕망을 보여준다. 이 부분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게끔 배우로서 의식한 부분이 있나.
= 사실 그것은 연출의 영역이다. 배우는 그 신에만 충실하려고 한다. 그런데 전반부의 전개는 영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타이타닉>도 배가 침몰하기 전 드라마가 있었기 때문에 후반부가 더 감명 깊은 것 아니겠나. 그런 과정이 있어야 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북소리가 더욱 와닿을 수 있다. 스펙터클한 재미를 위해 시작 20분 만에 전투가 펼쳐진다면 감정에 설득력이 떨어져 오히려 영화가 더 지루해질 수 있다.
- 이순신은 물론 자신까지도 희생당할 수 있는 전투를 고집한다. 실리를 추구하는 진린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의 굳은 신념을 존중하며 돕기로 결심한다.
= 이순신을 회유하고 싶었지만 ‘못 말리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진심을 따른 것이다. 이순신은 몇백년 만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의지와 용기와 성품과 지혜를 가졌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를 합친 듯한 인물 아닌가. 자신이 투옥됐을 때 어머니가 배를 타고 오다가 배 안에서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했겠나. 나였다면 이런 나라에서는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며 명나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오늘 감옥을 나왔다”고 단 한줄만 적었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 실제 물 위에서 촬영한 신이 없다. 녹색 스크린이 가득한 세트에서 전투 장면을 연기해보니 어땠나.
= 3D 콘티에서 본 것이 눈앞에 있다고 상상하며 연기해야 한다. 크로마키를 볼 때 배우들의 시선을 디테일하게 맞춰야 하는 것도 처음에 적응을 잘 못했다. 직접 공기를 맞으면서 연기하는 게 아니다 보니 라이브성은 좀 떨어졌지만 덕분에 할리우드식 ‘마블’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 (웃음) 그리고 매신을 연기할 때 고도로 집중해야 했다. 눈앞에 진짜 전투가 펼쳐지고 있다고 스스로가 믿지 못하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
- 정재영 하면 어딘가 시큰둥한 표정이 떠오른다. 배우만의 호흡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절묘하게 흡수된다. 그런데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순신이라는 명장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의 모든 요소가 조율되어 있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가 최대한 지워져야 한다.
= 배우들은 릴랙스를 해야 할 때와 텐션을 가져가야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는 텐션을 없애고 가장 편안한 모습을 보여줘야 리얼리티가 산다. 반면 <노량: 죽음의 바다>는 고도의 집중력과 텐션이 필요하다. 배우가 긴장을 풀면 오히려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이러한 정통 사극에서 진린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배우가 절대 장난 치면 안된다. 배우로서 집중력을 다시 한번 올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작품이다.
- 드라마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미치지 않고서야>에서 보통의 직장인을 상당히 리얼하게 연기했다. 연기를 업으로 하는 배우 입장에서 교차되는 지점이 있던가.
= 사실 이 일은 회사원들의 업무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렇게 간접경험을 하다 보면 결국 다 공통점이 보이더라. 영화계에도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누군가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싶어서, 혹은 예술을 하기 위해서 영화 일을 하지 않나. 그런 것처럼 단지 돈을 벌고 싶어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자아실현이 목표일 수도 있는 거다. 깡패나 건달 역할을 하기 위해 실제 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과 생활했을 때도 그들이 일부분 직장인 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 대중에게 처음 각인됐던 <킬러들의 수다>가 22년 전이다. 그간 영화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떤가.
= 그 세월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한 50년은 해야지 영화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 지나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막연하게는 사랑이든 열정이든 식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가. <노량: 죽음의 바다>는 배우 인생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된 경험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각오로(웃음) 앞으로 열심히 배우 생활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