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이두용에 관한 끝나지 않은 질문들, 이두용 영화의 굴곡은 지금도 왜 유의미한가
2024-02-14
글 : 김소미

<최후의 증인>은 어떻게 전설이 되었나?

<뽕>

1982년, 남산 밑,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 시사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두 남자가 충격에 빠진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막 영화계에 입문한 강우석 감독과 20대의 철학도 박찬욱 감독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최후의 증인>에 관한 경외 가득한 소문을 퍼뜨린다. 류승완, 오승욱 감독 등이 이들의 후일담을 듣고 <최후의 증인>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궁리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1980년 11월. <서울의 봄>에 담긴 일촉즉발의 하루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이두용 감독은 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보다가 그냥 나와버린다. 2시간46분으로 마감편집한 영화가 100분짜리로 난도질되어 있었으므로. 이후 그는 <최후의 증인>을 잊고 살아간다. 절망할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같은 해 3월에 <우산속의 세 여자>가 개봉한 이후였고, 연말에는 영화 <쌍웅> 개봉을 앞두고 있었으며 동시에 <귀화산장> <피막> 작업을 준비해야 했다. 1970년대에 이미 짧으면 2주 만에 영화를 완성하기도 한 이두용 감독에게 <최후의 증인>은 이례적으로 10개월 이상 프로덕션을 진행한 영화라는 점이 쓰라릴 뿐이다. 어쨌든 스토리보드를 장악하는 판단력과 직관이 따라주지 않으면 밀어붙이기 힘든 속도의 작업은 이후에도 내내 이어진다.<최후의 증인>은 살인사건을 하달받은 우울한 형사 오병호(하명중)가 겨울 저수지를 떠돌며 어느 양조장 주인의 죽음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살인 피해자가 실은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악행을 저질러온 인물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나는 동시에, 한국전쟁이 낳은 가해와 피해의 정체성으로 엮인 인물들이 뒤섞인다. 감독 스스로 영화의 ‘어두움’을 예고하고 ‘인간 보호’라는 주제를 내거는 오프닝 타이틀은 선언적이고, 주인공 또한 죄의식의 그물망에 연루되어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엔딩은 비정한 이미지로 매듭짓는다.

영화제 출품 심사용으로 1982년에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최후의 증인> 최종편집본이 비공개 상영되었을 때, 운 좋게 합류하게 된 학생 신분의 박찬욱 감독은 덕분에 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경험을 하고 만다. <최후의 증인>이 일반에 공개되고 블루레이와 DVD까지 나오게 된 데에 암묵적으로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인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임권택이라는 거장, 일찍 전성기를 맞이한 김기영,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인 이만희. 이 세 사람 외에 한국영화에 누군가가 더 없을까 한참 궁금해하며 목말라 하는 시기가 있었다. <피막>과 <최후의 증인> 이후에 극장 개봉작으로 걸린 <해결사>까지 보고 나서 엄청나게 뿌듯했다. 한국에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나도 해볼 수 있을까 고민할 때 진정 큰 힘이 되었다.”(<최후의 증인> 블루레이 오디오 코멘터리 중)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이 온전한 필름을 복원한 뒤 <최후의 증인>을 일반에 공개했고 서울아트시네마도 이두용 감독을 초대했다. 2009년에는 <돌아온 외다리>가 복원되었다. 2008년부터 2012년은 이두용에 대한 재발견·재조명의 움직임이 특별전이나 회고전의 이름으로 이어진 시기였다. 2019년,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열린 시네마테크KOFA 특별 상영 프로그램 ‘나의 친애하는 한국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은 이런 말도 보탠다. “<최후의 증인> 속 오병호 형사의 비극적인 죽음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것이 <공동경비구역 JSA>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1970년대 태권영화는 그저 흥행을 위한 장르였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이두용 감독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가 1970년에 데뷔한 감독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언젠가 2024년에 데뷔한 감독을 서술할 때에도 유효한 레토릭일 수 있을까? 어느 분야나 초심자가 피어나기 어려운 냉혹한 시대가 왔다가 물러가고 또다시 찾아온다. 한국영화에서 1970년대가 그랬다. 다만 이두용에겐 빛나는 첫 르네상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었다.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 정진우, 김수용 등이 꽃피운 1960년대 한국영화의 도제 시스템 속에서 매섭고 유능한 조연출로 먼저 이름을 알린 그였다. 현장에서 다진 구력으로 우선 업계에 뛰어들기로 한 그는 신파 멜로드라마 <잃어버린 면사포>로 시작해 1972년까지 단 2~3년 만에 무려 12편의 기획영화를 연출했다. 시스템의 요구에 응하는 그저 그런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어느 부부>처럼 당대 멜로드라마의 흐름 안에 있으나 상투성에서 탈피해보려 시도한 흔적이 돋보이는 영화도 있다. TV 도입과 함께 침체기에 접어든 영화산업은 73년에 유신영화법이 도입되면서 작품이 가위질당하거나 현장이 중단되고 감독이 검찰로 불려가는 크나큰 두려움으로 더욱 숨죽였다. 암흑이 짙어진 무렵임에도 이두용 감독은 자기 영화의 개척가를 자처하고 나섰다. 모두 1974년 영화로 기록된,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속 돌아온 외다리>가 이때 나온 이른바 ‘태권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짝패>의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닿는, 1960년대 홍콩 영화산업을 이끈 쇼 브러더스 액션영화들과 차별화를 꾀한 한국형 액션영화들에 관해 이두용 감독은 스스로 양가적인 입장을 취한다.

흥행이 절실한 극장업자들의 요구에 떠밀려 2~3주에 한편씩 영화를 찍어내는 양산 행위에 일조했다는 자조감, 동시에 만주 웨스턴과 홍콩 무협에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한국영화의 대안을 개발해냈다는 자부심이 1970년대의 생존자였던 그의 내면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다. 흥행 감독이라는 명성이 곧 부상으로 주어졌다.

훗날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도 액션 장르에 대한 그의 애착은 확고했다. “할리우드처럼 프랜차이즈화가 가능한 킬러 콘텐츠로서의 캐릭터 액션영화가 필요하다거나 이소룡, 성룡, 브루스 윌리스류의 액션영화나 수많은 B급 액션영화들이 한국 영화산업의 저변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하곤 했다.”(오동진 영화평론가) 류승완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준비하던 무렵, 이두용 감독은 그에게 “여성이 활약하는 액션영화를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2024년인 지금, 한국 액션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착지였던 이두용으로부터 한국영화는 얼마나 멀리 나아갔나. 마석도라는 존재감 강한 캐릭터가 두드러지는 <범죄도시> 시리즈, <악녀>와 <마녀> 시리즈, <길복순> 등이 나온 현재 이두용 감독의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일까? 그러나 지금 한국영화에서 액션은 장르가 아니라 요소다. 근래 남다른 밀도와 속도감을 지닌 복도 액션 신으로 회자된 장면이 해녀들의 활극을 표방한 류승완 감독의 <밀수>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더불어 동시대 액션영화가 로컬영화로서는 무색무취에 가깝다는 사실도 길 잃은 액션영화의 현재를 보여준다. 아이코닉한 캐릭터인 마석도를 떠올릴 때 배우 마동석의 육중한 신체성 외에는 영화적 몸짓으로 기억되는 액션이 없다는 실패 지점도 뚜렷하다. 물론 <범죄도시> 시리즈가 묘사하는 밈화된 인물과 심도 얕은 풍경이 그 자체로 오늘날의 한국이라고 인정한다면 누군가는 이것을 최선이라고 할 것이다.

영화감독은 산업과의 타협 속에서도 쇄신할 수 있을까?

<해결사>

태권영화가 저급한 2, 3류 영화로 취급받고 고락을 함께한 무명 및 비전문 배우들(날것의 하드한 액션을 위해서 그는 체육관에서 배우를 캐스팅하기도 했다)이 ‘으악새 배우’로 폄훼되는 분위기에 이두용 감독은 절치부심했다. 트럭 뒷자리에 모여 앉아 서울의 흙길을 달려 뚝섬, 잠실 등의 허허벌판으로 향하곤 했던 동료들에게 진 부채감을 토로한 적도 다반사다.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상영회에 이 시절 액션 배우들을 초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두용 감독이 소개하는 모습을 본 후배 감독들은 감동했다. 한편 오승욱 감독이 <영화천국> Vol.8에서 밝힌 <해결사> 관람 경험(“원래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신이 들어가 있고, 감독의 이름조차 제멋대로 갖다 붙인, 무참하게 훼손된 영화였다”)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 수입업자들의 만행으로 그의 영화가 멋대로 편집되거나 크레딧까지 갈아끼운 채 유통되는 열악한 환경도 견뎌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과 더불어 이두용의 ‘외다리’, 배우 차리 셸(한용철)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무장해제> <사생결단> <아메리카 방문객>을 끝으로 액션영화의 시기가 마무리된다. <무장해제>는, 이 영화를 통해 한국식 마셜아츠를 발견한 할리우드 프로덕션이 이두용 감독에게 샘 존스, 린다 블레이어 주연의 <침묵의 암살자>(1988)의 메가폰을 건넨 계기점이 된 영화다. 잘 알려진 대로 이두용은 이로써 할리우드에 진출한 첫 한국인 감독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신파 멜로드라마에서 태권영화로의 이행을 마치고 액션 장르에 고착된 자신의 쓰임새를 염려한 이두용 감독은 민간신앙과 샤머니즘,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무대로 장르의 저변을 개척해나간다. <피막>으로 198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특별감독상을 수상하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1984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한국 최초로 진출하면서, 흥행용 액션영화만을 만든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작가감독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채 진사 집 머슴 윤보(신일룡)와 그의 아내 길례(원미경)가 길례를 강간하려는 채 진사를 죽이고 함께 도망치는 것이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도입부다. 이어지는 전개는 지금 보아도 기이한 매혹을 품고 있다. 이두용 감독은 도망자 신세가 된 길례의 황망한 얼굴을 비춘 다음, 윤보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세도가 집안의 망자와 혼례해 열녀문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던 길례의 어린 시절을 마치 분절된 악몽처럼 편집했다. 거침없는 플래시백과는 또 다른 형식으로 일면 빙의나 환각의 순간처럼 호러적인 기운까지 부여했다. 배경음을 제거하고 스산한 바람 소리 속에서 서술되는 이 대목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만다라처럼 이어붙인 <거울>(1974)을 차용한 듯 야심차다. 부분적으로나마 영화적 내러티브에 대한 이두용 감독의 작가적, 테크니션적 실험 정신을 짐작할 수 있는 연출이다.

<뽕>은 에로영화인가?

<속 돌아온 외다리>

이두용 감독의 영화 세계는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초분>을 기점으로 쇄신해, <경찰관> <최후의 증인> <피막>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장남> 그리고 <뽕>이 나왔고 이들 영화의 숏에는 시대의 공기를 낚아채려는 감독의 기민함이 서려 있다. 윤삼육 작가와의 호흡이 당시로서는 “흥행하는 영화와 작품성이 있는 영화는 다르다”고 믿었던 이두용 감독이 양쪽을 오가도록 돕는 교각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에 다녀온 주목할만한 성과가 당대 감독에게는 제작 여건의 양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씁쓸한 현실도 엿보인다. 이두용 감독은 사전 대본심의제 도로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며 몇 차례나 반려당한 끝에 마지막으로 태흥영화사의 허가를 받아 <뽕>을 만들 수 있었다. 제5차, 6차 개정영화법으로 제작 자유화의 바람이 불기 직전의 일이다. 선정성이란 무엇인가 고뇌하던 시절의 문제의식을 이두용 감독은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스칸디나비아쪽 나라들은 성 표현에는 관대해도 폭력에 대해선 엄격해서 총구 클로즈업은 불가능했고, 대만은 여자가 겉옷도 벗을 수 없었으나 목이 잘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은 괜찮았다.” (<이두용 영화-나의 연인 60>)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제약은 <뽕>에 미묘한 에로티시즘과 토속적 아름다움, 여성 캐릭터에 보다 과격한 욕망을 심는 결과로 이어졌다. <뽕> 시리즈가 주는 강력한 에로영화로서의 인상 이면에서 이두용 감독은 장면화의 경지가 절정에 오른 베테랑 감독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우수외국영화부문(현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오른 <내시>와 이어지는 <뽕> 시리즈는 이두용 감독이 직접 두성영화사를 설립하여 제작한 작품들이다. 이어 극장 임대사업도 4곳이나 운영했다. 이후 <업> <흑설> <청송으로 가는 길> 등 작품 활동을 지속했지만, 극장 및 제작사 운용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면서 사업가로서의 고민에 더 많은 집중력을 할애해야 했다.

이두용이 남긴 한국영화의 ‘박력’이라는 문제

<장남>

복원된 <최후의 증인>을 보면서 <살인의 추억>(2003)을 떠올린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은 “한국 현대사의 음울한 공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고 작은 권력들이 자행하는 폭력의 역사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최후의 증인>을 “<살인의 추억>이 한국영화 계보에서 뚝 떨어져나온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라고 짚었다.(<영화천국>Vol.6, ‘영화 속 명대사’)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부패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심리적 병폐를 겹쳐낸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한국 누아르의 풍경과 몸짓을 스크린에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최후의 증인>과 병기해 볼 만한 작품이다. 이는 달리말해 시대적 요구 바깥으로 삐져나온 한국 남성의 히스테리를 낚아챈 영화들이라는 중요한 공통 분모도 된다. 이두용 감독의 경우 당대 흥행 영화들과 비교하면 평균 2~3배는 많은 컷 수를 구사하면서 영화의 속도감에 과감하게 접근했는데, 이렇듯 자신만의 비트(beat)를 불어넣는 연출적 박력은 액션만이 아니라 느와르, 가족 드라마, 코미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적 관습과 동행했다. 그 가운데 이두용의 관점은 신분제 사회부터 현대 신자유주의에 틈새에서 욕망하거나 좌절하는 초상을 낚아채는 순간에 빛났다. <최후의 증인>과 더불어 <경찰관> <생사의 고백> 그리고 <장남> 등이 주요 사례다. <장남>에서 컴퓨터 회사 기술개발 실장인 장남(신성일)은 생계를 온전히 장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부모에게 가족의 양옥집을 지어주겠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선언을 하고 부채감에 시달린다. 꿈만 같은 결속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의 부름에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노부모는 지쳐버리고, 결국 영화의 엔딩에서 어머니는 관 속의 시신이 되어 장남 앞에 나타난다. 출장을 마치고 뒤늦게 도착한 아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는 종반부의 장면은 지금 보아도 날카로운 당대의 리얼리티를 품고 있다. 복도식 아파트의 고층 창문 밖으로 빠져나온 어머니의 관이 철근 크레인에 매달려 지상으로 내려올 때, 이두용의 카메라는 허공에 매달린 관이 중심을 잡지 못해 아파트 콘크리트 외벽에 쿵쿵 박는 모습에서 회심의 숏을 만들어 낸다. 마침내 지표면에 당도한 모친의 관 위에 드러누워 오열하는 신성일의 이미지는 <뽕>과 <돌아이>로 이두용이 흥행 감독으로서의 피날레를 선언하기 직전인 1984년에 나온 그의 실질적인 정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영이나 이만희, 혹은 동시대의 임권택과 비교해 비평계의 지원은 적었을지 몰라도 이두용 감독을 저평가 받았거나 외면받은 감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대의 손꼽히는 흥행 감독이었고 <최후의 증인>은 후배 감독들을 위시해 컬트적 지지를 불러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여전히 대중과 평단이 산발적으로 호출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의 소유자다. 굴곡을 통과해 온 비슷한 세대의 감독들과 비교해서도 이두용의 필모그래피의 일관성보다는 그 변화무쌍함으로 인해 놀라움을 준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급속도로 변화하는 한국영화 산업에 적응하는 역량을 끊임없이 의식한 작가인 이두용 감독이 스스로 돌파구를 만들어간 궤적은 거칠고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지금의 위기 속에서 그를 돌아보게 한다. 긴 시간 지속된 어느 감독의 전투적 타협은 한국영화의 액션, 느와르, 에로티시즘, 리얼리즘 드라마에 보기 드문 활력을 불어넣었다. 산업의 요구를 박력있게 끌어당겨 영화적 무법지대를 개척한 감독, 장르로서의 액션 이전에 장면의 액션(action)을 새긴 감독. 이두용은 실로 기민한 감각의 해결사였다.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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