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정취, 시적 리듬
봉준호 재생, 환경을 다루겠다는 기획에 걸맞은 제작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아까도 1.33:1이라는, 정사각형 비스무리한 화면비율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그 화면비가 사실 감독님이 자주 찍어온 비율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이 편안히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영화 곳곳에 아름다운 인서트컷들이 있잖아요. 배우들이 나오지 않는 숏들, 즉 비 내리는 날의 나뭇잎이나 연못처럼 묘한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숏들이 영화 전체에 시적인 운율을 만들어내거든요. 저도 막상 촬영을 하다보면 배우가 안 나온다고 해서 간단하게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더 어려울 때도 많아요. 배우의 에너지가 화면을 메워주지 않는 가운데에서 뭔가를 뿜어내야 하거든요. 휙 찍고 넘어간다거나 세컨드 유닛에게 촬영을 맡길 수 없을 만큼 신경이 곤두서는 경우들이 또 있습니다. 감독님 입장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일련의 아름다운 인서트 촬영과 편집에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카메라를 어떤 위치에 놓고, 어떤 박자로 편집을 조절한 것인지를 선배 감독인 준지 형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감독님의 직업적 비밀을요.
사카모토 준지 사실 저는 예전부터, 특히 데뷔했을 때는 배우가 나오지 않는 풍경숏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감독이었습니다. 촬영감독이 아무리 자연을 묘사하는 숏을 찍어도 절대 그걸 쓰지 않았죠. 그런데 이번 영화에는 자연과의 공생이라는 주제도 들어 있으니 자연 묘사 인서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이 아름다우니까 찍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배우들이 있는 장소 안에서 ‘이런 풍경이라면 인물의 심정을 잘 나타낼 수 있겠구나’ 싶은 풍경을 발견할 때마다 촬영감독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물의 심정을 자연으로 표현한다면 이러하겠구나’ 싶을 때 찍었고, 풍경이 낭비되지 않도록 여러 번 찍으려 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흑백인 동시에 스탠더드 사이즈로 영화를 완성함으로써 화면 중앙에 관객의 의식을 더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색채 정보가 없기에 인물의 표정이나 나뭇잎이 슬렁거리는 모습도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봉준호 계획하지 않은 채로, 현장에서 배우들을 찍다가 발견한 어떤 것들을 인서트로 담았다는 이야긴데요. 반면 차곡차곡 쌓아서 연결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인서트들도 있었거든요. 첫 장면에 등장하는 변이 담긴 원형의 통 이미지가 뒤쪽에 가면 맑고 깨끗한 물이 담긴 둥근 나무통으로 이어지는 것처럼요. 또 후반에 가면 비슷한 통 위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인서트들이 랩의 라임처럼 우리 심상을 자극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이런 리듬은 편집하면서 고민하신 걸까요?
사카모토 준지 네, 그렇죠. 봉 감독님은 어떻게 하세요?
봉준호 좀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궁금해요! (웃음) 각 챕터를 긴 시간에 걸쳐 나눠 찍으셨다고 하니, 새로운 챕터를 촬영하실 때쯤엔 이전에 찍은 것들을 이미 편집한 상태였을 거 아니에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발견한 어떤 외적인 리듬을 감독님이 반복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봤어요.
사카모토 준지 저는 어느 정도 영상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서 컷을 나누면서, 콘티를 짜듯이 시나리오를 써나가는 편이에요. 프로 각본가에게 맡기지 않고, 제가 연출을 한다는 전제로 시나리오를 써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왔습니다. 원래는 그렇게 쓴 시나리오가 편집 때 크게 바뀌는 경우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여건상 봉 감독님 말씀처럼 앞서 찍은 것과 다음에 찍을 것 사이의 리듬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장이 같은 리듬으로 가기보다 사이사이 짧게 호흡할 수 있는 컷이 들어가는 게 좋겠다 싶어 짧은 두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또 지금 생각난 게 있는데요, 봉준호 감독님이 제게 <살인의 추억> 콘티북을 선물해주셨거든요. 그 후 제가 <기생충> 촬영 현장에도 놀러 갔었는데, 그때 <기생충> 콘티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봉 감독의 콘티를 반복해서 보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우소다!(거짓말!)
사카모토 준지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 책상의 가장 가까운 곳, 손이 먼저 뻗칠 수 있는 곳에 그 콘티북이 꽂혀 있습니다.
봉준호 민망합니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마침 하라다씨가 오셨으니 소소한 질문도 해볼게요. 영화 속 붓글씨가 너무 예쁘지 않나요? 오키쿠가 ‘츄지’라고 이름을 쓰고 좋아 죽잖아요.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쓸 때의 그 글씨, 배우가 직접 쓴 건지 궁금해요.
하라다 미쓰오 교토의 촬영소에 붓글씨 전문가가 계십니다. 에도시대 당시의 글자를 쓸 수 있는 분이라 그분께 부탁드렸습니다.
봉준호 그 소품은 누가 가지고 계신가요? 최강의 굿즈가 될 것 같은데!
하라다 미쓰오 교토의 소품 담당 스탭이 가지고 있습니다.
봉준호 아… 이따 식사하면서 따로 얘기 좀 나누시죠. (웃음) 오키쿠가 그 이름을 쓰고 마지막에 츄지가 사는 공동주택에 찾아가잖아요? 눈이 막 오는데 두 사람이 포옹을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있어요. 그전에 츄지가 이런 말을 하죠. 눈이 오면 사방이 고요해지는 게 좋다고. 츄지는 그런 섬세한 청춘인 거죠. 똥지게를 지고 거친 일을 하는 현실이지만 감수성도 충만하고 결이 고운 청년이에요. 그가 마침내 오키쿠와 포옹을 하는데, 감독님이 츄지에게 고요를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는지 그 장면에 음악이 안 나오더라고요. 아까도 주인공들에 대한 배려를 언급했었는데, 이 또한 감독님의 섬세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어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카모토 준지 츄지가 눈이 오면 고요해져서 좋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본인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한 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음악을 넣고 싶어도 넣으면 안될 것 같았어요. 이런 포옹 장면에는 뭔가 반드시 음악이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데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봉준호 적막함 속에 흰 눈이 내려 아름다운 겨울 장면이었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이 다 돼가니 문득 그 생각이 듭니다. 제가 2000년에 스페인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에서 사카모토 준지 감독님을 처음 뵀어요. 저는 <플란다스의 개>로 초청받은 풋내기 감독이었고, 감독님은 이미 일본의 중견감독이셨는데, <얼굴>이라는 영화로 경쟁부문에 초청받으셨죠. 우리가 상을 받거나 등수를 잘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얼굴>이 그해 <기네마준보> 선정 일본영화 1위 작품이었습니다. <기네마준보>는 오랜 전통이 있는 영화잡지인 만큼 톱10 리스트에 권위가 있는데, 이번에 감독님이 <오키쿠와 세계>로 또 1등을 차지하셨어요. 등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여기서 한번 축하를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카모토 준지 감사합니다. 봉준호 감독을 산세바스티안에서 처음 만났을 땐 제가 굉장히 선배인 양 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뒤 봉 감독님은 정말 세계적인 감독으로 나아가셨고, 이제 제가 봉 감독에게 이길 수 있는 건 제작 편수밖에 없습니다. <오키쿠와 세계>가 서른 번째 영화거든요. (웃음) 다시 응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제가 어렸을 때는 재래식 변소가 있었는데, 저희 집 변소가 태풍 후 범람한 적이 있습니다. <기생충>에서 변기 물이 역류하는 걸 보며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는데, <오키쿠와 세계>의 똥 장면만큼은 <기생충>의 역류 장면에 질세라 만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봉준호 오늘 긴 시간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신 사카모토 준지 감독님과 하라다 미쓰오 프로듀서, 연지미 통역가에게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도 응코와 비슷한 ‘응가’라는 말이 있어요. 강아지와 어린이에게 주로 쓰는 말이고, 어원도 다를 테지만요. 내가 왜 이 얘기를 하고 있지? (웃음) 이렇게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유한 히로인, 배우 구로키 하루
<작은 집>에서 사모님을 근심하는 가정부 타키 역으로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지도 어느덧 10년. 배우 구로키 하루는 “일본에서 앞치마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라든지 “쇼와시대풍 미인”과 같은 데뷔 초 수식어로부터 성큼성큼 멀어지더니 에도시대행도 개의치 않았다. 드라마 <중쇄를 찍자!> <나기의 휴식> 등으로 친근한 존재감을 풍긴 와중에도 이와이 슌지, 나카시마 데쓰야, 호소다 마모루 등 일본영화의 굵직한 이름들과 협업하기를 멈추지 않은 그다운 선택이다. “내가 생각하는 오키쿠는 신분의 차이 따위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쳐다보는 여자”라는 구로키 하루의 해석대로, 오키쿠는 말을 잃은 순간에도 시선으로 웅변한다. 특히 츄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나를 지키면서 당신을 알고 싶다’는 다정스러운 욕심이 읽힌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수어가 없는 시대였기에 ‘이때 손을 이렇게 움직인다’라는 디렉션 없이 구로키 하루에게 모든 걸 맡겼는데도 오키쿠를 사랑스럽게 표현해주었다”라며 놀라워하기도. 이토록 고유한 히로인 오키쿠는 구로키 하루에게 제45회 요코하마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5회 TAMA영화상 최우수여우주연상까지 안겼다.
하라다 미쓰오의 ‘좋은 날 프로젝트’
<오키쿠와 세계>는 ‘좋은 날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는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멍텅구리-상처 입은 천사>(1998)로 데뷔한 후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작품 다수를 비롯해 <행복한 사전>(2013), <일일시호일>(2018) 등에 참여하며 30년간 일본영화계를 누벼온 미술감독 하라다 미쓰오가 투병과 코로나19를 거치며 맞이한 “인생의 전환기” 덕에 발아했다. 몸은 아프고, 현장은 멈춘 시점. 하라다 미쓰오는 우연한 기회에 한 학자와 환경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고, 이 주제를 영화로 말하는 데 남은 힘을 쏟기로 했다고 한다. 영화는 뉴스와 달리 관객이 “즐겁게 웃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지에 젖어들게 한다는 점에 희망을 걸며 <오키쿠와 세계>를 기획한 그는 미술감독으로서도 소임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