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나라에서>(2011)부터 <그 후>(2017), <소설가의 영화> (2021), <탑>(2022) 그리고 <여행자의 필요>까지. 권해효 배우는 12년 동안 10편의 홍상수 감독 영화에 등장했다. 특히 주연을 맡았던 <그 후>부터 그는 홍상수의 세계 속 “무언가를 감추는 사람”으로서 중년 남성의 망설임, 후회, 주저, 비애 그리고 한줌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그가 연기한 해순도 유사하다. 겉보기엔 해사하고 아이 같지만 종종 삐져나오는 욕망의 발로와 기묘한 언행으로 영화에 적극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주요 인물이다. 연옥의 미지를 인도해주는 성자처럼, 권해효 배우는 홍상수란 미로의 이정표를 제시해줄 가장 적절한 안내자였다.
- 홍상수 감독과 10번째 만남이다. 섭외, 촬영 과정에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나.
= 큰 틀에선 변화가 없었다. 내가 출연하는 장면을 빼곤 앞과 뒤의 이야기를 아예 모르는 상황에서 연기에 들어갔다. 또 늘 그랬듯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외형적인 틀과 제약을 정해두고 촬영에 돌입했다. 첫 번째 틀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촬영하겠다는 시간이다. 홍상수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가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순 없다. 인간이 AI는 아니니까. 대신 극단적으로 몰린 시간에 자기를 갖다놓고 대본을 쓴다. 그 상태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나의 것’이란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
- 과거에 비해 구체적인 지명이나 지역의 제약이 약해지기도 했다.
= 하지만 공간성이란 측면은 훨씬 더 강화됐다. 그 극단이 <탑>이었고, 이번에도 각 촬영 장소를 계속 방문하면서 ‘이 공간엔 어떤 사람이 놓여 있어야 좋을까’라는 고민에 몰두했다.
- 제약이란 측면에선 배우에게 주어지는 정보의 제약도 크다. 해순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앞뒤 시퀀스의 맥락은 아예 몰랐다. 해순이 아버지와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앞 장면 이송(김승윤)의 대화와 묘하게 반복된다는 사실도 모른다. 심지어 이번 영화는 더 심했다. 이리스(이자벨 위페르)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고 지나가버리니까 영화 전체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당장 해순이 하는 말이 아무런 맥락 없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볼 때 그 반복들이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굉장히 묘한 감상이 일었다.
- 홍상수 감독은 대사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는 연기 디렉팅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통제의 환경에서 연기할 때 특히 느껴지는 바가 있다면.
= 통제라는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물론 대본을 촬영 직전에 주고 대사를 완벽히 숙지하게 한다는 조건은 있으나 외려 배우는 아주 편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배우는 보통 습관적으로 이 대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몰입한다. 그런 자의적인 표현의 해석이 불허한 환경에선 온전히 상대의 말을 듣고 그것에 반응하는 상태만이 남는다. 이 과정은 통제라기보다 연출자와 배우간의 기막힌 조율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감독조차 완전히 알 수 없다.
- 인물간의 관계가 모호할뿐더러 해순이란 캐릭터도 종잡을 수가 없다. 이리스의 모자나 볼펜에 관심을 쓰는 게 이성적 호기심인지 무엇인지 그 속내를 알기 어렵다.
= 아마 그때는 이리스를 조금 의심하고 있는 원주(이혜영)와 이리스의 불편한 관계를 못 견뎌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게 아닐까. ‘한번 만나면 끝일 텐데’ 정도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서 절하는 일련의 장면 역시 무척 기묘하다.
= 중간중간 해순에게 주어진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또 비슷한 건 산책로의 작은 정자에서 잠들어 있는 이리스를 서늘하게 쳐다보는 구도의 장면. 홍상수 감독이 그 장면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더라. 이 장면 덕에 해순이란 인물이 설명된다는 거다. 해순이 그냥 원주를 모시고 배려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 내면엔 무언가 엄청난 욕망이 있다는 인상을 주니까.
- 해순의 역할이 그런 것 같다. 첫 이야기 속 이송과 이리스의 관계나 대화가 편하고 아름다웠다면 첫 남성인 해순이 등장해서 작업 같은 말을 건네는 순간 ‘아, 홍상수의 영화구나’라는 감각이 탁 들게 된다.
= 예전에 비해서 영화가 아주 우아하고 따뜻해졌고, 이제 남자들이 술 먹고 엄청 징징거리진 않지만 여전히 그런 뉘앙스는 있지. (웃음) 예전 같은 마라 맛이 안 난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요즘엔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이 더 많아졌다. <인트로덕션>(2020) 속 포옹의 연결이라거나 <당신얼굴 앞에서>(2020)의 이혜영 선배가 어린 소녀를 한번 푹 안는 모습이라거나. 억지로 감정적인 순간을 짜내려는 목적이 아닌데도 희한할 정도로 뭉클한 순간이 잦아졌다.
- 베를린국제영화제 상영을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부분은.
= 아무래도 나야 내 아내가 나오는 장면이 가장 좋았지. (웃음) 조윤희 배우가 아들 인국(하성국)에게 보여준 모습은 정말 전형적인 한국 엄마잖나. 아들에게 뭔가를 바라고, 혼내고, 이리스에게 빠진 아들을 설득하다가 울기도 하고. 베를린 현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많은 관객, 영화 관계자, 평론가들도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고 말해주더라.
- 홍상수의 세계에 조윤희 배우가 들어오면 이야기가 무척 통속적이고 일상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엔 현실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줬고, <그 후>에선 아름(김민희)에게 손찌검하며 통속극의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가 더 생경하고 재밌어진다.
= 맞다. 홍상수 감독이 조윤희 배우에게 찾아냈고 기대하는 바도 그런 것 같다.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이 일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일상적이지 않을 때가 많은데, 조윤희 배우가 나오면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나 아침드라마의 느낌이 확 난다. 2010년대 중반쯤까진 잔뜩 취한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감정적인 격분을 내뱉는 장면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엔 그런 남자들의 행태에 조윤희씨가 확 균열을 내버리고 있다.
-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 나도 그게 궁금하다. (웃음) 질문을 받고 굳이 생각한다면 ‘감추는 사람’ 정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왔던 30~40대 인물들은 한때의 욕망을 치기 어리게 겉으로 내뱉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사회적으로 그저 그럴듯하게 살아온 한 남자는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자꾸만 무언가를 숨긴다.
- ‘주저하는 사람’이란 인상도 강하다. 주연을 맡았던 <그 후> <탑>에서도 늘 두리번거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다가 숨겼던 마음이 터져나올 땐 무척 아이처럼 울거나(<그 후>) 웃기도(<탑>) 한다.
= 항상 후회하는 인간이지. 그전의 남자들은 후회할지라도 한번 시원하게 욕하고 싸우고 다른 사람을 찾아서 떠났다면 내가 연기한 인물은 이제 그런 일조차 만들기 싫어하는 거다. 잘 길들여진 남자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