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이자벨 위페르)의 정체는 모호하다. 사람들은 그녀를 한국에 온 여행자로 받아들이지만, 그녀는 두달째 젊은 한국인 남자 인국(하성국)과 같은 집에 살고 있으며 전에도 계속 한국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프랑스어 교사로 인지하지만, 그녀는 언어를 가르쳐본 적이 없고 한달 전에 독특한 교육법을 구상했을 뿐이다. 그녀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알고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대신 끊임없이 무언가를 질문한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도 불분명하다. 홍상수의 영화적 시공간에서 인물의 정체성은 고정된 속성으로 주어지는 대신 매 순간 다르게 획득되는 변수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불가피한 오차를 산출하며 일시적으로 건네지는 잠정적인 정체성은 화면 안에 있는 인물의 행위를 결정짓는 투명하지만 불안정한 전제조건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세부가 그 조건이 요구하는 말과 몸짓으로 채워진다면,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검토해본다.
여행자
두 번째 연출작인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여행자의 필요>에 이르기까지 홍상수는 멈추지 않고 여행자와 여행지를 주시한다. 언제나 현재형으로 주어지는 여행의 감각은 인물의 신체를 낯선 환경에 노출하고, 특정한 몸이 특정한 장소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반응을 스크린에 기록한다. 특히 <밤과낮>에서 처음 나타난 외국의 도시는 이례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영화적 원소다. 이는 <클레어의 카메라>의 칸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베를린처럼 한국 배우가 배회하는 유럽의 도시로, <다른나라에서>나 <여행자의 필요>에서처럼 한국의 공간에 틈입한 이국 배우(이자벨 위페르)로 변주된다. <극장전>에서 아무 데서나 보이는 남산타워를 무력하게 쳐다보던 도시의 인물들과 달리, 낯선 여행자들은 생경한 언어와 공간이 제공하는 감각에 연루된다. 그 연루야말로 홍상수의 영화를 “죽지 않고” 몇번이나 다시 일깨우는 출발점이다.
교육자
여행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얻는 생경한 감각은 몰랐던 것을 인지하게 되는 교육의 현장에서 산출되는 효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의 여행영화는 교육학의 영화이고 물리적으로 여행에 나서지 않는 홍상수의 영화도 여행영화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홍상수의 교육학은 한명의 선생이 다수의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보편적인 과정과 무관하다. 학생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옥희의 영화>의 송 교수뿐만 아니라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내가 사진을 찍은 뒤에는, 당신은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말로 사진 촬영의 의미를 알려주는 클레어, <소설가의 영화>에서 별다른 준비 없이도 영화제작을 실천하고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준희, 당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여행자의 필요>의 이리스는 모두 우리의 인식과 감각을 교정하는 무지한 교육자다. 이 교육학적 실천에 참여하는 일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경험을 닮았다.
연주자
<여행자의 필요>는 두번의 피아노와 한번의 기타 연주, 그리고 모호한 피리 소리를 들려주는 영화다. <북촌방향>의 피아노 연주와 <다른나라에서>의 기타 연주처럼 유준상의 출연을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묘사되던 연주의 기록은 홍상수의 영화가 조금씩 선율, 비애, 슬픔의 정서에 가까워지면서(<극장전>의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lt;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슈베르트 현악 오중주로의 이행을 떠올려보자) 더 잦은 빈도로 출현하곤 한다. 연주는 일시적으로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멈추고, 그 몸짓을 보고 듣는 감각에 신체를 집중하도록 한다. 혹은 <여행자의 필요>의 이리스처럼 들려주는 연주를 외면하고 자리를 떠나게 한다. 연주는 인물들을 그 자리에 멈춰 세우거나 퇴장시키는 특정한 형식이다.
수신자 혹은 낭독자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는 여러 종류의 글을 읽는다. 책에 적힌 텍스트, 돌로 된 기념비에 쓰인 시, 영어로 번역된 문장…. 내밀한 일기나 편지에서부터 체호프와 뒤라스와 소세키의 책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수신하고 번역하고 낭독하는 절차는 홍상수 영화에 특별한 목소리를 기입한다. <자유의 언덕>에서 흩뿌려진 편지를 읽는 목소리는 영화 형식의 시제를 혼란스럽게 뒤바꾸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김민희)에게 책을 낭독하는 상원(문성근)의 목소리는 화면을 좌우로 오가는 격렬한 패닝에 담긴다. 그렇게 수신과 낭독의 목소리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영화의 신체를 증언한다.
노동자
이리스는 하루 동안 두번의 프랑스어 강습을 하며 20만원을 번다. 그 돈으로 인국의 집 월세 일부를 내려고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인국의 어머니는 인국에게 한달에 생활비로 얼마를 쓰는지 일일이 캐묻는다. 돈을 벌거나 노동하는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던 <밤과낮>의 성남(김영호)은 예외적이다) 그들의 생활과 환경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돈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희정(김민희)은 모델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 일에 환멸을 느껴 그만뒀다고 한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이혜영)은 아파트를 마련할 돈으로 고민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돈은 영화가 겉면에서 보여주고 조합하는 모든 이미지의 이면에 있다.” 돈은 영화를 만드는 절차의 불가피한 이면이자 조건이며 책임이다. 홍상수와 그의 인물은 그 책임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산책자
산책자는 목적 없이 걷는다. 정해지지 않은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머지않아 산책자는 선택지 앞에 선다.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까? 인물이 선택하는 방향에 맞춰 영화는 하나의 가능한 세계에 입회하고 나머지 세계의 가능성을 폐기한다. <북촌방향>과 <다른나라에서>의 갈림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과 <클레어의 카메라>의 골목길, 그리고 <여행자의 필요>의 숲길은 하나의 가능성과 다른 하나의 잠재적 가능성 사이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여행자의 필요>의 후반부에서 영화는 이리스를 찾는 산책자의 발걸음을 따라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과 만난다. 바깥으로 향하는 산책자의 걸음은 영화를 가능케 하는 단 하나의 매혹적인 충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