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이 삼촌>에 등장하는 1960년대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지성을 어떻게든 국가의 중흥에 이바지하려는 열망이 있다. 진기주가 분한 주여진도 마찬가지다. 여진은 혁신당 국회의원인 아버지 주인태 의원(오광록)의 사무실에서 참모로 일하다 훗날 기자가 된다. 작품 속 여진은 절대 혈연을 이유로 아버지의 일을 돕는 청년으로 비치지 않는다. 여진이라면, 정확히는 진기주가 연기한 여진이라면 삶의 모든 선택에 자기만의 논리와 기대를 걸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 전작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 1980년대를 사는 여성을 연기한 적 있다. 이번엔 그보다 앞선 시기인 196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분했다.
=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1980년대 한국에 갑자기 떨어진 인물이라 시대고증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땐 스스로 상황을 직접 맞닥뜨려야 진짜 감정이 나올 것 같아서 예습하지 않았다. 그때보다 <삼식이 삼촌>은 훨씬 더과거이다 보니 어느 정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책과 유튜브 영상을 주로 참고했다.
- 대본을 받은 후 들었던 첫인상은.
= 브라운 컬러, 베이지 컬러가 처음 떠올랐다. 가을 웜톤이라고 해야겠다. (웃음) 언젠가는 연기 해보고 싶은 컬러의 캐릭터였다. 여진은 정말 많이 익어 있는 사람이다. 다 익어서 고개를 숙인 벼 같은 친구다. 그게 좋으면서 어려웠다.
- 어떤 점이 어려웠나.
= 이렇게 말수가 적은 배역은 처음이었다. 어쩌다 말을 해도 짧게 답하다 보니 한정된 문장 속에 뭔가를 담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금껏 나는 감정을 대사에 전부 녹이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우리가 일상을 살 때도 대개 발화의 의도와 목적을 언어에 담지 않나. 그런데 여진인 그렇지 않다. 여진의 말을 꼭꼭 씹어 위장에서 소화한 뒤 연기해야만 했다. 여진은 두 마음이늘 갈등하는데 그 갈등을 100시간 안에서 숙성 시킨 다음 겨우 한 문장을 꺼내 보이는 사람이다. 그 무게감이 공포로 다가온 때가 있었다.
- 여진과 김산(변요한)은 사랑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아도 서로를 굳게 믿는 연인으로 그려진다. 둘의 사랑을 어떻게 해석했나.
= 삼식이 삼촌(송강호)이 김산을 포섭하기 위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을 한다. 단언컨대 나는 김산과 같은 꿈을 꾸는 건 여진이 라고 본다. (웃음) 둘은 정말 같은 꿈을 꾸고 있고 같은 열망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 둘은 모든게 맞물려 있어 서로 강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둘의 가슴엔 같은 피가 끓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다” 는 대사는 여진이 해야 한다!
- 여진은 삼식이 삼촌을 만나 파란만장해지는 김산의 삶을 곁에서 오래 지켜보는 캐릭터다. 달리 말해 시청자와 함께 김산의 궤적을 함께 담지하는 캐릭터다.
= 여진의 시선이 곧 당시 시대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이라 생각했다. 시청자의 시선이기도 하지만 작품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가장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눈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피를 끓게 한 여진의 장면이 있다. 기자가 된 여진이 기사를 쓰고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기사 내용이 나가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빨리 공개됐으면 좋겠다.
- 여러 고초에도 불구하고 여진이 유지하려는 신념과 욕망이 있다면 무엇일까.
= 여진에게도 분명한 욕망이 있다. 삼식이 삼촌과 같은 존재가 힘을 가져다주면 여진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여진은 유혹에 동하지 않는다. 꼼수나 전략, 이해관계를 좇는 지름길 대신 속도가 느리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길 택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더라도 여진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캐릭터라 생각한다.
- 여진의 잠재력에 관해 정리하기도 했는데.
= (손으로 큰 타원을 그리며) 여진은 이만한 그릇을 가졌다.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큰 그릇을 품은 캐릭터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곁의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선택에 의해 삶의 방향이 바뀌지 않나. 여진은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도 감당해낼 수 있다. 그래서 잠재력이 크다. 하지만 여진의 성정상 그 잠재력을 발휘하겠다며 스스로 나서진 않을 것이다. 사실 여진은 쓸데없이 정직하기도 하다. (한숨을 쉬며) 캐릭터로선 멋있을지 몰라도 자기 현실을 살아가는 덴 불리한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