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커버] '삼식이 삼촌' 배우 송강호, 위장에서 심장까지
2024-05-14
글 : 김소미

밥과 삼촌. 전후 한국에서 두 낱말은 상징적이다. 배고픔, 울분, 연대, 가족애, 생존 본능과 뗄수 없는 이 정신적 표어들을 이름으로 얻은 남자가 있다. 주변인들의 하루 세끼를 챙겨주는 수완 좋은 사업가라 해서 ‘삼식이 삼촌’이라 불리는 박두칠(송강호)로, 그는 드라마 <삼식이 삼촌>의 걸어다니는 은유이자 오래전부터 “밥은 먹고 다니냐?”(<살인의 추억>)를 물었던 우리의 송강호 그자체다. 지난해 내내 창작의 고통이 급습한 촬영 세트장에 갇혀 있던 영화의 우두머리(<거미집> 김열)는, 특유의 인상적인 줄행랑 실력으로 1970년대를 빠져나와 1960년대 저잣거리의 왕으로 등극했다. 위로는 정치판, 아래로는 뒷골목까지 배짱 좋게 접수한 박두칠의 신화는 막 경제개발의 깃발을 꽂은 근현대사의 등락 앞에서 요동친다. 두둑한 배포와 소탈한 인간미, 순수함과 비밀스러움을 동시에 갖춘 이 남자. 박두칠을 그려가 다보면 문득 그 종잡을 수 없음이 지극히 배우 송강호다운 것이라 납득하게 된다.

- <삼식이 삼촌>은 ‘송강호의 첫 드라마’라는 점만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 약간 수식어처럼 쓰이는 것 같기도 해서 민망하다. 뭐, 어쨌든 첫 드라마인 게 사실이지만. 왜 갑자기 드라마냐고 이유를 많이들 물으시는데 답은 간단하다. 콘텐츠가 다양한 형태, 플랫 폼에서 소비되는 시대인 만큼 내 관점도 자유로워질 필요를 느꼈다. 관객과 소통하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던 차에 <삼식이 삼촌>을 만났다. 드라마라고 해서 딱히 낯설거나 힘들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심적 부담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 첫 드라마 출연작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이었을까.

= 영화야 쭉 해오던 작업이니 흥행이 잘될 때도, 또 마음만큼 따라오지 않을 때에도 단련되어 있다. 그런데 드라마는 어떤 느낌일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물론 작품의 진정한 성공이란 숫자로 대변되지 않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라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디즈니+의 경우 구체적인 흥행 집계를 내부적으로만 한다고 해서 좋다, 하하하! 영화는 개봉 직후부터 매일 관객수, 예매량이 집계되고 공중파 드라마는 방영 다음날 아침마다 시청률이 나오니까 아무래도 애가 타거든.

- 송강호의 시대극 드라마가 디즈니+에 안착한 그림이 미디어 시장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것 같아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웃음) <거미집> <1승>에 이은 신연식 감독과의 세 번째 협업이 만든 결과다.

= 나는 일에도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서로 스케줄이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거다. 한 시절에 배우 송강호의 감성이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데 정반대의 작품이 들어오면 아무리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해도 선뜻 다가가게 되질 않는다. 산업적인 성공이 예측되는 요소가 빤히 보여도 그보다는 나 자신의 목마름을 축여줄 작품을 찾게 되는 것이 배우의 본능이니까. 신연식 감독과 연달아 작품을 함께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각본을 쓴 <동주> 를 본 뒤부터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다. 윤동주 시인의 문학적 면모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동안 중점적으로 보지 못했던 인간적 면모를 바라보는 시선에 놀랐다. 젊은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도 하니까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지. <기생충>의 아카데미 레이스까지 마무리짓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가 먼저 내게 연락을 해왔고, 그러잖아도 호기심이 있던 상태라 그랬는지 그날 당장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제안했다. 그렇게 <거미집>(각본 신연식)과 자그마한 독립영화 <1승>을 찍었고 <삼식이 삼촌> 대본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전까진 드라마 작업을 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 <씨네21> 신작 프로젝트 인터뷰에서 감독이 밝히 길, 그렇게 성사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삼식이 삼촌>의 한 장면에 영감을 줬다고. 배우 송강호가 단번에 신연식 감독에게 만남을 청한 것처럼, 킹메이커 박두칠도 정치인 김산(변요한)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빵집으로 불러낸다.

= 그래도 굳이 따지면 현실에선 신연식 감독이 박두칠쪽이지! 자신의 야망과 꿈을 실현시켜줄 인재를 캐스팅하려는 거니까. 신연식 감독도 내게 그날이 인상 깊었다는 얘기를 하긴 했다. 일반적인 절차라는 게 보통은 이메일로 대본을 보내주면 ‘읽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잖나.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에 놀랐을 것 같다. 살다보면 이런 인연도 있는 것 아닐까.

-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법서 중에는 캐릭터가 위장, 심장, 머리 중 무엇에 가장 크게 지배되느냐에 따라 인물형을 분류하는 관점도 있다. 박두칠은 소화기관의 본능과 맞닿은 캐릭터인가 싶다가도 전략가적인 면모를 보여줄 땐 머리로 움직이는 캐릭터이고, 불쑥 뜨거운 마음을 드러낼 땐 심장의 인간이다.

= 죽 한 그릇 먹기 힘든 시대에 밀가루로 만든 빵, 피자를 이야기하는 게 박두칠 아닌가. 빵도 그냥 빵이 아니라 단팥빵을 먹는다. 그가 지닌 경제적, 사회적 풍요를 향한 높은 이상을 말해주는 메타포들이다. <삼식이 삼촌>은 분명히 위장에서 시작해, 중후반부에 뇌로 갔다가 마지막에 가슴으로 간다. 지금으로선 딱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다. 화살표를 그리자면 위->뇌->심장 순서로 흐르는 드라마다. (먼저 퇴근하게 된 배우 변요한이 인사하러 다가온다) 다 끝났구나? 얼른 들어가~. 수고 많았어. 우린 한창 내장 이야기 중이었어. (일동 웃음)

- 마침 김산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려 했다. 박두칠은 젊은 엘리트 김산과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나.

= 박두칠에게 김산과의 만남은 자기 인생의 로망이 실현된 것에 가깝다. 그러니 자신을 걸 수밖 에. 둘의 관계는 역동적이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 구도 안에 우리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로 경계하다가 가치관을 공유하는 끈끈한 사이가 되고, 그러다 갈등이 생기고, 질투하고, 각자가 이기심을 부릴 때도 있다. 관심이 떨어졌다가 다시 불붙거나 무감해졌다가 서로의 진심을 새삼 깨닫는 식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깊이 엮인다는 게 그런 과정 아니겠나.

- 신연식의 시대극 속 송강호는 원대한 이상에 몰두한 나머지 집념과 집착을 오가는 캐릭터다. 전쟁 이후에 배불리 먹는 나라를 만들고 싶은 <삼식이 삼촌>의 박두칠, 검열의 시대에 일생일대의 영화를 만들려는 <거미집>의 김열 모두 그렇다.

= 나도 바로 그 점, 완벽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좋다. 박두칠과 김열, 두 사람 모두 어떻게 보면 비뚤어진 욕망과 야망의 소유자들이다. 어딘가 약간 왜곡된 면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가진 지나친 열정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시대에 작가가 이 두 캐릭터를 불러낸 건 두 캐릭터를 불러낸 건 그들의 거친 순수성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순수성이란 게 너무나 빛나는 것인 동시에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탈색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박두칠과 김열은 내 삶의 순수성을 지금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질문하게 만드는 유형의 인간들이다.

- 특히 박두칠은 시대상과 결부된 캐릭터고 해석에 따라 명암이 갈릴 법하다. 그때그때의 주어진 상황과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작업과 보다 분석적인 캐릭터 연구를 요하는 작업으로 나눠본다면, <삼식이 삼촌>은 어느 쪽인가.

= 순간적인 감정이 중요할 때와 관조적인 포지션에서 분석적인 시선을 갖고 접근해야 할 때가 각각 있는 건 맞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두 가지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섞여 있다. 복잡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현장성 50, 해석력 50 이런 식의 산출은 불가능하다. 준비 단계가 끝난뒤 카메라 앞에 선 순간부터는 본능적으로 톱니바퀴를 굴려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거엔 배우가 자기 결과물에 대해 말할 때 ‘본능’을 언급하면 약간 건방지게 보는 시선도 있더라고. 조심스럽지만, 내 말은 계산적인 연기법이란 건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제목에서부터 캐릭터를 지칭하는 이 작품의 컨셉을 배우 송강호의 존재감, 상징성, 흡인력과 별개로 보긴 힘들 것 같다. 이 지점이 의식되진 않았나.

= 배우 송강호의 모습이 작품 속 캐릭터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런 바람을 갖고 시도한다고 해서 되지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부질없는 욕심은 놓아야 한다. 그 대신 바라는 경지가 있다면, 캐릭터를 충실히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순간, 마치 매직아이(스테레오그램)를 볼 때처럼 스윽 인간 송강호가 나타나는 것이다.

- 16부작 정극 드라마라 많은 대사를 소화해야 했다. 목소리 표현, 음절과 운율 처리 같은 디테일에 어떻게 접근했나.

= 하!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대사가 많더라고. 궁극적으로는 시대극 연기를 할 때 흔히 빠질 수있는 유혹을 경계했다. 1960년대 초반은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시대다. 그러다보니 캐릭터가 쓰는 언어와 그 안의 뉘앙스가 대체로 거칠고 마초적이며 직설적으로 표현되어온 편이다. 나는 그동안 공중파 드라마에서 많이 쓰인 인물의 질감은 지양했다. 센 표현은 배우에게도 쉽고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에도 편하다. 나로서는 그것을 피하는 도전을 해본 셈이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박두칠이 어떤 사람인지를 시청자가 점점 더몰랐으면 좋겠다. 근데 결국은 알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걸 실질적으로 어떻게 만들어내냐고? 베테랑인 배우들이 각자 알아서.

사진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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