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 패거리>
2024-06-18
글 : 이다혜
사진 : 오계옥
필립 로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비채 펴냄

한국에서는 필립 로스라고 하면 말년에 쓴 <에브리맨>이 잘 알려져 있다. <에브리맨>이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통찰력에 방점이 찍힌 소설이라면 그의 1971년작 <우리 패거리>는 마치 기관총을 쏘듯 (미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마흔 즈음의 젊은 필립 로스를 만날 수 있는 정치 풍자 소설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미국 대통령 트리키다. ‘사기꾼’으로 해석 가능한 ‘트리키’(Tricky)라는 이름(정확히는 트릭 E. 딕슨이다)을 대통령에게 지어준 데 더해,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연설 내용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우리 패거리>는 닉슨 행정부를 향한 조롱과 독설을 유머로 다루는 소설이다. 뿐만 아니라 트리키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것으로 다루는 기자들 역시 이 희화화에서 빠지지 않는다. 누가, 혹은 무엇이 정치를 코미디로 만드는가? 정치인들이 그렇게 한다. 이 책의 뒤표지에 적힌 대로 “무능한 지도자를 향한 필립 로스의 문학적 테러”다. 이 책이 다루는 첫 번째 이슈는 태아의 권리를 위해 낙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그와 같은 내용을 담은 1971년 4월 닉슨의 샌클레멘테 연설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이 소설은, 대통령이 오로지 낙태에 반대하기 위해 억지에 가까운 논리를 펼치다 급기야 태아 투표권까지 법제화하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다. “어쩌면 이 나라가 다시 위대해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대량의 무지인지도 모릅니다”라는 트릭 딕슨 대통령의 작중 발언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 미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정치에 대한 혐오가 어디서 출발하는지에 대한, 또한 그렇기 때문에 정치 혐오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남 얘기 같지 않은 절망을 느끼며 절로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웃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절망적으로 현실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웃길 수 있단 말인가? 필립 로스의 유머는 독하다. 낙태든 동성애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바깥의 사람이라면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전 영부인인 재클린이 외국인과 결혼해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에 앙심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성서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적들은 이 책으로 자녀들을 세뇌합니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아찔한 기분마저 든다. 동시에 이것이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만 할 순 없을 것 같다는 좌절과 함께….

210쪽

이런 일은 저도 처음 봅니다. 많은 사람이 체포해달라면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어요. 온갖 평범한 사람들이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증명하는 문서나 사진이나 지문을 내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