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의 봉남(김인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 <박하경 여행기>의 박하경(이나영)까지. 이종필 감독은 언제나 좌절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구제하는 방식을 깨우쳐가는 캐릭터들을 그려왔다. <탈주> 또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필사의 도전을 감행하는 남자들의 활주극이다. 남한으로 탈주하려는 북한군 규남(이제훈)과 동혁(홍사빈), 그들을 끝까지 쫓는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까지, 세 남자의 질주는 각기 목적이 다르지만 지금의 삶이 끝장에 이르자 새로운 삶을 찾아 도주하려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당황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모두가 직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이종필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 연초 <씨네21> 2024년 한국영화 기대작 특집에서 <탈주>를 “결국 누구든 내 것이라고 느낄 만한 이야기”라고 요약한 바 있다. 규남처럼 탈북을 감행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방식의 삶을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건넨 말인가.
= 관객이 현상에게든 규남에게든 저마다의 처지를 이입하기보다는 ‘대입’하길 바랐다. 그래서 캐릭터에 부여된 구체적 사연을 모두 빼려 노력했다. 만약 작중 배경이 대한민국이었다면 영화 제목이 탈주가 아닌 ‘탈영’이 되지 않겠나. 이 경우 자기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갖지 못한 관객은 서사에 이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생각했다. 10대 때 한 영화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뺄셈의 영화”라 표현한 인터뷰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탈주> 또한 내가 모든 걸 최대한 빼내면 그 빈자리에 관객이 각자의 상황을 대입해 영화 전체를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갔다.
- 선율보단 음향에 집중한 작품의 스코어가 몰입도를 높인다.
= 작품의 시각적 요소를 악몽, 즉 꿈처럼 연출하고 싶었다. 앞서 말한 내러티브를 모두 빼 관객이 대입 가능한 영화를 만들려는 소망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데 꿈속의 나는 북한에 떨어진 것 같고 낯선 땅에서 계속 쫓기는 신세라는 악몽이 그대로 느껴지길 원했다.
- 스코어와 더불어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삽입곡이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다. 규남의 아버지가 운전기사였다는 내용에 맞춰 결정된 곡인가.
= 시나리오에서부터 <양화대교>가 적혀 있었다. 규남이 비무장지대에 인접한 부대에 근무하다 보니 남한의 대중가요가 계속 들린다는 설정이었다. <양화대교> 외에 다른 후보곡들도 더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수많은 노래를 전부 들려주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섰고 그중 <양화대교>를 최종 선택했다. 규남이 잊고 살던 꿈을 <양화대교>가 환기해줬을 것이라 믿었다.
- 영화를 보고 나면 내처 달리는 규남의 이미지가 각인된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부터 규남은 한밤중 내무반에서 탈출해 초지대를 달린다. 수색, 은신, 도주에 능한 규남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 각색 과정에서 추가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달리는 영화라는 걸 오프닝 시퀀스부터 보여줘야 했다. 또한 언급했던 악몽의 이미지를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규남이 모두가 잠든 밤 홀로 눈을 뜨는 순간이 필요했다. 악몽 속에서도 잠들지 않으려는 규남의 결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다짜고짜 달리는 규남이 등장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 뭐지?’라며 바로 몰입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달리기는 인간의 원초적 행위다. 달리는 모습이 영화적으로는 활동사진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 탈주를 꿈꾸는 동혁에게 명확한 서사를 부여한 것과 달리 규남이 탈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뚜렷한 감정적 동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연출자로서 전사가 없는 주동 인물을 관객이 그저 따라가게 만드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 내게 동혁은 타인인 반면 규남은 한명의 개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사연에 쉽게 공감한다. 하지만 개인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복잡한 사고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규남의 플롯이 관객에게 귀순병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읽히는 건 원치 않았다. 그저 관객이 탈주 자체를 온전히 겪길 바랐다. 극장 밖을 나서며 ‘그런데 규남은 왜 탈주하려 했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대입했으면 좋겠다.
- 이제훈 배우와는 규남의 심리에 관해 치밀한 논의를 거친 반면, 구교환 배우와는 촬영 들어가기 직전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했다던데.
= 행여 최종적으론 영화에 사용하지 못하는 장면이 있더라도 작품을 위해서라면, 배우가 동의한다면 연기자와 여러 시도를 해보고 싶다. 규남은 직진한다는 흐름이 명확한 캐릭터기 때문에 이제훈 배우와도 감정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하지만 현상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내면엔 알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진 캐릭터다. 그래서 오히려 명확한 디렉션보다는 경우의 수를 열어놓은 채 배우와 함께 길을 탐색해갔다. 구교환 배우 역시 그편을 선호했다.
- 총정치국장의 연회 시퀀스는 규남과 현상, 현상과 민(송강)의 시선이 교차하고 엇갈릴 때마다 장르적 긴장감이 높아진다. 멜로영화의 편집 공식이기도 한데.
= 장면을 재밌게 만든 편집감독의 공이다. (웃음) 현상과 민의 에피소드는 시나리오 각색 과정에서 추가한 내러티브다. 추격영화를 보면 보통 도망자의 서사에 비해 추격자의 서사는 표적을 향해 총을 쏘고 쫓는 것 외엔 단선화되어 있지 않나. 쫓는 자인 현상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선사하고 싶었다. 나는 규남과 현상을 한 개인 안에서 양분된 두 마음이라고 보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공격형의 규남이 있는가 하면 안정추구형의 현상도 있다. 안정을 추구하는 현상이 할 법한 가장 큰 고민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혹은 ‘내가 놓친 것은 없나’일 것이다. 현상의 번뇌를 건드리는 상대가 필요했고, 그게 현재의 규남이었다.
- <탈주>는 어느 한 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념과 환경의 대비가 남북의 대비로 치환돼 영화 내내 이어지고 이 점은 주동 인물의 궁극적인 탈북 사유와 무관하지 않다. 여러 설정이 자칫 <탈주>를 애국주의 혹은 반공주의가 녹아 있는 영화로 읽히도록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없었나.
= 전혀 없었다. 이념적으로 해석되는 것 또한 큰 관심이 없다. 굳이 의도가 있다면 관객이 이 영화를 북한 이야기인 줄 알고 보기 시작했다가 결말엔 남한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길 바란 정도다. 결말에 이르렀을 때 규남이 마냥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에필로그 전까지의 <탈주>는 분명 뺄셈의 영화다. 미술 사조로 예를 든다면 사실주의보다는 인상주의나 표현주의에 가깝게 연출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북한의 이야기를 남한의 이야기로도 대입할 수 있게 만들려 노력했다. 반면 결말부의 이야기는 규남이 발붙이고 사는 현실의 요소를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결말부의 선택은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 있든 어찌저찌 살아갈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또 새로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