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표현과 문제 해결 과정 모두 색다른 방식을 모색했다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무뢰한>에 익숙한 관객에게 <리볼버>는 전혀 다른 인상을 안긴다.
=<무뢰한>은 대사가 적고 해질녘과 새벽 시간대의 적요한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한 영화다. <리볼버>는 이런 요소들과는 관계가 없다. 특정 풍경 속의 분위기가 아니라 여러 인물들 각자가 가진 감정들을 극적으로 그리는 데에 더 포인트를 뒀다.
- 전도연 배우의 전화 한통이 작품의 발단이 됐다. 특정 배우를 중심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어땠나.
=상황을 설명하자면 당시에 준비하던 영화가 잘 안됐다. 집에 있는데 전도연 배우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서 하는 말이 “그렇게 쉬지만 말고 뭔가를 얼른 준비해서 같이해보자”는 거였다.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전도연 배우가 출연한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전도연 배우가 가진 것들 중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부분은 공감 능력이다.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공감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맡은 배역을 연기할 때도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리고 또 전도연 배우만이 가진 품위가 있다. <리볼버>의 하수영에게도 그런 점을 반영하고자 했다.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넘쳐흐르지만 그것을 서둘러 표출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도 격을 갖춘 게 느껴지는 사람. 이번에도 전도연 배우가 정말 잘해줬다.
- <무뢰한>으로 김성수 감독과 대담을 진행했을 때 “<사무라이>(1967)의 알랭 들롱같이 절제되고 댄디한 형사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배경을 밝혔다. 이번 작품에서도 이미지상의 레퍼런스가 있었나.
=이소룡을 정말 좋아하는데, 영화 <사망유희>에 그가 촬영한 20분 분량의 영상이 삽입돼 있다. 주인공이 ‘사망탑’이라는 7층 목탑을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총 7명의 악당과 싸워 이긴다는 내용이다. 그 작품을 생각하며 받지 못한 대가를 얻기 위해 수영이 한명 한명 대적해나가는 형식을 떠올렸다. 상대를 만날 때마다 사건의 실마리를 얻어 마지막을 향해 가는 거다. 내가 구상한 두개의 아이디어 중 전도연 배우가 더 마음에 들어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액션으로 영화를 채우고 싶진 않았고 오히려 대화에 무게를 실으려고 했다. 구체화하면서는 1930~50년대 필름누아르 영화, 하드보일드 소설 <빅슬립>, 영화 <포인트 블랭크> <차이나타운>,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등을 참고했다. 이 작품들에서 조금씩 빚진 부분이 있다. 결말 부분이 영 떠오르지 않을 시기엔 1970년대 홍콩 무협영화들을 많이 봤다. 경복궁, 덕수궁에서 찍은 신들이 꽤 있는데 호텔 같은 주변 건물이 카메라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시야각을 좁혀 찍었더라. 그 이상한 촬영에 마음이 동해 나도 그렇게 찍고 싶어졌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장소를 절로 정하게 됐다.
- 수영은 어떤 상황에서든 거침없이 밀고 나간다. 이는 <무뢰한>의 혜경이 보였던 특성이기도 하다.
=전도연 배우도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고 수영과 혜경이 비슷한 게 아니냐는 말을 하더라.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이 기저에 깔린 게 비슷해 보이는 것 같다. 혜경도 수영도 티 한점 없이 깨끗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특히 수영은 경찰로서 해선 안될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렇게 죗값을 치르고 교도소를 나왔을 때 수영은 투명 인간과 다름없었다. 수영은 그렇게 존재감 없이 일생을 사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도 사람답게 삶을 살아갈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받지 못한 대가, 아파트와 돈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말하자면 <리볼버>는 투명 인간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신의 승리를 향해 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 옛 연인인 임석용(이정재)에게 벌어진 사건이 수영이 복수를 지속할 동력이 되기도 했을까.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수영에게 “내 마음에서 썰물처럼 다 빠져나왔다“는 대사를 준 건 결국 석용과의 감정이 정리가 됐다는 의미에서 그런 거였다. 그렇지만 수영의 행동을 보면 사실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그게 속박이자 굴레가 돼서 수영으로 하여금 계속 석용의 자취를 따라가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기에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순 없다고 판단했다. 전도연 배우와도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었다.
-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치고 수영의 언행은 절제돼 있다. 적과 대적하는 신이 많아 액션을 더 보여줄 법도 한데 영화에선 의도적으로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영에겐 자기 신념이 있다. 선배 민기현(정재영)을 만나 총을 건네받은 후로 수영은 마음만 먹으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중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총으로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됐으니까. 하지만 수영은 그런 짓까지 하는 인간은 되지 않겠다는 자기만의 선이 있다. 그게 수영이 지닌 품위라고 생각했고, 그 신념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으면 해서 폭력의 빈도나 수위를 높게 가져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액션이 과해지면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던 것들이 다 무너지게 되니까. 전도연 배우와도 그 방향이 맞는 것 같다고 시나리오 단계에서 얘기를 많이 나눴다.
- 수영만큼이나 윤선(임지연)의 심리가 궁금했다. 수영을 돕긴 하지만 헌신적인 조력자는 아니고, 온전히 자기 이익 때문에 접근하는 것 같으면서도 때때로 수영에게 동료애 비슷한 걸 내비친다.
=지인들에게 <리볼버>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정 마담(정윤선)이 마치 혜경이 몰락하기 직전 버전 같다는 말들을 해주곤 했다. (웃음) 윤선도 과거의 혜경처럼 일하는 클럽에서 잘나갔었지만, 전남편과 관련된 사건 때문에 경찰과 대치하게 됐고 현재로선 약점이 많다. 그럼에도 윤선에게도 반드시 지키는 자신만의 선이 있다. 수영에게 ‘품위’라는 말을 쓴다면 윤선에겐 ‘가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선은 남에게 많이 이용당했고 그만큼 남을 많이 이용해봤다. 그래서 사람 보는 눈이 꽤 좋은데 아마 예전에 클럽에서 수영을 봤을 때부터 멋진 사람이라고 알아봤다는 설정이다. 굽신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일처리하는 모습에 인간적으로 매료됐을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본인이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도 수영을 도와주곤 하는 것이다. 윤선은 <배트맨>의 로빈 같은 캐릭터다. 조력자이자 훼방꾼으로 도움을 주면서도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배트맨이 그냥 악당만 만났으면 이야기가 얼마나 평면적이었겠나. 첫 등장부터 의문투성이에 속내도 파악하기 어렵지만, 나름의 선을 갖고 행동하는 인물을 넣고 싶었고 그게 윤선이었다.
- 7층탑 구조를 명시한 것처럼 수영이 만나는 인물이 굉장히 많다. 앤디(지창욱)나 민기현, 그레이스(전혜진) 등 혹여 분량이 짧더라도 서사를 분명하게 쥐어주려는 것이 촬영과 편집에서까지 느껴졌다.
=민기현은 경찰이었던 수영의 옛 상사이자 수영, 석용이 속했던 검도부 부장이었다. 여러 사건으로 인해 과거와 달리 현재는 수영을 싫어한다. 수영에겐 또 한명의 조력자이자 훼방꾼이고 탑에 비유하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1층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을 헌신적으로 돕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작업 과정이 쉽지 않았다. 후반부에 마주하는 이스턴 프로미스 대표 그레이스는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무뎌졌고 그만큼 가진 비밀이 많다. 대사와 분량이 적어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박일현 미술감독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줬다. 원래는 큰 전면창 앞으로 도시 전경이 펼쳐지게끔 그레이스의 사무실을 꾸미려고 했는데, 박일현 미술감독이 창 대신 우거진 밀림과 같은 공간을 구성해왔다. 그걸 보며 ‘방에 이런 밀림을 갖다놓다니, 이 콤플렉스는 뭐지?’ 하고 역으로 생각하게 되더라. 앤디는 돈도 많고 자기에게 굽신거리는 이들도 많아 점점 망가진 사람이라 생각하며 썼다. 지창욱 배우가 맡아준 뒤로 캐릭터가 더 입체적이고 몸집이 커진 느낌이다. 다만 연기하기 편한 캐릭터는 아니라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 현장에선 어떻게 디렉팅을 하는 편인가.=시나리오에 다 이야기해뒀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크게 디렉팅을 하진 않는다. 다만 배우들은 맞게 가고 있는지 두려워할 수 있으니까 감독으로서 보기에 더 나은 것, 맞다고 판단되는 것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정도다. 이번에도 운 좋게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하게 돼서 믿고 가는 부분이 많았다. 작품마다 연기 면에서의 좋은 스승들을 잘 만나왔다고 생각한다.
- ‘얼굴의 영화’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만큼 촬영도 대상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데에 중점을 둔다.
=원래 클로즈업을 많이 안 쓰는데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썼다. 배우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특히 전도연 배우의 얼굴을 관객이 계속 궁금해하고 보고 싶게 만들고 싶었다. 강국현 촬영감독과 자주 이야기한 건 해가 어디 떠 있는지 모르게 연출하자는 것이었다. <리볼버>의 인물들은 해가 질 때 출근하고 해가 뜰 때 퇴근하는 밤의 인간들이다. 해 질 녘과 해 뜰 녁의 묘한 느낌이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좌우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배우들의 얼굴, 표정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강국현 촬영감독의 틈 없이 꽉 들어찬 프레임, 그리고 핸드헬드 촬영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각을 잘 맞춰줘서 당신은 내 눈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웃음)
- <킬리만자로>에서 <무뢰한> <리볼버>까지, 형사가 등장하는 누아르의 세계에 계속 매료되는 이유가 있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웃음) <킬리만자로> 이후로 <무뢰한> 전까지 계속 시나리오를 써왔는데 잘 안된 것들이 꽤 많다. 그러니까 공교롭게 영화화된 작품들이 그랬던 것이지 무조건 형사 주인공을 고집해온 것은 아니다. 이런 건 있다.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가 인터뷰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형사를 많이 연기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선과 악, 어둠과 빛 그 가운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더라. 그 말에 정말 공감했다. 형사들은 선의 세계를 지향함에도 악과 더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발을 잘못 디디면 악에 쉽게 노출되고 어둠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좋은 직업인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범죄자보다는 형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성이 내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인간의 죄에 관해 다룬 작품들을 많이 봐왔다. 죄인이 다시 나쁜 길로 빠지는 대신 어떻게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나는 인간이 가진 위대하고 아름다운 면모라고 여긴다. 예전부터 생각해온 이 주제를 계속 영화를 통해 다뤄보고 싶다.
- 인상 깊게 봤거나 좋아하는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작품에 반영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해온 이야기 중 하나가 <레미제라블>의 신부에 관한 것이다. 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변하게 한 그 신부인데,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신부에게 ‘새로 온 검사가 아주 훌륭하다’고 말한다. 동네의 위조지폐업자를 잡을 방법이 요원했는데, 검사가 기지를 발휘해 해당 업자에게 당신의 부인이 외도 중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린 거다. 업자는 당연히 노발대발하고, 뒤이어 부인에게도 편지를 써 결국 둘이 싸우고 사이가 틀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한 사람이 검사에게 밀고를 해 두 사람을 다 잡아넣는다. 검사의 전략에 사람들이 감탄할 무렵 신부가 말한다. “그래요, 그럼 이제 그 검사의 죄는 누가 심판하죠?”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가. <리볼버>는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무뢰한>은 이 이야기에서 차용한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 <리볼버>를 마무리 짓고 나니 어떤 점이 달라진 것 같나.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정말 어렵지만, <무뢰한>을 할 때보다 영화를 찍는 태도와 기술, 배우와의 소통 면에서 조금씩 더 발전했다고 느낀다. (그만큼 만족도도 높나.)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영화를 찍고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웃음) 다만 굳이 비교해보자면, 그래도 전보다 조금 나아간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