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오디세이]
[박홍열의 촬영 미학] 영화, 어둠의 계조를 잃다, HDR 시대에 ‘Black’은 어디로 갔을까
2024-08-28
글 : 박홍열 (촬영감독)
<초록물고기>

글로벌 OTT가 HDR이란 용어를 들고 나오기 전까지 영화 속에서는 풍부한 블랙의 계조(밝기의 단계)를 만날 수 있었다. HDR은 High Dynamic Range의 약자로 이미지 암부의 블랙부터 하이라이트의 화이트까지 밝기의 단계가 더 넓어지고 많아진 것을 말한다. 블랙의 표현이 풍부하다는 OLED TV가 등장하고, 핸드폰 디스플레이도 HDR을 지원한다고 광고한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그간 보지 못했던 블랙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막상 우리는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와 시리즈물들에서 블랙의 계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둠이 많은 공간에서 그 공간 안에 배치된 어둠과 각각의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블랙의 계조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화면 속 사람이 갖고 있는 블랙도 마찬가지다. 블랙의 계조가 풍부한 머리카락의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의 검은 머리카락 덩어리로 보이기 일쑤다.

영상기술은 휴먼 비전 인간의 눈과 똑같이 보이는 것을 목표로 발전해왔다. HDR도 그 목표 중 하나다. 인간의 눈처럼 다양한 밝기의 단계를 화면 안에 담으려는 것이 HDR이다. 현재는 이론적으로 네거티브필름보다 더 넓게 빛과 색을 담아낼 수 있는 카메라와 디스플레이 장치가 개발되었고, 실제 영화와 드라마 현장에서 사용 중이다. 글로벌 OTT에서 제작하는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 콘텐츠는 HDR로 작업한다. 촬영 현장에는 HDR이 가능한 카메라를 사용해야 하고, HDR 모니터로 모니터링할 수 있어야 하며, 후반작업도 당연히 HDR 워크플로를 거쳐야 한다. 일반적 영화 현장도 필름보다 더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가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고 인간의 색 인지 공간과 비슷한 디지털 색 공간에서 후반 색보정 작업을 하고 있다. 디지털은 빛을 수학적 연산 처리로 표현하기 때문에 필름보다 블랙의 표현력이 훨씬 뛰어나다. 디지털카메라의 표현력도 색보정 장비의 색 표현력도, 디스플레이의 표현력도 훨씬 높아졌는데, 왜 우리는 풍부한 블랙의 계조를 볼 수 없게 된 것일까?

<초록물고기>

블랙은 어둠 속에서 가장 잘 보이고 어둠 속에서 가장 잘 빛난다. 블랙의 계조가 가장 좋다는 OLED 디스플레이에서 블랙을 잘 보려면 주변의 빛이 없어야 한다. 디스플레이 주변의 광량이 증가할수록 화면 속 블랙이 사라진다. 그래서 외국의 전문 영상기기 전시장에서 OLED 디스플레이 홍보관은 외부 빛을 차단한 블랙 공간 안에서 기기를 전시한다. 또한 블랙의 계조가 눈에 잘 보이려면 디스플레이가 커야 한다. 1m 줄에 1cm 간격으로 블랙부터 화이트까지 한 단계씩 칠해본다. 그리고 이 줄을 강하게 압축해 10cm로 줄인 것을 상상해보자. 1m 줄과 10cm 줄 어느 줄이 계조가 잘 보일까? 당연히 길이가 긴 1m 줄이 계조가 잘 보일 것이다. 암부 블랙의 표현력이 잘 드러나려면 디스플레이 크기도 클수록 잘 보인다.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컴퓨터 모니터나 HDR을 지원하는 핸드폰에서는 블랙의 계조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블랙의 계조를 만나려면 어두운 블랙박스 공간 안에서 큰 스크린으로 봐야 진정한 블랙의 계조를 만나볼 수 있다. 결국 영상 이미지 속 블랙을 만나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은 극장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극장에서 만나는 근래 한국영화에서도 블랙의 계조를 보기 어렵다. 다시 한번 질문하게 된다. 철저하게 외부 빛이 차단된 큰 스크린의 극장 공간에서도 무엇이 블랙의 계조를 만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첫째, 촬영장에서 빛의 밝기에 관한 결정을 모니터에 의존하면서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촬영장에서는 카메라 이미지가 곧장 그대로 모니터에 보인다. 너무 쉽게 화면이 보이면서 오히려 어둠의 다양함은 보지 못하고 더 선명하고 밝게 보이는 것들에만 집중하게 됐다. 필름은 이미지의 밝기를 모니터가 아닌 노출계로 측정해 밝기를 조절하고 이미지를 만들었다. 렌즈 조리개 값 중 하나를 기준으로 노출계를 통해 화면 곳곳의 밝기를 일일이 결정하고 조정했다. 모니터로 확인할 수 없기에 프레임 안에 어느 빛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디지털 촬영 현장에서는 카메라를 켜면 모니터로 곧장 보이기 때문에 각자 눈에 보이는 선명한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블랙의 계조인 것이다.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화면의 깊이와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블랙의 계조는 프레임 밖으로 점점 밀려났다. 둘째, OTT의 대두 후 블랙의 계조가 사라졌다. 블랙과 하이라이트의 계조가 풍부하다는 HDR 이미지를 들고 등장한 글로벌 OTT가 오히려 빛의 계조를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OTT는 소재의 다양성과 함께 직접적이고 자극적 소재와 이야기 생산 구조를 만들었다. 이미지도 이와 맞물려 함께 작동하고 있다. 이미지가 선명하면서 두드러져 보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것이 블랙의 계조를 없애고 블랙을 하나의 덩어리로 고정하는 것이다. 계조가 없는 강한 콘트라스트 이미지들로 채우는 것이다. 더 선명하고 한번에 눈에 들어오는 확실히 각인된 이미지, 풍부한 감각의 이미지보다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센 이미지의 생산을 OTT는 이미지 창작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유도했다. 촬영자와 후반작업 작업자들은 그들이 가진 계조를 만들고 표현할 수 있는 무기들을 반납하고 더 선명하고 각인된 이미지를 위해 블랙의 계조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있다.

계조

영화 속에서 암부의 블랙은 없음이 아니다. 블랙의 계조가 풍부할수록 그 어둠 안에서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과 의미가 솟아난다. 블랙은 다양성이다. 영화 속 블랙의 계조는 블랙홀처럼 모든 빛을 삼켜 존재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화이트홀처럼 블랙홀이 삼킨 어둠의 빛을 반대로 뿜어내는 무한으로 가득한 빛나는 어둠이다. 누아르영화 속 어둠은 그 어둠 속에 감춰진 진실이 숨어 있다. 주인공은 그 진실을 찾아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액션영화에서 어둠은 폭발하는 화염의 근원이다. 어둠이 있기에 치솟는 불길이 보이고, 어둠 속에 예비 동작이 있기에 액션의 타격을 보여줄 수 있다. 멜로에서 어둠은 감정을 숨기고 지연시켜 사랑의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한 응축이다.

이창동 감독의 필름 작품 전체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에 테크니컬 슈퍼바이저로 참여한 적이 있다. <초록물고기> 네거티브필름 4K 디지털 스캔본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오리지널 네거티브필름 위에 각인된 ‘블랙’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유독 화면 안에 어둠, 블랙이 많다. 1996년, 30여년 전에 만든 영화인데 영화 속 그 많은 블랙 중 단 하나도 같은 블랙이 없다. 한 화면 안에 다양한 블랙의 계조들이 곳곳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그토록 다양한 블랙의 계조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잃어가는 것들이 많다.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블랙들을 극장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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