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자회사 NM(new marriage) VIP팀에 인지가 적을 둔 지도 6년차가 되었다. 일반적인 결혼정보업체의 목적은 두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고 최종적으로 이들이 결혼에 종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NM 직원들의 업무는 다르다. 이들은 VIP 회원들이 곧바로 결혼식부터 올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NM 직원들은 본인이 직접 기간제 부인 혹은 기간제 남편으로서 계약기간 동안 회원들의 곁을 지킨다. 대학생 시절, 인지는 어머니가 주도한 모종의 사건으로 양성애자인 자신의 애인을 진창으로 몰아넣고 그와 헤어져야 했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입사한 회사였지만 인지는 NM의 업무와 대우에 적정한 만족감을 느낀다. 일전에 소개팅으로 만났던 엄태성의 집요한 스토킹으로부터 고통받던 중, 인지는 전남편 중 한 사람에게서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등을 펴낸 김려령 작가가 9년 전, 자신이 집필했던 소설 <트렁크> 개정판과 함께 돌아왔다. <트렁크>의 특징은 NM과 직원들의 업무를 체계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보여주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NM의 결혼은 체계적이다. 처음 상대를 고르고 계약기간을 설정하는 것부터 문제가 생겼을 경우, 가령 결혼 생활 중 VIP 회원이 폭력을 휘둘렀거나 감정이 생겨 직원에게 청혼을 하고 둘 사이에 원치 않는 아이가 생긴 것 등 다양한 사례를 단계적으로 구분해 곧바로 처리한다. 사랑의 결실이자 정상 가족을 향한 최종 관문으로 여겨져온 결혼을 계약상으로 철저히 차단하며 사랑이란 감정의 실체,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 계약 결혼으로 만나 사랑이 싹텄다는 흔한 로맨스 서사를 <트렁크>에선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트렁크>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이유가 된다.
완독한 후엔 서현진, 공유 주연의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를 볼 것을 추천한다. 김려령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노인지, 그의 다섯 번째 남편 한정원, 엄태성, 정원의 전 부인 이서연의 관계를 중심으로 각색됐다. 서늘하게 마무리된 <트렁크>의 마지막 장 이후의 서사가 그대로 펼쳐지는 착각을 안길 것이다.
한번쯤 결혼해보고 싶은 여자. 그녀는 내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