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내믹함으로는 내로라하는 대한민국에선 왜 이토록 유난히 반사회적 활동이 반복되어온 걸까?” <스위트 솔티>에 수록된 단편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을 읽다가 SF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금 여기를 연상시키는 문장을 만났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달린 주석은 이렇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첫 희생자인 김경철씨는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김경철씨를 비롯한 국가 폭력 희생자들의 명복과 안식을 기원합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미래사회에는 타고난 그대로의 몸인 플랫보디와 대조되는 ‘스마트보디’가 존재한다. 그런데 시대 리터러시가 낮은 ‘시대 지체자’들을 상대하는 상담업무를 하는 화자는 장형철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몸의 시간이 정지한 상태로 미래로 건너온 장형철은 간단한 시력 교정을 통해 약시를 고칠 수 있는 현재에 머물기보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화자는 2130년으로 갑작스레 이동해 시대 지체자가 되고 나서야 장형철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곳의 모든 것과 불화할 때 제대로 살고 있는 거라고” 되뇌는 순간, 독자는 비로소 장형철의 마음을, 화자의 마음을 알게 된다. 시대 지체자로서 균열을 감각하는 사람만이 시대의 기록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 지체자라는 개념은 첫 번째 수록작인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과도 연결된다. 황모과 작가 본인의 이력처럼 만화가가 되겠다는 각오로 도쿄 생활을 시작한 ‘나’는 치매에 걸린 이웃 할머니를 알게 된다. 그가 내뱉는 정체불명의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할머니의 고향 오메라시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면서 히로시마로 강제 동원되어 피폭된 ‘나’의 외할아버지와 얽힌 가족사를 돌아본다. 경계에서 생활하는 ‘나’는 폭죽을 보면서 생각한다. “꺼져가는 걸 보면서도 타오르는 중이라고 여기는 건 일본식 허무 같았다. 그럼 타오르는 걸 보면서 어차피 꺼질 거라고 확신하는 건 한국식 냉소일까?” 답을 정해놓고 묻는 질문에 오답으로만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황모과 작가의 소설 주인공은 그 자신이 속한 세계의 타자일 때가 많다.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고는 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황모과의 주인공들은 필연적으로 경계인일 수밖에 없고 늘 양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한 세계에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는 감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넓은 시야가 인상적인 소설집이다.
성착취물을 구매했던 수십만명 중 약한 수준의 처벌이라도 받은 경우는 극히 일부였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웠다. 그들은 평온하게 나이 들어 여전히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었다. 예비 신랑들이 40년 전 어떤 삶을 살았던 남성일까 떠올려보던 나는 그 근엄한 얼굴들의 삶의 궤적과 정체를 완전히 알아챌 수 있었다.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