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머티즘을 오래 앓은 수환(김설진)과 실의에 빠져 알코올중독이 된 영경(한예리).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삶을 버티던 두 남녀의 사랑이 담긴 권여선 작가의 단편 <봄밤>을 읽고 강미자 감독은 언어로 포착할 수 없던 감각을 마주했다. “나이가 들면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깊이 고여 있는 아픔이 찾아온다. 읽는 내내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울음이 목젖까지 차올라도 쉽게 뱉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 속 영경의 울음이 나를 건드렸다.”
영화화를 결심하자 강미자 감독은 55살의 영경에게서 배우 한예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한예리는 강미자 감독의 첫 장편영화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서 연변의 중학생 숙이를 연기했었다. “배우가 승낙하기 전부터 영경은 한예리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한예리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고 슬프고, 아름답고, 고통스럽다는 감상을 전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소설 속 55살이었던 영경은 한예리와 함께 40대 초반으로 바뀌었다. 지난한 사랑의 상대였던 류머티즘 환자 수환은 현대무용가 김설진이 맡았다. 수환의 캐스팅에는 한예리 배우의 제안이 주효했다. “한예리 배우의 추천으로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김설진 배우가 그간 보였던 춤에 대한 이미지보단 그분이 인터뷰한 영상의 스틸 장면에서 수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품에 들어가자마자 강미자 감독은 두 배우의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려 했다. “인공적인 꾸밈 하나 없이 그들의 육체와 연기로만 접근해야 우리가 구현하고 싶은 감정에 다가설 수 있었다. 따라서 사소한 분장 하나 없이 배우들이 힘들게 감량한 육체를 온전히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소설 속 수환과 영경은 12년의 세월을 서로 아파하며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봄밤>의 이야기가 스크린으로 옮겨질 때 강미자 감독은 전혀 다른 시간선 위에서 12년간 켜켜이 쌓은 관계를 담고자 했다. 이는 “소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단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정수만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선택이었다. “12년의 공백을 영화적으로 풀어낼 방법이 중요했다. <봄밤>은 차라리 시간이 부재한 영화다. 두 남녀를 무한함 속에 놓고 싶었다.” 전혀 다른 영화적 시간을 구현하게 만든 것은 바로 “반복과 암전”의 숏들이다. 죽음이 언뜻 비치는 술자리와 취한 영경을 업은 수환의 걸음이 반복될 때마다 그 사이를 암막의 이미지가 가로막는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강미자 감독은 “12년이란 시간이 영화 속에서 무한하게 확장”하게 만들었다.
소설 속 시제와 서사를 덜어낸 자리에 <봄밤>은 두 사람의 사랑을 남긴다. 알코올중독자와 중증 류머티즘 환자의 만남은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단점을 지적하거나 보완하려는 노력 대신 두 사람은 그저 죽어가는 서로를 곁에서 최대한 오래 버텨내려 한다.” 두 사람이 안간힘을 써서 버텨내는 사랑은 영화의 제목처럼 어둑한 밤하늘 아래서 아로새겨진다. 강미자 감독에게 밤은 “영경과 수환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이자 시간”이며 동시에 “두 사람의 죽음을 보듬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보듬는 관계. 강미자 감독이 <봄밤>에서 느낀 통각은 어쩌면 “모든 걸 잃었을 때 만난 두 사람의 아무것도 없는 서로를 껴안는 포옹”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