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내가 되고 싶은 얼굴’, <새벽의 Tango> 배우 권소현 <그를 마주하는 시간> 배우 석희 <환희의 얼굴> 배우 정이주
2024-10-25
글 : 이자연
사진 : 박종덕 (객원기자)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를 두고 정한석 프로그래머는 올해 한국영화에 두드러지는 경향으로 ‘다양한 여성 인물형과 출중한 신인 여배우들의 출현’을 꼽았다. 이에 따라 이번 영화제에서 새로운 담론의 물결을 만들고, 그에 동화된 관객의 눈을 마주한 세 독립영화 <새벽의 Tango> <그를 마주하는 시간> <환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먼저 <새벽의 Tango>는 PCB공장에서 일하는 세 여자의 미묘한 관계 변화를 다룬다. 배우 권소현이 시종일관 희망을 잃지 않는 주희를 그렸다. <그를 마주하는 시간>은 문예창작과 교수 미투 사건 이후의 시간을 담는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숨기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연의 애처로움은 배우 석희를 만나 역동적인 현실성을 갖춘다. 마지막으로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환상곡 <환희의 얼굴>은 배우 정이주의 해사함으로 환희를 완성했다. 권소현, 석희, 정이주 세 배우는 작품 속에 유려하게 녹아드는 사이에도 영화에 반영된 현대사회의 결핍과 트라우마적인 슬픔을 순조롭게 그려냈다. 이제 이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샛길을 좇아갈 시간이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영화의 한끗을 완성한 권소현, 석희, 정이주 배우를 만났다.

- 권소현 배우는 <새벽의 Tango>에서 주희를, 석희 배우는 <그를 마주하는 시간>에서 수연을, 정이주 배우는 <환희의 얼굴>에서 환희를 그렸다. 인물별로 어떤 특징을 주요하게 내세웠나.

권소현 <새벽의 Tango>는 탱고를 통해 관계를 배워나가는 세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깊은 상처가 남은 친구, 이기적인 친구, 착해 보이기만 한 친구가 일터에서 발생한 사건에 각기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희는 착해 보이기만 한 친구다. 처음엔 살짝 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주희가 이렇게 선할 수 있는 건 그가 남들보다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대한 타인을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을 잘 드러내고 싶었다

석희 <그를 마주하는 시간>은 제목만 보면 ‘그’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수연이 자신을 마주해간다고 생각했다. 문창과 미투 이후 수연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문제를 외면한다. 애초 자신은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는 피해자가 되기 위해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수연은 관객에게 괴로움을 주는 인물이다. 오랜 시간 자신도 모르게 쌓아온 고통 또한 굉장히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65분의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의 영화다.

정이주 단편소설 모음집 같은 <환희의 얼굴>은 총 4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챕터마다 환희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 각 에피소드는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환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특정한 순간을 그러모았다. 현실 같기도 하고 상상 같기도 한. 하지만 그 공백을 내 마음대로 채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해석을 넣기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희의 감정과 행동에 집중하려 했다. 관객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길 바랐다.

장면을 파고드는 여자들

<새벽의 Tango>

- 인터뷰 진행 날짜 기준으로 한창 부산영화제가 진행 중인 지금, 관객과의 만남은 어떠했나.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공개하고 관객 반응을 살필 수 있었다.

권소현 주희의 전사를 궁금해하는 관객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타인을 배려하는 인물의 삶이 궁금했던 것 같다. 그래서 “주희는 어떻게 살아왔나요?”라는 질문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나는 이전에 김효은 감독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을 토대 삼아 답했다. 주희는 워낙 사랑이 많은 인물이라 그런 수용력이 가능하다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다가가는 주희의 마음을 알고 나서야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원래 나는 캐릭터의 결핍을 먼저 살피는 편인데 내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정이주 (인터뷰) 바로 전날 첫 관객과의 만남을 진행했다. 너무 떨렸다. 영화를 잘 못 볼 정도였다.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기침을 해도, 물을 마셔도, 하품을 해도 모든 게 영화 때문인 것 같아서 긴장됐다. 관객들이 질문을 건넬 때마다 “영화를 잘 봤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는데 그 말이 그렇게 좋더라. (웃음)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봐서 감동적이었다.

석희 나는 내일 첫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너무 떨린다! 공개 처형을 기다리는 것 같다. (웃음)

정이주 그래, 공개 처형! 정말 그 말이 딱이다. 어제 나도 질문을 받았는데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 세 캐릭터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묘하게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이들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음을 관객에게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각자 어떤 방식으로 현실성을 뒷받침하고자 했나.

정이주 그 이상함이 왠지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웃음) 이제한 감독님은 환희를 굉장히 자유롭게 두셨다. 많은 것을 맡겨주셔서 디테일한 지점은 시나리오 맥락 안에서 엮어나가야 했다. 또 <환희의 얼굴>은 촬영의 힘을 받았다. 눈이나 얼굴을 정면에서 크게 잡는 장면이 거의 없고 대부분 측면을 바라본다. 그렇게 되면 관객과 인물 사이에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인물에게 너무 몰입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그 거리감을 잘 활용하면서 연기하려 했다. 환희는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묘한 집착과 폭주도 이유를 알 수 없고. 도대체 환희는 왜 그랬을까? (웃음) 그런데 그게 환희의 매력이다.

권소현 주희의 태평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단단한 심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잘 드러내려 노력했다. 주희는 ‘땅고’(Tango)에 집착한다. 그건 아마도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땅고를 추려면 무조건 상대방이 필요하니까. 땅고는 같이 걷는 거, 같이 마주하는 거, 같이 호흡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런 면에서 주희는 다른 사람들과 삶의 속도가 다르다. 주희가 이럴 수밖에 없는 조금 특별한 전사도 있다. 편찮으신 아버지와 집에서 TV를 보는데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방영되었고 그중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편을 보게 된다. 그때부터 주희는 땅고를 통해 관계를 배우고 싶어 한다. 자기만의 위로를 찾아나서는 점들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땅고는 한달가량 배웠다. 배우 이연과 리더, 팔로워로 나누어 연습하면서 발을 많이 밟았다.

석희 왠지 리더였을 것 같다!

권소현 리더였다가 점점 팔로워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면서 땅고도 조금씩 재밌어졌다.

석희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내가 수연에게 완전히 이입하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수연의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배우로서 인물에게 정말 죄책감이 드는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정말 자연스러운 반응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보는 수연의 시선 또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그를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는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미스 슬로운> 의 여성들처럼.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나 피해자를 다루는 작품에는 관객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흐름이나 과정, 결과를 바라는. 그런 점에서 <그를 마주하는 시간>은 예상을 벗어난다. 수연의 몫으로 남겨질 죄책감과 후회까지 생각하면서 그려내보려 했다.

<환희의 얼굴>

- 이번 영화에서 자신에게 가장 모험적이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가장 공들인 신이 있을 텐데.

정이주 나는 첫 번째 챕터 ‘소설가의 집’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상담실에서 남영과 12분가량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게 원테이크다. (일동 탄성) 너무너무 길었다. 이 장면을 위해 남영 역의 김시은 배우와 연습도 여러 번 하고 이제한 감독님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많이 물었다. 체력 문제로 여러 테이크를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배우로서 환희의 여러 면모를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는 게 너무너무 행복했다.

석희 회의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전달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여러 버전으로 찍었는데 촬영하는 내내 정말 심장 떨렸다. 수연이 속내를 처음으로 털어놓는 순간이지만 그조차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책임감을 많이 느꼈다. 에둘러 자신을 보호하려는 태세 변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려고 신경 썼다.

권소현 공장에서 사고로 손을 다친 현우의 이야기를 들은 주희가 지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내가 책임지고 싶다고. 선하게만 보이던 주희가 사실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신을 찍기 전까지 사실 나도 주희에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장면을 기점으로 인물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 지점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이외에 공들인 건 아무래도 땅고 추는 모든 장면이 아닐까? (웃음)

- 연기의 바탕이 되는 가치관이 있다면.

권소현 <그 겨울, 나는> 이후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바로 핍진성이다. 여러 작품에 참여하면서 실제 나와는 다른 인물을 마주하지만 그 사이에 어떻게든 진짜 같고 그럴듯함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계속 “이게 진짜 같아?” 물으며 검열하기도 하고. <새벽의 Tango>에서는 주희가 세 여자의 관계 안에서 너무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게 연기했다. 다른 인물과의 균형을 이루는 과정도 필요하다.

석희 그 ‘진짜 같음’이 중요한데, 정말 어렵다. 나는 최근 연출자와 배우간의 이미지 공유가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의 판단에 빠져서 작품이 의도한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 그런 날이면 정말 괴롭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한 인물의 캐릭터를 살려보려 했는데 나중에 보니 너무 만화적이더라. 그래서 나를 너무 믿지 말고 감독님과 더 적극적으로 공유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를 마주한 시간>에서도 감독님과 소통을 많이 하면서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조절해나가려 했다.

정이주 이거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가 있다. 바로 사람과 삶. 연기도 영화를 만드는 것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잘 살아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 카메라 앞에서는 캐릭터가 되어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독립영화의 작은 프로덕션에서 서로를 돌보며 함께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한명 한명의 역할이 너무 귀한 만큼 모두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라는 감각이 독립영화의 큰 자산이다.

독립영화를 향한 마음, 경험, 연결

<그를 마주하는 시간>

- 세 배우 모두 독립영화를 통해 성장을 거듭했다.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정이주 프로덕션 인원이 적은 만큼 서로를 다정하게 챙기는 끈끈함. ‘누군가가 대신 해주겠지’가 절대 안되는 구조다. (웃음) 대신 해줄 거라 생각한 일을 하는 게 나이거나 혹은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료다. 이런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환희의 얼굴>은 제주에서 한달 동안 머물며 촬영했다. 숙소에서 모두 부둥켜 지내서인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서로를 가족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환희가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돌아간 작은 식당도 사실 스태프들이 밥먹던 곳이다. “저희 한달 동안 여기서 밥을 굉장히 많이 먹을 건데요, 촬영을 2시간만 해도 될까요?” 하고 섭외했다. (웃음)

석희 나도 최근 촬영한 독립영화에서 스태프들이 이용하는 밥집에서 촬영했다. 점원 역할을 구해야 하는데 상황상 스태프들이 맞지 않아서 사장님이 대신해주셨다. 여러 테이크를 가니까 사장님도 대사를 알아서 해주시더라. (웃음) 독립영화는 서로간에 소통이 확실하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스태프간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서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내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여기에 함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와줄 것 같다. 안도감이랄까. 우리가 다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좋다.

권소현 생각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까. (웃음) 쥐어짜냄! (일동 폭소) 독립영화는 낭만과 열정이 뭉쳐진 느낌이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좋다. 될 때까지, 할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어떻게든 해낸다. 아이디어 회의를 하더라도 ‘자, 머릿속에 있는 거 모두 꺼내보자~’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쥐어짜는 환경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악바리와 거기서부터 오는 창의성.

- <새벽의 Tango> <그를 마주하는 시간> <환희의 얼굴>가 관객에게 어떤 간접경험을 선사하길 바라나.

석희 수연이는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수연의 감정 변화와 흔들림, 동요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관객이 있다면 이 영화는 존재 목적을 잘 달성한 것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영화는 관객에게 수연을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수연을 보고 느껴지는 모든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 간직하는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권소현 생각보다 삶에 경계가 크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면 좋겠다. 알고 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사람들, 나는 모르는 결핍을 안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내 주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느끼길 바란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길!

정이주 <환희의 얼굴>은 관객에게 오롯이 주체성을 부여한다.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내릴 수 있게. 극장 안에 관객 수만큼의 다양한 의견이 <환희의 얼굴>에 존재할 수 있다. 마음대로 해석하세요! (웃음)

- 마지막으로 다음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마음껏 피력해 보자.

권소현 그동안 아프고 착하고 슬픈 역할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번엔 살인마. (웃음)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

석희 얼마 전 복싱 관련한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글쎄 내가 몸을 너무 잘쓰더라. 엄청 멋진 액션 작품 하고 싶다.

정이주 그럼 나는 히어로물! 광활한 그린스크린을 점령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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