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남자는 우연히 이전 연인을 만나 긴 대화를 나눈다. 별것 없어 보이면서도 많은 의미를 지닌 대화가 공기 중으로 흩어질 즈음 그는 현재 연인에게 발걸음을 돌린다. 단편영화 <달팽이>에 2막 ‘서울극장’, 3막 ‘소우’를 붙여 장편영화 <미망>을 완성한 김태양 감독은 이름 없는 다섯 인물 사이에 보편적인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저장시켰다. 4년. <미망>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코로나19로 길어진 제작 기간은 김태양 감독의 낙관적인 시선을 만나 하나의 영화적 재료로 거듭났다. 물리적 시간이 흐른 만큼 영화는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의 내외적 변화를 유려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1막의 들뜬 남자와 여자가 3막의 예기치 못한 공간에서 차분하게 재회하고, 2막에서 여자는 직선처럼 곧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갈지자로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하는 자유로운 구성은 옴니버스의 재미를 구가하다가도 3부작으로 완전성을 갖춘 트릴로지의 미적 감각을 내세우기도 한다. 서울을 이토록 아름답게 바라본 영화가 있을까.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서 촬영된, 정제되지 않은 도행의 서사가 우리 주변부에 널브러진 일상적 흔적을 좇는다. 화려한 대도시가 감춰둔 서글픔과 쓸쓸함은 이내 고요하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김태양 감독이 조형하고 배우 이명하, 하성국, 박봉준, 백승진, 정수지가 세공한 세상은 묘연하고도 곱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미망>의 김태양 감독과 배우 이명하, 하성국, 박봉준, 백승진, 정수지 인터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