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뤼크 고다르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에 영화감독의 자화상 작업을 착수한다. 만들어진 영화엔 <JLG/JLG: 12월의 자화상>(이하 <JLG/JLG>)이란 제목이 붙는다. 영화잡지 <필름 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이 영화의 제목이 ‘고다르에 의한 고다르’ (JLG by JLG)가 아니라 단지 ‘고다르/고다르’ (JLG/JLG)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화감독의 자화상이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하나의 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뉜 위계 없는 형상을 조직하는 것이다.
<JLG/JLG>는 픽션과 현실, 신원 미상의 사진과 실제의 영화감독, 눈앞에 보이는 세계와 스크린에 영사된 이미지를 교차한다. 고다르는 ‘고다르에서 벗어난 고다르’의 자화상을 스크린에 새긴다. 고다르는 고다르를 이중인화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포지티브로 태어나 네거티브를 요구받는다”라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는 고다르는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이미지로 이루어진 필름의 물질성에서 영화의 근원적인 원리를 찾는다. 영화는 둘로 분리된 이미지의 외양(포지티브/네거티브)으로 통합된 세계를 형성한다. 그 안에서 증식된 가상의 경험이 생겨난다. <JLG/JLG>는 영화감독의 자화상이자 영화가 지나쳐온 역사의 반영적 자화상이며 극장에서 투사되는 영화라는 경험 자체의 자화상이다. 이 말을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똑같이 돌려주고 싶다. 에리세는 영화감독 미겔이 그의 편집기사 맥스와 함께 다큐멘터리에 상영될 영화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영사기에 돌아가는 필름 릴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노출한다. 영화는, 둘로 나뉜 이미지가 형성하는 하나의 세계다.
둘로 나뉜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로 시작한다. 미겔은 1990년 오랜 친구인 훌리오를 주인공으로 <작별의 눈빛>이라는 영화를 연출하지만, 훌리오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촬영이 중단된다. 미겔의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훌리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실은 한순간에 영화를 둘러싼 모든 관계를 무너뜨린다.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실종자의 미스터리 앞에서 현실의 기억과 증거는 소멸해가고 있다.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는 현실이 파괴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시작한다. 에리세는 현실의 실패를 만회하는 부활의 장소에서 영화의 경험이 솟아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미겔이 만든 영화 속 영화는 도입부에서 야누스 조각상을 비춘다. 영화에 삽입된 조각은 몇 가지 함의를 포함한다. 견고하게 정지해 있는 조각은 영화에 불가피하게 깃드는 재현의 운동성을 중단시키는 불손한 매개이다. 침묵하는 조각의 얼굴은 숏과 리버스숏의 교환으로 채워지는 영화의 고전적 언어를 교란하는 무관심한 세계를 표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앞뒤에 붙은 두개의 얼굴이 하나의 조각을 구성하는 야누스상의 형태는 곳곳에 편재하는 영화의 원리를 물리적으로 마주하게 한다. 서로의 눈빛을 바라볼 수 없는 두개의 얼굴로 만들어진 조각상. 이 조각은 하나의 몸이 둘로 나뉘는 영화의 운명을 환기할 것이다.
야누스 조각의 모순적인 미장센이 보여주는 것처럼, 빅토르 에리세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둘로 나뉜 얼굴을 여러 곳에 배치한다. 미겔의 영화 <작별의 눈빛>에서 훌리오가 연기한 역할인 프랑크는 유태인 레비의 딸을 데려오라는 의뢰를 받는다. 레비의 딸은 프랑스에서 불리던 ‘주디스’라는 이름과 중국에서 불리는 ‘차오수’로 나뉘어 있다. 영화 속의 훌리오를 찾는 미겔은 실패한 영화감독이자 성공한 소설가다. 그의 이름은 미겔이지만 휴양지의 해변에서는 마이크로 불린다. 미겔의 오랜 연인인 로라는 미겔과 훌리오를 차례로 만난 바 있다. 미겔이 찾는 옛 친구는 사라진 배우 훌리오와 요양원에서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가르델로 나뉜다. 그리고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인 <작별의 눈빛>의 필름이 있다. 처음에 이 필름은 단지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으로 활용되는 재료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화의 끝에서 미겔의 필름은 훌리오의 기억을 되돌리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증거물이 된다. 끝없는 대비와 대칭. 에리세가 이 영화에서 시도하는 것은 서로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의 교환을 성립시키는 것,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라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불가능한 기억에 다가서는 것이다. 이 영화는 수많은 종류의 ‘두개의 얼굴’이 복잡하게 얽힌 채로 유발되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산한다. 하지만 두개의 얼굴은 아직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 두 얼굴의 시선이 마주하는 몽타주는, 아직 이 영화가 실행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무능한 영화
망각과 회고의 감각을 다루는 이 영화의 화면에는 기억을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의 재현으로 가득하다. 사라진 훌리오를 찾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리허설 과정이 녹음된 녹음기, 옛 연인 로라에게 선물한 미겔의 첫 번째 소설, 로라가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의 선율, 훌리오의 기록이 적힌 신문 기사, 미겔의 죽은 아들이 그린 만화, 훌리오가 간직한 <작별의 눈빛>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예술과 매체에 남겨진 기록이 과거를 되짚는 미겔의 여정을 채운다. 그런데 이토록 복잡하게 뒤얽힌 매체의 기록들 사이에서 영화는 무기력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는 무능한 예술이다. 완성되지 못한 미겔의 영화는 훌리오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의 기록이 남아 있는 증거로 제시되지만, 실종자의 실체에 가닿을 수 없는 무력함을 노출한다. 미겔은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무책임한 영화감독이면서 훌리오의 행방을 찾지 못한 무능한 조사관이다. 사라진 훌리오의 궤적을 뒤따르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서사에서 영화는 추적을 방해하고 주변을 무의미하게 배회한다.
빅토르 에리세는 이 무능한 예술인 영화에 두 번째 기회를 건넨다. 영화의 절반 지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탐문의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되찾는 대상과 방법이 달라진다. 미겔은 어느 수녀원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가르델이 훌리오인 것 같다는 연락을 받는다. 수녀원에 도착한 미겔은 가르델의 모습을 보고 그가 훌리오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가르델은 역행성 건망증으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추적의 형식마저도 둘로 나눈다. 미겔은 두번의 추적을 반복한다. 전반부의 이야기가 실종된 훌리오의 삶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형태로 전개된다면, 후반부는 가르델의 삶에 기억을 채우는 형태로 주어진다. 이와 결부된 또 다른 변화는 전반부에서 미겔과 훌리오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매체의 기록이 후반부의 수녀원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른 매체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영화와 영화의 물질적 토대인 사진적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무능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영화의 흔적만이 존재한다. 이곳에서 에리세는 둘로 나뉜 미스터리, 가설, 변주로 영화라는 예술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미겔과 가르델은 반복적으로 수녀원 숙소 앞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두 사람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찍힌 사진을 꺼내고, 둘만 아는 방법으로 매듭을 풀고, 서로의 손을 만지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가르델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20세기의 영화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런 사물과 몸짓을 매개로 매혹적인 영화의 순간들을 고안해내고 스크린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겨두었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의 특권적인 몸짓은 기능을 잃는다. 대화하고 손짓하고 바라보고 재회하는 몸짓의 조건으로도 영화는 기억을 되돌리지 못한다. 영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벤치 앞에서, 또다시 무능력의 예술이 된다.
망각의 영화(관)
이토록 무능한 영화는 그러나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다. 스크린은 영화의 무능력을 자각하는 장소다. 눈앞의 세계가 둘로 나뉜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면, 영화는 그 무능함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장치로 거듭날 수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비로소 낡고 오래된 영화관에 도착한다. 미겔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훌리오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작별의 눈빛>을 상영하는 극장에 관객을 초대한 미겔은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일일이 지정해준다. 스크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두명의 수녀를, 훌리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방송국 프로듀서 마르타와 가르델을 찾아낸 수녀원의 직원 벨렌을 그 앞에, 훌리오의 딸 아나를 스크린 가장 가까이에 앉힌다. 마지막으로 가르델에게 아나의 옆자리에 앉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상영 시작을 알린 뒤 객석 맨 앞자리에 앉는다.
앉을 자리를 정하는 그의 요청은 ‘영화감독’인 미겔이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연출의 일부분이다. 그는 훌리오/가르델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탐사의 과정에 더 많이 개입한 순서대로 관객의 위치를 조정한다. 그의 ‘연출’에서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앉아야 하는 자는 미겔 자신이다. 미겔은 스스로 실패하고 무능한 예술의 한 조각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가 시도한 무능한 예술은 22년 전의 영화를 재생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의 눈앞에서 스크린 위의 훌리오가 보이고, 뒤편에 기억을 잃은 가르델이 있다. 그는 훌리오와 가르델이라는 공존 불가능한 두개의 얼굴 사이에 있다. 미겔은 비로소 극장에서 실현되는 얼굴과 시선의 배치를 통해 <작별의 눈빛> 속의 야누스 조각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마침내 미겔의 앞뒤로 서로 다른 두개의 얼굴(훌리오/가르델)이 나란히 위치한다. 이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는 두개의 얼굴을 앞뒤에 나란히 배치한 야누스적 건축의 장소다. 같은 의미에서 <작별의 눈빛>이 상영되는 오래된 극장은 이중적인 영화의 장소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첫 장면에서 지켜본 완성되지 못한 영화를 관객의 기억에 투영하는 뒤늦은 몽타주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 끝없이 둘로 나뉘던 한 사람의 얼굴을 하나의 장소에 겹쳐두는 재귀적 몽타주를 실현하는 장소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우리를 응시했던 영화
<작별의 눈빛>이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영화 속에서 프랑크를 연기한 훌리오는 레비의 딸 주디스 혹은 차오수를 데리고 의뢰인의 집에 되돌아온다. 미겔은 비스듬히 시선을 돌려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가르델의 얼굴을 지켜본다. 뒤돌아보는 미겔의 시선에서 우리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의 어둠으로 향한 오르페우스의 여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사(들)>에서 고다르는 “영화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도 죽지 않도록 한다”라고 말한다. 오직 이 어둠 속에서만이, 우리는 스크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시선 뒤에 머무는 또 다른 얼굴을 주시할 수 있다.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훌리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 너머로 전달된다. 가르델은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화면이 어두워진다. 검은 화면에 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영화는 두눈을 감은 채 영사기에 돌아가는 필름 소리를 들려준다. 가르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제거된 눈빛으로 스크린 속의 프랑크, 혹은 훌리오와 마주한다. 둘로 나뉜 얼굴은 이토록 단순하고 고전적인 시선의 결합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석에 앉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경험이 아니다. 어째서 가르델이 스크린 위의 훌리오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에리세는 회고와 탐문으로 채워진 이 아름다운 영화의 끝에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되살아난 영화를 기적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망각한 자의 눈이다. 기적은, 기억에 새겨진 과거를 되돌아보는 눈빛이 아니라 영사(projection)되는 빛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기억 없는 시선에 의지하는 경험이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자들의 시선에 이 몽타주는 주어지지 않는다. “드레이어 이후에 영화에 기적은 없어”라는 말을 공유하는 자들은 망각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자들이다. 에리세는 이 낡은 영화관에서 기억 없는 남자의 망각한 시선으로 영화를 다시 마주할 것을 요청한다. 이때 영화는 기억에 매개된 이미지가 아닌 단지 하나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솟아오르게 한다. 스크린에는 단지 ‘남자’, ‘소녀’, ‘눈물’, ‘시선’이 존재한다. 그 이미지가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기적은 영화의 것이 아닐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모든 기억을 잃고 두 눈을 감는 가리델의 시선을 빌려 무능력한 영화가 묘사하는 기적의 모양을 더듬거린다.
“아이는 무엇을 아는 것일까? 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알기를 원했던 세르주 다네라는 이 아이는 무엇을 알았던 것일까? ‘세계의’ 어떤 부재가 ‘세계의’ 이미지들의 현존을 훗날 요청하는 것일까? 나는 장 루이 셰페르가 그의 저서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에서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이라고 말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을 알지 못한다.” (세르주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