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성공한 작품을 새로운 감독과 배우를 고용해 다시 만들거나(리메이크), 기존 세계관은 유지하되 새로운 관객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는(리부트) 현상은 오늘날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종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리메이크와 리부트의 경계는 모호하다. 단순히 주연 캐릭터가 여성 배우로 바뀌었을 뿐인데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기존 세계관을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 <고스트버스터즈>(2016) 같은 경우가 그렇다. 전작의 내용을 이어받는 후속작과 전작의 과거 시간대를 무대 삼는 프리퀄 역시 구분되지 않는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에이리언> 시리즈의 7번째 작품인 동시에 1편과 2편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프리퀄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들이 과거지향적이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의존한다는 점, 원작의 타임라인상에서의 ‘현재’를 밀봉해두고 ‘과거’로 전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 과거는 새로운 미래다.
과거 히트작에 새로운 외피를 입힌 영화들이 지난 20년 사이 왜 이다지도 많이 양산되었는가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바로 ‘수요’일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이나다 도요시 칼럼니스트), 즉 ‘가성비’ 추구 지향의 오늘날 관객들에게 이미 한번 성공한 작품의 리메이크, 리부트 작품은 안전한 선택지다. 무리해 ‘도전’할 필요 없는 “이미 아는 맛”(이경희 SF작가)이니까. 망한 리메이크, 리부트 작품일지라도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대조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은 최소한의 인지적 즐거움을 확보할 수 있다. 어떤 일에서건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큰 제작비가 투입되는 사업 전반에서 포착되는 흐름이다. 제작사들은 ‘기대 감소 시대’라 불리는 장기 불황 속에서 이미 “관객이 확보된”(문동열 콘텐츠 칼럼니스트) 작품에 우선 ‘베팅’하기를 택한다.
리메이크, 리부트 열풍은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는 노스탤지어의 정서를 핵심 동력으로 삼는 퇴행 취향, 더 나아가 퇴행 ‘증상’처럼 보일 수 있다. <레트로 마니아>에서 사이먼 레이놀즈는 오늘날 문화가 과거에 대한 지나친 채굴로 “문화 생태적” 파국에 이를지 모른다고 진단하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프레드릭 제임슨을 인용하며 결국 미래에는 과거의 문화적 생산물들을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해 혼성 모방한 결과만이 남게 될 것이라 경고한다. 한편 <포에버리즘>의 그래프턴 태너는 우리가 과거에 몰두하는 까닭이 노스탤지어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스탤지어를 상실했던 무언가가 마음속 또는 현실에 잠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감각으로 정의한다면, 과거가 현재 속에 지속해서 존재하는 동시대의 현상은 ‘노스탤지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에 따르면 이 ‘다른 무언가’의 이름은 ‘영원주의’로, “과거를 현재 속에 계속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상실의 여지를 없애고 마침내 노스탤지어를 완벽하게 정복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노스탤지어를 ‘이용’하는 영원주의의 전략은 “시네마틱 ‘유니버스’, 클라우드 아카이빙, 음성 복제”와 같은 사업의 홍보 문구 속에서 흔하게 발견되지만, 그보다 (주로 우파) 정치인들의 연설 속에서 존재감을 강하게 과시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같은 구호가 그렇다. 모든 과거가 그러하듯 막상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일 ‘좋았던 옛날’에 대한 윤색된 추억을 ‘땔감’ 삼아서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정치는 실은 정치가 아니라 궤변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뻔히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기를 택한다. 미래는 이미 비관적이지만 과거는 아직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프턴 태너는 영원주의가 약속하는 달콤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노스탤지어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건강하게’ 성찰할 계기를 박탈할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퍼진 리메이크, 리부트 홍수 속에서 어떻게 영원주의라는 덫에 대항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이 덫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나 있을까? 이쯤에서 <매트릭스: 리저렉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무려 18년 만에 나온 <매트릭스> 시리즈의 4번째 작품인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한 ‘망작’이다. 개봉 당시의 나는 이 영화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년이 된 네오와 트리니티의 재결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고, 지나치게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미 (주로 남성) 우파의 구호가 된 ‘레드필’이라는 비유를 재탈환하려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글의 부속 재료쯤으로 활용하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던 한 장면, 전작에서 강하고 우아한 악역이었던 메로빈지언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해 헛간 구석에서 불쑥 등장한 장면을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이 장면에서 충격을 받지 않은 <매트릭스>의 팬은 없을 것 같다. 한때 세계관 최강자였던 그가 “기나긴 세월 끝에 드디어!”라고 외치며 마치 18년간 네오에게 복수할 때만을 기다리며 헛간에 잠복해 있었던 것 같은 설정(?)은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지 너무하기만 할까? 메로빈지언의 등장은 SF 고전이 된 <매트릭스> 시리즈의 패러디에 가까운 이 실망스러운 후속작이 어쩌면 스스로 ‘망작’이 되는 길을 택했을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에 심증을 더한다. 그가 18년 동안 네오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멈춰 있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18년은 착실히 흘러 배우들은 예전처럼 날렵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네오 일당이 메로빈지언 일당과 정신없이 대치하는 동안 네오 역의 키아누 리브스는 지나치게 정직하게 촬영되어 맥 빠지는 액션을 선보이고, 메로빈지언 역의 램버트 윌슨은 아예 프레임 바깥에 머물러 있다. 모두가 나이를 먹었다는 이야기다. 두 배우의 건강한 노년을 기원하게 되는 어딘가 정겨운 ‘패싸움’ 시퀀스 이후 메로빈지언은 불길한 ‘메타’ 예언을 남기며 세트장 뒤로 퇴장한다. “아직 안 끝났어! 속편, 프랜차이즈, 스핀오프가 있을 거야!” 아무런 냉소 없이 말하건대, <매트릭스: 리저렉션> 덕분에 아무도 <매트릭스> 시리즈의 속편, 프랜차이즈, 스핀오프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이 위대한 시리즈가 하나의 닫힌, ‘완결된’ 세계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18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노출함으로써 항상 더 젊고 새로운 과거를 약속하는 ‘영원화’의 저주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부활(resurrection)한 몸도 몸이다, 이미 노화하기 시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