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기론을 마주하는 지금, 거장들이 건네는 안부에 우리는 결국 손 내밀게 되는 것일까. 202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가 <씨네21> 선정 올해의 해외영화 1위로 꼽힌 데 이어 2024년의 영화로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다수의 고른 지지를 받아 1위에 올랐다. 필름영화의 물성, 그리고 목격과 기억의 성소로서 극장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동시대 관객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어둠 속 스크린 앞에 기꺼이 앉아줄 것을 요청했다면, 2위를 차지한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적 태도로 절망을 뚫고 전진하는 애처롭고도 씩씩한 보법을 선보인다. 전쟁과 경제위기, 심화된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는 헬싱키의 프롤레타리아 드라마는 불쑥 찰리 채플린의 그림자를 이식해 찬란한 결말로 나아간다. 앞선 두 작품 위로 다시 검은 잿빛을 드리우는 3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동시대적 관점으로 재감각하는 동시에 화면과 음향의 전위적 충돌을 시도한 올해의 문제작이다. 2024년의 1~3위로 꼽힌 세편의 영화 모두 과작인 감독이 장고 끝에 내놓은 대답이라는 점에 주목해볼 만하다. 또한 4위 <추락의 해부>까지 모두 2023년 칸영화제 경쟁·비경쟁영화들로 채워진 점도 이례적이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진실을 다루는 매체로서 영화 내러티브의 다각성, 심층성을 증명했다. 일련의 여성 서사, 포스트 미투 서사가 보여준 흐름에 또 다른 깊이를 부여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5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태주의 드라마로서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신성의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준다. 공개 당시 하마구치의 전작과 비교하는 엇갈린 평가가 나왔던 것과 달리 독창적이면서도 정교한 카메라의 시점과 존재감을 성취한 지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6위는 “동화적이지만 현실적이고, 아름답지만 추악한 현실을 밀도 있게 반영한” (이자연) 숀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에 돌아갔다. 숀 베이커의 노동자 연작이자 새로 쓴 신데렐라 스토리인 <아노라>를 향해 “현대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 폭탄 같은 영화”(김영진)라는 기대감도 더해졌다. 7위 <메이 디셈버>는 “거리 두기와 선 넘기가 서로를 흉폭하게 난반사하는 착취의 시네마”(정재현)로서 토드 헤인스가 동시대 영화계에서 차지한 이색적인 지형을 새삼 체감케 했다. 배우 줄리앤 무어와의 30년 협업이 빛난 결과물이기도 하다. 비범한 시나리오는 “첫 장편영화 시나리오로 아카데미에 지명되는 영광을 얻은 신예 작가 새미 버치의 행보를 기대하게”(이유채) 만든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신비로운 땅속 모험담인 <키메라>는 8위에 안착했다. 영적 세계, 죽음, 신화적 존재들과 연결을 도모하는 로르바케르의 시도는 마치 “경유지와 도착지를 헷갈린 신의 로드무비”(이보라)처럼 초월적 감각을 안겼다. “자신이 믿고 있는 현실/비현실을 뚝심 있게 그려가고 있는 진정한 예술가의 또 다른 걸작”(김철홍)이다.
이란 정부에 의해 체포와 구금, 영화제작 금지령에 처했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실제 사건과 픽션을 엮은 <노 베어스>가 9위에 올랐다. “찍는 자, 찍히는 자, 보는 자의 욕망이 삼각 편대를 이뤄 전진하다 고꾸라질 때”(남선우) 어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멈추는 순간이 주는 깊은 여운”(김소희)을 전하는 <노 베어스>는 검열과 통제를 내적 동력으로 삼는 영화 만들기의 독특하고 감동적인 선례로 남을 것이다. 10위는 <룸 넥스트 도어>와 <바튼 아카데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영화인 <룸 넥스트 도어>는 “알모도바르의 주특기인 색채만으로는 오롯이 표현할 수 없는 무색의 죽음을 두 여성배우의 호연을 통해 숭고함의 영역으로 이끌고 나간다”(문주화). <바튼 아카데미>는 “미국영화 특유의 촬영과 편집으로 작품 전체를 세공하며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형식 자체를 복각해”(정재현) 내면서 한층 완숙해진 알렉산더 페인의 손길을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