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클로즈 유어 아이즈>
과작의 감독이 31년 만에 내놓은 영화를 향한 메시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다수의 표가 모였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이 자신의 미완성 영화와 사라진 배우를 수십년 만에 다시 마주하려는 여정을 담은 영화다. 잊힌 것을 되살리기 위해 방랑하는 자의 여정은 동시대에 빅토르 에리세가 전하는 “망각을 위한 비망록”(김예솔비)으로 자리 잡는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이 스페인 내전 직후를 가리킨다면, 디지털 화면으로 전환된 영화의 몸통이 위치한 시대는 TV 범죄 수사 프로그램의 인기가 한창인 2012년이다. 종국에 기억을 잃은 훌리오를 찾아낸 미겔은 영사기사 친구의 도움으로 옛 필름을 꺼내어 그의 앞에 데려다놓는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극장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OTT 서비스의 등장으로 영화 보는 형태가 바뀌면서 영화관이 사라지고, 영화 관객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오늘날의 현실을 뼈아프게 바라보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영화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통한을 느낄 수 있는 영화”(홍은애)임이 틀림없다. 특히 많은 평자들이 가르델(훌리오)이 영화 속 자신을 마주한 뒤 “감은 눈을 뜨는 기적에서 뜬 눈을 감는 의지”(김소희)를 새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코멘트를 남겼다. “필름, 시네마, 관객에 대한 고민을 집결한 하나의 숏”(이우빈)이라 할 만한 순간이다. 영화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내는 일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보라 평론가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발생 가능한 기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가르델이 훌리오로서 자신을 기억해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가르델/훌리오를 주변인들이 마주하는 일이다. 기적은 당사자의 경험만이 아니라 그의 과거를 공유하는 목격자들의 수많은 증언으로 달성되므로, 이때 주변인들은 기적의 목격자가 될 것이며 그래야 관객(성)은 도모된다”고 썼다. 영화의 존재론이 재검토되는 시대에 “눈을 감으면 영화의 정령과 만나는 기적”(정지혜)을 건네는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2024년 올해의 해외영화 1위에 자리했다.
2위 <사랑은 낙엽을 타고>
두 해고 노동자는 짐 자무시의 영화 <데드 돈 다이>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처음 데이트를 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기다 해고된 마트 직원 안사와 알코올중독이 들켜 건설 현장에서 잘린 홀라파가 그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제외하면,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일련의 프롤레타리아 연작으로 되돌아간 듯한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21세기에 불시착한 지난 세기의 우화”(김예솔비)이다. 가난이 부른 불신과 중독에 시달리는 이 애처로운 커플에게서 북구의 거장은 절망 속의 유머를 바라본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불운을 끌어안았을 때조차 절망의 나락에 쉬이 낙착하지 않는다. 이지현 평론가는 “우울하기란 쉽지만 우울함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낙엽을 통해’ 삶의 찬란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 간결한 직진의 힘에 매료된다”고 평했다. 카우리스마키에게 희망은 획득해야 할 저 너머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망가진 우리에게 남겨진 최후의 회복력이다. 1위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이어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역시 영화적 연결과 구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시대착오성만이 가능케 하는 회복의 감각”(김예솔비)이자 “비극이 득실대는 현실에 내린 영화적 처방”(문주화)으로서 극장 밖을 나선 우리에게 “간절하게 사람의 체온이 당기”(이유채)게 한다.
3위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너선 글레이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바로 앞에 자리한 ‘관심 구역’에 거주하면서 홀로코스트에 부역한 나치 사령관 가정에 잠복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가해자의 삶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폭력의 이미지를 전시하지 않으면서 보는 이가 치가 떨리도록 담담하고 건조하게 묘사해 홀로코스트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허남웅). “화면과 소리의 완결체. 공감각적으로 퍼지는 비극의 시”(김영진)라 칭한 것처럼 표백된 일상을 전하는 화면과 학살 현장을 암시하는 사운드디자인의 부조화가 주효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찾아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언급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지현)이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시각화한 윤리적 선택과 더불어 지난 3월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서 자신의 영화를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적 위기로 연결시켰던 글레이저를 향해 “아무래도 우리 시대의 양심은 이 영화에 걸려 있는 것 같다”(듀나)는 강한 지지가 있는 한편, 전위적 형식의 공허함이나 미학적 욕망에 의심을 표하는 평자들의 문제의식도 뜨거웠다. 김성찬 평론가는 “감독이 설계한 역겨움의 발현이 겉으로는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장치일 수 있으나, 실은 그 자극적인 성질에 기대 의도하든 아니든 우리의 본능을 긍정화하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역기능을 사소화하진 않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도록 주문한다”고 썼다.
4위 <추락의 해부>
“진실의 법정에 감각을 세운”(김소희) 영화 <추락의 해부>가 4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추락의 해부>는 산장 눈밭에서 추락사한 시신으로 발견된 남자를 둘러싸고, 독일인 작가 산드라가 남편의 죽음에 무고를 주장하는 진실 공방을 따라간다. 법정의 쟁점은 살해 유무지만 영화의 진심은 한 인간의 오롯한 내러티브를 이해한다는 것의 문제로 향한다. “미완성의 결말까지 이르는 동안 가족과 부부의 역학관계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강렬하게 전하는 <추락의 해부>는 우선 엄청나게 재미있다.”(듀나) 영화 <빅토리아> <시빌> 등에서 여성 인물의 도발적 이면을 치밀한 대사와 심리묘사로 전했던 쥐스틴 트리에의 진일보라 할 만큼 고도의 각본과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가 너절하게 해부하길 시도하는 대상은 어쩌면 사건보다 사건의 여파”(남선우)이기도 하다. 아내이자 어머니, 유능한 예술가, 나르시시스트, 강하고 복잡하고 의심스러운 여성이 자기 인생의 진실을 증명받는 과정에서 <추락의 해부>는 “드라마의 배경을 위한 법정이 아니라 복합적 자질을 지닌 경합적 장소로서의 법정을 근사하게 등장시킨”(이보라) 법정영화의 새 고전으로도 손색없다. 시차와 시선을 절묘하게 디자인해 “시간이 아니라 시선을, 아이디어를 뛰어넘는 본질을 탐구하면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실을 이야기”(이지현)하는 영화를 보는 동안 “모든 감각을 기울여 골똘히 보고 듣는 확장”(이유채)의 경험으로 나아간다.
5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을 열고 광활한 자연을 유려하게 교란시킨 영화적 실험이 돋보였다.”(문주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 <드라이브 마이 카> 이후 하마구치 류스케를 향한 기대감에서 다소 비껴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도시에서 온 연예 기획사 직원들이 산골 마을에 글램핌장을 세우기 위해 주민들을 설득하려는 과정에서 주인공 타쿠미와 딸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기이한 일들을 따라간다. 장소와 풍경의 시적인 역량을 몽타주화하는 독보적 역량을 알리는 류스케의 이번 소품은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와의 긴밀한 협업 속에서 영화, 뮤직비디오 등을 경유한 탄생 과정 자체가 흥미롭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준 부감숏 롱테이크의 자연 이미지(하늘과 나무)와 장엄한 클래식 음악만으로 영화의 긴장감을 끌어내고 영화 내내 관객의 숨을 조이게 만드는 당차고 무시무시한”(홍은애) 압도감을 안기는 한편 “수미상관으로 제시한 롱테이크가 슬프도록 아름답다”(김성찬)는 반응도 이어진다. 자연의 시점, 나아가 덜컹거리는 자동차처럼 사물의 시점으로 나아가는 시점숏을 두고 “실망스러워도 여전히 주시하게 되는, 감독의 카메라에 대한 고도의 자의식”(김영진)을 언급하는 평자도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 키노-아이를 소유한 동시대의 작가 하마구치를 향해 이런 상찬도 쏟아졌다. “시선으로서 카메라의 존재감을 이만큼 드러내는 일도 흔치 않은데, 누가 영화와 다른 예술의 차이를 묻는다면 이 영화를 보여줄 것이다.”(김성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