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새해 단상. 견디는 힘과 참는 근육
2025-01-10
글 : 송경원

“변화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만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알다가도 모를 알고리즘의 세계, 첫 번째. 요즘 계속 마음을 다스리는, 특히 불교 관련 명언들이 SNS 상단에 뜬다. 왜 그런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치 관련 영상과 게시물을 자주 봤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도처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몰상식한 저항이 충돌 중이다. 시민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민주주의는 원래 느린 법이라 변화의 과정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어떤 논객은 불안해할 이들을 달랠 신경안정제를 자처하고, 또 다른 논객은 북받쳐오는 감정에 눈물을 터트리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답답한 소식이 뉴스를 도배하는 시기인 만큼 해독제가 되어줄 지혜의 한마디가 절실한데, 그걸 또 유튜브나 SNS 등의 알고리즘이 귀신같이 캐치해서 정치 관련 이슈에 종교·인문학적 격언을 세트 메뉴처럼 묶어놓았다. 뜻밖의 감사.

“늙었어. 자넨 늙었어~!” 알다가도 모를 알고리즘의 세계, 두 번째. 드라마 <태조 왕건> 속 견훤의 시그니처 대사가 연말부터 계속 피드에 뜬다. 짜증과 안쓰러움이 5:5로 섞인 말투로 들어야 맛이 사는데, 올해 유행 중인 새해 덕담은 참 정직하고 무례하게 뼈를 때린다. 여기에 ‘긁’힌다는 것 자체가 나이 들었다는 방증이겠지만 요즘은 농담을 즐길 여유도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다. 간장 종지처럼 쪼그라든 마음 그릇은 하루에도 여러 번 차고 넘쳐 울컥한다. 진짜 나이가 들어서 사람이 강퍅해지는 건가 싶다가도 체력 문제일 거라 애써 생각을 돌려본다.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또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별것 아닌 일에 일일이 반응할 때마다 드라마 <미생> 속 대사를 조건반사처럼 되새긴다. 그래서 새해만 되면 다들 그렇게 체육관을 등록하나 보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 달라지고 싶은 마음. 사람 다 똑같다.

염치와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를 지나 어느덧 인내심이 귀해진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짧고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와중에 무언가를 진득하게 즐기려면 몇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요즘 부쩍 감정 표현이 많아진 딸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참고 견딘다는 건 사회적 재능이구나. 감정을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기특한 시기가 있다. 웃고 울고 잘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하는 시절을 지나면, 이제 자신의 감정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누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정확히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정제해서 표현하는 방식을 배워나가는 게 우리가 말하는 ‘사회화’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점점 아기에서 아이로 커가는 딸을 보며 새삼 다시, 함께 배운다. 나이가 들며 점점 마음 그릇이 좁아지는 걸 느낀다. 견디는 힘을 기르고 참는 근육을 키우면 마음 그릇도 조금은 깊어지지 않을까. 마음 그릇이 넉넉해지면 그제야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새해에는 내 얄팍한 그릇이 조금 넓어져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좀 더 많이 이해하고 자주 공감할 수 있길 소망한다. 올해는 극장에 앉아 길고 지루한 영화를 좀더 자주 찾아 봐야겠다. 다시 견디고 생각하여 공감하는 근육을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