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그림 찾기. <리얼 페인>의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카메라는 동일한 동선을 따라 뉴욕 공항 로비를 훑고 동일한 좌석에 앉아 있는 벤지(키런 컬킨)의 얼굴로 다가간다. 차이점은 셔츠 착의 유무, 가방의 위치, 쇼팽의 곡, 영화 타이틀의 위치 등이 있다. 여기에 추가할 것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다. 공항은 목적지를 둔 사람들의 설렘, 긴장감 그리고 피곤함이 교차하는 장소다. 사람들 자체가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으로 존재하는 이곳에서 벤지 혼자 멈춰 있다. 통유리창으로 내리는 햇볕 때문에 달라진 그의 낯빛에서 시간대가 달라졌음을 알 뿐이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이 두개의 장면 중 무엇을 기준 삼아 ‘다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두 얼굴 사이에 놓인 것은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함께 떠난 폴란드 여행이다.
이토록 특이한 우울감
<리얼 페인>은 한국 시장을 겨냥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MBTI적인 캐릭터로 두 인물을 빗어낸다. ‘MBTI 유형별 여행 스타일’편이라고 편의상 이름 지어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는 펑키하게 출발한다. 물론 그런 분류와 재단을 통해 캐릭터의 행동을 예측함으로써 오는 쾌감도 영화를 재밌게 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 영화를 납작하게 보는 프리즘에 불과하다. 사촌지간인 데이비드와 벤지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로 향한다. 할머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그녀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국으로 넘어와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셈이다. 3세대인 데이비드와 벤지는 할머니가 둘이 여행 가라고 남겨둔 돈을 가지고 홀로코스트 투어를 떠난 것이다. 강제수용소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살았던 집까지 방문하는 이 여행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모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 물리적인 여정이자 소원해진 둘의 관계를 회복하는 심리적 치유의 여정이다. 하지만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관계를 회복하며 일상으로 복귀하는 흔한 할리우드영화의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얼핏 보면 그렇게도 보이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리얼 페인>은 전형성에서 미세하게 비껴 서 있는 특이하고 우울감이 짙게 깔린 영화다.
홀로코스트를 다룬다고 해서 <리얼 페인>을 홀로코스트영화로 분류하는 것도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쉽게 대상화하지도 않으며 진중하게 다룬다. 두 주인공을 짓누르는 근원적인 출발점이자 역사적 비극인 홀로코스트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거대한 풍경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리얼 페인>은 데이비드와 벤지의 틀어진 관계를 역사적 상흔의 장소 위에 겹쳐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벤지의 내면에 바로 메스를 들이밀지 않고 홀로코스트 투어를 통해 우회술을 펼친다.
<리얼 페인>은 홀로코스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로 투어 참가자를 구성하여 다양한 시각으로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고통을 바라보게 한다. 이 투어에서 형성된 여러 관점은 데이비드와 벤지의 관계, 정확하게는 벤지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기도 한다. 영화 속 홀로코스트 투어는 폴란드 바르바샤의 게토 영웅기념비 앞에서 시작한다. 가이드는 나치에 저항했던 영웅적인 유대인의 모습을 강조하면서 수용소로 끌려갔던 사람들이란 편견을 교정한다. 루블린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로 향하기 전 기념비, 공동묘지, 옛 유대인 거주지를 방문한다. 이 투어의 핵심은 ‘보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1953)의 방식과 흡사해 보인다. 들뢰즈가 행위의 영화에서 견자(見者)의 영화로 이행한, 그 분기점에 놓인 모던 시네마로 평했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캐서린(잉그리드 버드먼)은 자신의 눈으로 본 이탈리아의 유적지, 사람들, 풍경에 사로잡히며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녀는 결정적으로 폼페이에서 발굴한 석고로 굳어진 남녀의 형상을 보고 에피파니의 순간을 맞이한다. <리얼 페인>에는 이런 순간이 없다. 벤지는 그저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은 홀로코스트 투어에 불만을 제기한다. 그는 폴란드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사물을 보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결국 그는 가이드에게 이 투어가 ‘리얼’한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당황한 가이드는 임기응변으로 돌을 묘비에 올려놓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유대인의 오래된 전통이다. 가이드는 이 행위를 ‘당신을 잊지 않겠다’라는 의미로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인다.
<리얼 페인>에서 보는 것,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 투어는 벤지의 내면을 뒤흔드는 풍경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따로 놀진 않지만, 홀로코스트는 이 영화의 거대한 맥거핀이란 느낌을 준다. 물론 벤지가 강제수용소를 보고 난 후 통곡하거나, 벤지의 모난 행동 때문에 데이비드가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우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과 관련된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에 있다. 분명 다그치는 벤지 때문에 불현듯 떠오른 가이드의 아이디어지만 벤지는 다른 일행에게 은근슬쩍 같이 만들었다고 숟가락을 얹는다. 이런 식의 화법이 영화에 은근히 등장한다. 그것은 벤지의 소극적인 제스처로 비친다. 그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지만 자신의 입을 통해 속내를 내비친 적이 없다. 데이비드의 입을 통해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들었을 뿐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애초에 여행도 데이비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벤지는 돌이다. 수동성의 상태로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들리지 않는 벤지의 비명. 그는 남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인(囚人)의 서사
다시 영화의 시작과 끝으로 돌아가자. 두 장면은 다른 그림일까? 어쩌면 같은 그림일지도 모른다.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있는 벤지. 고통이란 무엇일까? 여행을 통해 무엇이 달라졌는지 얼굴에서 가늠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영화는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벤지의 얼굴보다 갈 곳을 잃은 채 멈춰 있는 그의 몸짓에서 우리는 그의 진짜 고통을 조심스럽게 가늠할 뿐이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누군지도 모른 채 사라지는 이른바 ‘비장소’인 공항에서 벤지는 구조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페인>은 수인(囚人)의 서사로도 읽힌다. 영화 속 여행이 벤지의 망상 혹은 환상으로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여행이 사실이었더라도 여행이 끝난 후에 벤지는 복귀할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 내내 잠을 푹 잔 벤지는 각성된 상태로, 동시에 움직일 수 없는 무생물인 돌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두가 어딘가로 떠나는 곳에서 떠날 수 없는 자의 고통. 앞서 살펴본 두 장면에서 다른 점을 찾기보다는 동일한 행위 속에 진정한 고통이 있다. 우리는 벤지의 얼굴을 통해 고통을 볼 수 없다.